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21.불경의 제4차 결집지 스리나가르

신왕오천축국전 별곡 21

2007-10-02     김규현

용왕(龍王)의 전설 어린 달 호수(Dal lake)

우연한 기연(奇緣)으로 귀한 고서 『카시미르의 불교(Buddhists of Kasmir)』를 얻은 호숫가의 새 아침은 신비한 물안개에 잠겨 있었다. 카시미르의 주도 스리나가르는, ‘동양의 베니스’라는 애칭이 말해주듯, ‘물의 도시’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제롬 강과 달 호수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보트 하우스(Boat House)’가 수천 개나 물 위에 떠 있는데 그 중 유명한 호텔들도 많다. 이 수상가옥의 시원은 카시미리(Kashimiri)로서, 카시미르 사람들의 자존심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비가 많고 무더운 인도 본토인들에게 이 곳은 더할 나위 없이 환상적인 피서지였다. 그것은 14세기 무굴제국 때부터 시작되어, 다시 영국에 의해, 다시 인도의 부호들에 의해 흉내내어졌다. 당시 카시미르는 독립국이었기에 일치단결하여 외지인에게는 땅을 팔지 않았다. 그래서 개발된 방법이 호텔보다 훌륭한 시설을 갖춘 배를 건조하여 호수에 띄우게 된 것이었다. 이런 편법이 일반화되면서 지금까지 내려와 세계적인 관광거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거대한 수상도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시카라(Shikara)’라는 보트에 의해서다. 길고 날렵하게 생긴 이 보트는 옛 무굴시대의 황제들이 했던 것처럼 갖가지 치장을 하여 그 화려함만으로 달 호수의 유명한 명물이 되었다. 승객들은 이 요란한 배를 타고는 비스듬히 누워서 ‘하불바부’라는 ‘물담배’를 돌아가며 피우거나, 호수 위를 돌아다니며 풍광을 만끽하면서 쇼핑도 즐긴다.

볼거리, 살거리 많은 호수이지만 뭐니뭐니해도 달 호수의 백미는 역시 하루를 여는 새벽시장이다. 흥청거리던 어둠이 물러가면 이번에는 이 호수의 주인인 용왕의 입김 같은 신비한 새벽안개가 드리우기 시작하는데 그 속에서 수많은 시카라가 홀연히 나타나 한 곳으로 모여든다. 바로 벼룩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오랜 전쟁으로 찌든 카시미르 사람들도 반짝 시장이 열리는 짧은 시간만은 전쟁의 공포를 잊고 즐겁게 떠들며 물건을 사고 팔면서 하루의 삶을 시작한다. 이런 정경이야 오랫동안 조상대대로 되풀이되었을 민초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 광경은 우리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웃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야 하는 그들의 현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겨질 정도로 평화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카시미르에 태어난 이유 하나만으로 ‘알라’라는 신을 믿어야 하고 커가면서 타종교를 배척하게 되었지만 이런 배타성은 자아의식이 싹튼 다음에 스스로 판단한 선택의 결과가 아니고 오직 전통이라는 환경에 의한 학습의 결과일 수 있다.

“모든 증오는 반복되는 학습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라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처럼 이는 바꿔 말하면 모든 증오의 시작은 종교에서 시작된다는 말인 것이다. 다시 비약하면 가장 나쁜 범죄로 꼽히는 살인죄도 자기 종교를 위해서라면 숭고한 미덕이 되고 대량 살인일수록 더욱 그런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도 끊이지 않는, 근본주의 종교들간의 혈전은 과연 종교의 본질을 심각하게 의심하게 만든다.

각설하고, 전설에 의하면 달 호수는 용왕이 살던 호수였다. 혜초나 현장은 다같이 개국전설을 채록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혜초는 “나라 안에는 용지(龍池)가 하나 있는데, 그 못의 용왕이 매일 천 명의 나한승(羅漢僧)을 공양한다.” 하였고 현장 또한 장광설로 달 호수의 유래를 기록하여 신비감을 부추기고 있다.

