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22.간다라의 보고 라호르박물관

신왕오천축국전 별곡 22

2007-10-04     김규현

가자, ‘간다라국(建馱羅國)’으로

오천축국을 두루 섭렵하여 순례의 목적을 대충 달성한 혜초는 귀국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출발지인 장안으로 돌아가는 행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선 그 길목인 카시미르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순례승이 주로 이용하였던 파미르 고원을 넘어 타크라마칸 사막 남단의 오아시스 도시 호탄을 거쳐 돈황으로 통하는, 이른바 ‘서역남로(西域南路)’는 당시는 통행이 여의치 않았다. 그렇기에 혜초는 할 수 없이 또 다른 코스인 스와트 계곡을 통해 파미르를 넘는 ‘서역북로(西域北路)’를 이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고 우선 서쪽의 간다라국으로 향했다고 보여진다.

물론 여기서 ‘보여진다’라는 표현은 필자의 비정(比定)에 의한 하나의 가설이다. 현존본 『왕오천축국전』의 본문에는 그 행로의 변경 사유가 꼭 집어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몇 가지 점으로 위의 가설은 뒷받침된다. 우선 먼저 꼽을 수 있는, 만약 혜초의 최초의 귀국길이 간다라국을 경유하는 것이었다면 어렵게 카시미르 고원으로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올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위의 ‘남로’는 천축길의 초창기 곧 7세기 이전에는 순례승이 주로 이용하였던 길이었지만, 7세기 전후로부터는 사막의 횡단 거리가 좀더 짧고 오아시스가 일정하게 벌려져 있는 ‘북로’가 주로 이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세 번째로는 혜초가 파미르 너머에 있는 북쪽 나라들-예를 들면 토번(吐蕃, 현 Tibet), 대발률국(大勃律國, 현 Skardor)·소발률국(小勃律國, 현 Gilgit)·양동국(羊同國, 현 W. Tibet)·사파자국(娑播慈國, 현 W. Leh)-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혜초가 이들 나라에 대해 “그 곳은 오랑캐 나라이다.”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혜초는 선배들의 일반적인 행로에 의존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으려고 카시미르까지 올라왔지만, 막상 현지에서 정보를 수집해보니 그 길은 이미 거의 폐쇄되었거나 아니면 당나라와 토번의 전쟁상태로 동행할 구법승이나 대상의 무리들을 구할 수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다른 길을 찾아 일단은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북쪽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우선 간다라국으로 갔다고 보여진다.
실제로도 당시는 토번과 당이 실크로드의 패권을 걸고 다투고 있었던 시기이고 또한 이들 나라는 학계에서도 속칭 전문국(傳聞國)으로 분류하고 있어서 위의 가설은 좀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혜초가 실제로 어느 길을 통해 파미르를 넘었느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심도 있게 다뤄보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우리도 혜초를 따라 카시미르 고원을 내려와 간다라국으로 가보기로 하자.

혜초는 그 일정을 “또 카시미르국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어 한 달쯤 가면 간다라국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옛 간다라국으로 가는 길목에,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수염을 기른 인상적인 모습으로 알려진 ‘시크(Sikh)교’의 성지인 암릿차르(Amritsar)라는 도시를 통과해야 했다. 이 곳에는 종교간의 유혈극이 벌어진, 인도 근대사의 상처가 생생히 남아 있는 아름다운 ‘골든템플’이라는 곳이 있어서 그 사원의 객실에서 하루 이틀 정도는 공짜로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 곳에서 국경은 지척이었다.

혜초가 지나갔을 당시야 국경이 어디 있었고 무슨 여권이나 비자(Visa)가 필요했겠냐만, 역사는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닌지 ‘해동의 나그네’는 간다라국으로 가기 위해서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한국과 파키스탄은 ‘비자 면제 협정’이 맺어져 있어서 파키스탄의 관문인 라호르에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석가고행상(釋迦苦行像)이여!

대개의 나그네가 이 곳에 오는 이유는 라호르(Lahor) 박물관에 있는 ‘고행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 박물관에는 이 밖에도 수준 높은 예술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간다라 최고의 걸작품인 이 고행상이 가장 유명하다.

다음 날 아침, 박물관으로 달려가 문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입장하여 간다라실로 들어갔다. “새 아침의 햇살 속이라야 그 걸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 곳에, 그 햇살 속에, 그 유명한 붓다상은 선정인(禪定印)을 짓고 깊은 고뇌에 들어 있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던 6년간의 고행을 나타내듯 움푹 패인 눈에는 고뇌의 흔적이 내비치고 있으며 깡마른 갈비뼈와 뼈대만 앙상한 손가락에는 실핏줄과 신경세포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붙어 있었고 뱃가죽은 등가죽에 들러붙어 있는 듯하였다.

꼿꼿한 자세에서 내비치는 고고한 기상과 움푹 파인 두 눈에서 나오는 형형한 안광만 아니라면, 그것은 산인간을 묘사한 것으로 보여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차라리 좌화(坐化)한 주검이었다.

대개의 종교적 조소들이 성스러움과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서 애를 쓴 것에 비하면 이 고행상이 주는 의미는 사뭇 특별하다. 미술용어로 ‘하이퍼리얼리즘(H Realism)’의 극치를 이루는 이런 예술품이 무려 2천여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선뜻 믿어지지가 않았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문득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싯다르타여! 고행의 아픔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눈에는 희미한 빈사의 기색을 띠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무엇을 생각하는가? 차갑고 공허한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해탈이니 윤회니 열반이니 하는 것은 모두 말마디에 지나지 않는다네. 실은 ‘니르바나’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말마디만 있는 것이라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의 결과로 나타난 미술사조가 바로 헬레니즘(Helenism)과 동방문화가 융합된 이른바 ‘간다라문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특히 미술사에서 간다라는 큰 빛을 발했다.

그리스 민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가 자리잡은 언덕에 ‘아크로폴리스’라는 구역을 만들고 신전을 지어 신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기를 즐겨하였다. 그들이 동방으로 이주하였을 때 원주민들이 믿는 종교에 그런 것이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본토인들이 믿는 신의 조각상, 곧 불상을 만들어주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인을 닮은, 코가 높고 눈이 깊숙하고 수염까지 달린 불보살상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원래 초기불교시대에는 붓다의 유훈을 지키기 위해서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적 장엄물은 필요하였기에 불상 대신 보리수, 법륜, 물고기, 스투파 등을 만들어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미술사에서는 이 때를 ‘무불상(無佛像)’시대라고 부른다.

그 후 불교가 확산됨에 따라 불상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인도 본토에는 마투라 불상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고 간다라 지방에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각종 형태의 불상이 출현하여 마침내 황금기가 전개되기에 이른다.

이 사조는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로, 중국 본토로, 다시 해동으로, 일본으로 전파되며 초기의 그리스 풍에서 점차로 전파되는 곳의 원주민의 얼굴, 곧 육질형의 몽골로이드형으로 닮아가는 변화를 거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