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 산책] 48.마애불(磨崖佛)

불교문화 산책/ 48 하늘과 땅과 부처

2007-10-02     관리자


Ⅰ. 돌에 새긴 간절한 염원

옛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조상께 제사지내고, 하늘과 땅의 신께도 감사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산(山)에 대해서는 각별한 애정을 지녔는데, 이것은 한국인이 지니는 생활신앙의 모태이자 하늘과 가까이 맞닿는 곳으로 산이 신(神)과 교감할 수 있는 장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신앙과 예술을 조화시킨 마애불은 한국인의 미의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조형물이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땀흘려 오른 산 위에 자리잡은 마애불을 친견하노라면 경외감 이전에 구도자의 간절함이 있다.


Ⅱ. 마애불의 기원과 아름다움

마애불은 절벽이나 커다란 바위에 새겨 놓은 불상을 일컫는다. 아잔타 등 대승불교 시대의 석굴사원 내부에는 불·보살상을 각 벽면에 조각하였으며, 이후 절벽이나 바위에 감실을 파고 새긴 간다라 스와트 지방의 대형마애불로 발전한다. 경주 남산 약수계와 삼릉계의 대형 마애불은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우리 민족은 산의 특정 공간이나 대상에 산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왔고, 개인이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불교가 정착되기 시작한 4~5세기부터는 신앙의 중심이 불상으로 옮겨왔고 수려한 산하 곳곳에 수많은 마애불을 조성하였다.
우리 나라 마애불은 불교 도입 이전의 산악숭배, 암각화의 전통에 기반한다. 조성된 위치만 보더라도 민속신앙이나 무속적 요소가 불교로 전이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선도산 성모 이야기가 전해 오는 선도산 마애불이 있다. 경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마애불 본존과 양 협시보살은 균열이 많은 산 정상의 단애면을 이용하였으나 보살상의 대좌는 경주 남산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별도로 세웠다. 즉, 마애불이 단순히 양질의 석재만을 찾아 조성된 것이 아닌 특별히 의미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조성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백제는 중국 남조불상의 영향을 받아 온화한 미소와 풍부한 양감을 특징으로 한 태안, 서산, 예산 마애불을 제작하였다. 신라 역시 단석산 마애불을 비롯, 경주 남산에 수많은 마애불을 조성하였는데, 오랫동안 당나라 불상의 영향을 기반으로 굽타, 서역 등지의 국제적인 요소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화려하고 사실적인 불상을 만들었다. 굴불사, 칠불암, 신선암 마애불 등은 이러한 특징을 대표하는 예에 속한다. 고려는 법주사 마애불과 같이 거대한 규모를 특징으로 하며, 조선시대에는 표현에 있어 민불(民佛)과 같이 소박, 담백해진다.

Ⅲ. 신비한 미소는 순례객의 발길을 잡고…

우리 나라는 풍부한 화강암을 재료로 삼국시대 이래 조선까지 약 200여 구의 마애불을 제작하였다. 바위면을 다듬거나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음각으로 불상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경남 울주군 어물리 약사삼존불과 같이 거의 환조에 가깝게 정면과 좌우측면을 조각하는 입체적인 표현도 있다. 아울러 경주 남산 약수계, 파주 용미리, 논산 계룡산 마애불입상은 바위면에 신체를 선각으로 새기고 머리[佛頭]는 별도의 석재를 덧붙였는데, 이것은 산천비보에 의거해 마애불이 조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애불은 인적 가까운 곳에도 있지만, 대부분 산 깊은 곳이나 정상에 위치한다. 이것은 마애불이 단순히 불상으로만 옛 사람들에게 존재했던 것이 아닌 산 자체를 불국토의 구현으로 생각했음을 알려준다. 산을 거대한 금당(金堂), 확대된 불국토로 생각하고 계곡마다 산세에 어울리는 불상을 봉안한 옛 사람들의 마음 쓰임에 얼굴이 달아오름을 감출 수 없다.
최근 들어 환경훼손으로 인해 마애불에 보호각 가설이 늘고 있다. 석굴사원의 전통에 따라 외부에 전각을 가설하는 예도 있지만 무분별하게 설치된 보호각으로 인해 잃는 것도 있다. 새벽 동틀 때 바라보는 마애불의 미소에는 구도자의 희열을, 일몰 때는 사라지지 않는 망상의 고통이 번지는데, 경직된 일개 돌부처로 박제화되어감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