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마지막으로 남는 것] 명작 같은 삶

2007-10-02     남지심

저는 지하철을 탈 때면 지하철 벽에 부착된 짧은 글 읽는 재미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차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입안 가득 향기가 도는 것처럼, 짧은 글을 읽고 나면 가슴 가득 향기가 도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행복해 집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널리 알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구나.’하는 감동과 함께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어서입니다.

물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지하철 선교회인가? 하는 데서 그 일을 하는데, 기독교인들이 글의 내용과 같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쓴다면 그들이 우리 불교도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하다 보니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제가 기독교 지하철 선교회 얘기를 꺼낸 것은 10월에 그 단체에서 지하철 벽에 부착한 글 제목이 ‘마지막에 남는 것’이어서입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10월에 읽은 글 내용을 옮겨 보겠습니다.

영국의 어떤 가정에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두 아들 다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옥스퍼드 대학에 다녔다고 합니다. 큰 아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국회에 진출해 정치가의 생을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렸고, 작은 아들은 인도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빈민들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같은 가정의 형제로 태어난 두 사람은 같은 대학을 졸업한 후 각기 다른 생을 산 것이지요. 한 사람은 세속적인 가치를 좇아서, 또 한 사람은 영적인 가치를 좇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죽고 났을 때 동생은 대영백과사전인 브리태니커에 반 페이지 분량으로 생이 기록되어졌고 형은 누구누구의 형이라는 단 두 마디의 말로만 기록되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글은 인간의 삶 안에서 마지막에 남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고 묻고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로 기억되는데 국어시간인지 사회시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그 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속담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훈계할 때 잘 사용하기 때문에 저도 성인으로 성장할 때까지 부모님으로부터 몇 번 그 속담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뿐 아니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머리를 끄덕이시겠지요. “그래 맞아. 우리 아버님도 나를 야단치실 때면 늘상 그 말을 하셨지.”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이 속담에서 이름을 남긴다는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라는 속담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꺼내는 것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고 싶어서입니다.

이름을 남긴다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일 먼저 명예를 떠올릴 것입니다. 위대한 학자,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종교인,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사회사업가…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혼신의 노력을 해 봤지만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알 때 사람들은 자기 생명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자식들한테 그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교육열의 과잉도 결국은 부모들의 그런 자기 욕구에서 나와진다고 봐집니다. 요즈음은 최고의 가치가 돈이기 때문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돈을 많이 버는 것으로 의미전환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위대한이라는 말을 하고 있으려니 전에 어떤 분한테서 들은 얘기가 생각납니다. 그 분은 시를 쓰는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친구는 위대한 명작을 쓰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명작 같은 삶을 살겠다고 했습니다.”

명작 같은 삶 ! 말 자체로도 참으로 아름답군요.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눈물까지 핑 돌려고 합니다. 저에게 그 말을 한 분은 지금 지리산 기슭에서 명작 같은 삶을 일구어 가고 있습니다. 밭고랑을 일구어 가듯이 말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할 때, 이름을 남긴다는 참 의미는 명작 같은 삶을 남긴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위대한 학자,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종교인,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사회사업가… 를 말할 때 ‘위대한’은 업적만을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위대한’이라는 말 속에는 업적도 물론 포함되지만 업적 못지않게 삶의 족적도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삶, 그것이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즐겨 외웠던 시 중에서

저 산 너머 아득한 하늘가에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남을 믿고 나도야 따라갔다가
눈물 글썽글썽 되돌아섰네.

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위대한 삶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저 산 너머 아득한 하늘 가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행복은 저 산 너머 아득한 하늘 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장에 있습니다.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장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가 없지요.
삶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호흡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이 내가 존재하는 내 삶입니다. 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명작 같은 삶도 될 수 있고, 졸작 같은 삶도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은 내 삶을 명작이 되게 하는 요소들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을 떠나서는 그 어디에서도 명작 같은 삶을 가꾸어 갈 수가 없으니까요.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한 것은 바로 그래서이지요.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해 가다 보니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이 저절로 얻어지는 군요. 그것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한 뜸 한 뜸 수를 놓아 가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을 살다 보면 마침내 명작 같은 삶도 완성되어지겠지요. 누가 봐도 감동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삶이 말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말한, 선교사로 인도에 가서 빈민을 위해 한 생을 살다간 동생도 명작 같은 삶을 살다 간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 사람 역시 한 생을 통해 보시바라밀을 닦아 간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