즐비한 너와지붕집(板木屋)

카시미르에 가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집들은 판자로 지붕을 덮었고 짚이나 기와는 쓰지 않았다(屋 板木覆 亦不用草瓦).”라는 구절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군들의 본거지여서 대낮에도 총알이 날아다닌다는 구 시가지를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우선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카메라를 숨긴 다음 시내를 관통하는 제롬 강에 걸쳐진 나무다리를 건너 인파와 차량과 온갖 물건이 섞여 혼잡스런 광장시장인 ‘바자르’를 헤집고 들어갔다. 시장바닥이야 민초들의 삶이 서려 있는 볼거리, 찍을거리 ‘영순위’이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2, 3층의 낡은 목조 건물이 늘어서 있는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거기 정말 혜초의 기록대로, 목조기와, 즉 ‘너와(板木)’로 지붕을 이은 건물이 있었다. 그것도 한두 채가 아니었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정말로 “집들은 판자로 지붕을 덮었고 짚이나 기와는 쓰지 않았다.”라는 말 그대로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과연, 혜초구나. 내가 이 맛에 인도대륙을 헤맨다니까!’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결손된 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을 나침반 삼아 인도대륙을 떠돌면서 때로는 너무나 불충분한 기록과 애매한 표현 그리고 정확하지 못한 방향과 노정(路程)의 순서 등으로 좌절과 실망을 느낄 때도 많았다. 그렇지만 때로는 단순한 단어이지만 너무나 정확하게 사실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맛볼 수가 있었는데, 이번 경우는 그 중 백미에 속했다.

불경의 제4차 결집지(結集地) 하르완(Har-wan)

오후에 이슬람 정원에서 소득 없이 헤매다가 묻고 물어서 해거름에야 하르완 유적지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수원지 댐에서부터 아이들을 앞세워 산길을 한참 오르니 사드나르 산의 중턱 숲 속에 과연 가람 터로 보이는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한 눈에도 둥근 스투파와 가람이 있었던 유지가 완연하였는데 군데군데 흙과 돌로 쌓은 인공의 건축 잔해와 벽돌조각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수없이 보아왔던 폐허가 된 불적의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4세기 초 북인도를 통일하여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쿠샨 왕조를 세운 카니쉬카 왕은 당시 협존자(脇尊者)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규모 결집을 하였는데, 500명이 모여 7일간 삼장(三藏)의 주석을 완성하여 적동판(赤銅板)에 새겨 돌상자에 넣고 스투파를 세워 그 안에 안치했다고 한다. 그 때의 광경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그 때 협존자가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세월은 이미 많이 흘렀습니다. 제자들의 부파에 따라 이론은 서로 모순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비탄하여 말하기를 ‘여래가 입적하신 후 시간은 지났습니다만 아직 유법을 들을 행운은 있습니다. 나는 불법을 중흥시키고자 합니다. 스스로의 부파에 따라 상세하게 경율론(經律論)의 삼장(三藏)을 주석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7일간에 거쳐 사사공양(四事供養)을 행한 후에 500명의 아라한과를 얻은 비구를 선발하여 (중략) 이에 전 30만 송(頌)이 완성되었다.”

1,700여 년 전, 500명의 쟁쟁한 학승들이 모여 진리를 토론했을 하르완! 그러나 이미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린 가람터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또한 근처에는 「순정이론(順正理論)」을 지은 유명한 대승논사 상가바드라(衆賢論師)의 유적도 있다고 하나 그 곳 역시 망각의 역사 속으로 스러져 버린 지 오래여서 더 이상 물어볼 곳도 없다.

땀을 식히며 망연히 허무 삼매에 들어 있는 ‘해동의 나그네’에게 길잡이를 해주었던 아이들이 손을 잡아끌며 으슥한 곳으로 가자더니, 그 곳에서 파낸 것이라며 작은 테라코트 조각을 보여주며 사라고 종용한다. 간다라풍이 완연한 목이 잘린 불두(佛頭)와 엽전 등이었다.

얼마 전 고고학 발굴이 있어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그 때 자기들이 이것들을 주웠다고 한다. 대개의 유적지에서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한 터라 필요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어 몇 푼을 쥐어주며 한두 개 집어들며 생각했다.

‘그래 뭐 흙으로 빚은 불상이 진짜가 어디 있고 가짜가 어디 있으랴. 이 곳에서 이렇게 이리저리 뒹굴고 계실 바에야 차라리 해동으로 가시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