[불교문화 산책] 탑비(塔碑)

불교문화 산책/ 스님의 큰뜻 온전히 남아

2007-10-04     관리자


Ⅰ. 탑비의 기원과 종류
비(碑)는 돌에 글을 새겨놓은 것으로, 사각형 입석은 비(碑), 원형은 갈(碣)이라 부른다. 통칭해서 ‘비갈’이라고 하며, 비문의 내용에 따라 다시 탑비(塔碑)·묘비(墓碑)·신도비(神道碑)·사적비(事蹟碑)·송덕비(頌德碑) 등으로 구분한다.
비는 중국 주대(周代)부터 시작하여 석비의 전성기인 한대(漢代)를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러 비로소 이수(賂首)와 제액(題額), 비신(碑身), 귀부(龜趺) 등을 갖춘 전형적인 형식이 완성되었다. 현존하는 석비는 대부분 제작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찰이나 승려와 관계되어 있어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Ⅱ. 한국 탑비의 형식과 특징
귀부는 거북이 형태로 비신을 지탱하는 부분이며 이수[지붕돌]는 비신의 윗 부분으로 용을 비롯한 구름문양이 혼용되어 조각되는데, 용은 반룡두(蟠龍頭)가 서로 맞대어 있다.
사진 1과 2의 탑비는 모두 고려 초기의 탑비로 각각 승려 선각 대사와 대경 대사를 위해 건립되었다. 두 비 모두 고려 초 명문장가 최언휘가 글을 지었다. 이들 탑비의 귀부 머리는 뚜렷한 용머리를 하고 있으며 비좌에는 화려한 복연화문과 안상을 조식하였다. 보리사 탑비에서는 더욱 진전되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
귀부의 거북머리가 용으로 바뀌는 것은 통일신라 태종무열왕릉 귀부를 시작으로 한다. 초기에는 사실적인 거북 표현이 주를 이루다가 6각·8각의 도식적인 귀갑문, 작고 단순해진 발과 꼬리 표현 등으로 변모한다. 일부에는 어미를 따르는 새끼거북을 함께 표현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한다.
사진 3은 백련사 사적비로 원래 고려 고종 32년(1245) ‘원묘 국사비’로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파괴되어, 조선 숙종 7년(1681) 비신과 이수를 새로 만들어 사적비로 삼은 특이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 이수 아랫부분에 지붕의 서까래를 표현하였다.
고려시대 이수는 직접적인 천상의 표현이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점차 건축물의 지붕과 같은 형식으로 변화하는 초기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비신 좌우측면에는 넝쿨문양[인동문] 등을 조각하였다. 고려말 이전에는 비신에 글만을 새겼으나 고려말~조선에 들어와서는 비신 측면에 꽃, 구름문양 등으로 전면을 덮는 형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에 속한다.
사진 4는 지곡사지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로 자연암반 위에 구름과 초화문을 새긴 후 비좌로 삼은 특수한 경우다. 북한산 순수비와 같이 산 정상에 비를 설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암석에 비신을 세우는 경우는 고려시대 이후 유행한 비보사상에 근거하는 것이다.

Ⅲ. 우리나라 탑비 구성의 원리
비석에 거북과 용을 표현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중국 당나라 비의 모방과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사신도 중 현무(玄武)에서 기원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거북과 용은 장수의 상징인 동시에 물·하늘·땅을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는 신의 사자로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석비를 구성하는 가장 하부를 거북과 용으로 형상화한 것은 비가 영원토록 전해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비신은 왕, 승려, 사찰의 행적을 기록하는 부분으로 인간에 비교한다면 몸통에 해당하며, 가장 정상 부분인 이수에는 구름과 용을 조각하여 하늘로 승천한 비문의 주인공을 상징한다. 그밖에 선사들의 탑비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사찰과 관련된 것이 영남지역에 집중되는 특징을 보이는데 선사들의 영골을 봉안한 부도 역시 호남에 대거 조성된 것과 관련이 있을 듯싶다.

Ⅳ. 맺음말
뭇 세상으로부터 조금은 외진 곳에 우뚝 서, 자칫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의 동요를 다잡는 돌기둥.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큰스님의 말씀을 온전히 읽지 못하는 속 좁음이 안타깝다. - 몸은 청정한 산사에 있으나, 세상의 인연은 끊기 어렵네. 티끌 하나도 선사의 위업을 지울 수 없지만 일편 낙엽만이 달빛을 가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