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손길] 덤핑 인생

2007-10-02     양동민

홍수로 얼룩진 여름이 물러나는가 싶더니, 어느덧 짧은 가을이 자취를 감추고, 진눈깨비를 앞세워 겨울이 다가왔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수락산 밑자락의 동막골 입구에서 괴목뿌리공예를 하고 있는 신배언(63세) 씨를 찾았다. 작업장이자 살림집인 허름한 천막 안에는 연탄 난로가 있었으나 조금의 훈기(薰氣)도 느낄 수 없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겨울엔 좀 춥게 살아야 돼요. 그래야 건강에도 좋습니다. 연탄이라도 뗄 수 있으니 얼어죽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너털웃음을 짓는 신배언 씨의 코가 발갛게 얼어 있었다.
신배언 씨가 천막 생활을 하게 된 지도 어언 20년이 훌쩍 지났다. 25년쯤 흘렀을까.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그리고 가장 괴로웠던 시절이 있었다.
서른다섯의 늦은 나이에 만난 아내는 첫눈에 반할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앗아갔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살림을 차리게 되었고, 금슬도 좋아 아들 둘을 낳았다.
평생을 떠돌이 생활만 하다가 가정과 아이가 생기니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중동에 건설 붐이 일었던 시기라, 목돈을 벌기 위해 아내와 두세 살 된 아이들을 남기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2년 6개월 동안 일하면서 정말 돈 한 푼 안 쓰면서 월급을 송두리째 아내에게 송금했다. 웬만한 집 한 채는 너끈히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런 저런 인생 계획을 짜며 한껏 부푼 꿈을 안고 귀국을 하였다. 그런데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일어나 있었다. 아내가 춤바람이 나서 두 아들을 내팽개치고 어떤 사내와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됐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앞이 깜깜했습니다. 협박도 해보고 애원도 해봤지만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깨끗이 포기했지요. 어차피 제 인생이 그런 것이었거든요.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 생활 5년 외엔 좋은 시절이 없었어요.”
신배언 씨는 6·25전쟁 때 부모님을 잃고 고아로 자랐다. 피난 간 부산의 자갈치시장에서 주워온 생선을 먹으며 거지 생활을 비롯해 깡패, 양아치,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안 해본 일 없이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었다고 한다. 무적자(無籍者)로 지내오다 5·16 이후에야 ‘무적자 신고 기간’을 통해 호적을 만들 수 있었다.
“애들 엄마와 그렇게 된 후 술로 세월을 보냈지요. 술을 끔찍하게도 많이 먹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꾀죄죄한 몰골의 애들을 보는데, 나처럼 키워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마음을 잡고 일을 하게 됐습니다.”
신배언 씨는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그림이나 조각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극장 간판 그림도 그려보고 이것저것 만들어보다가, 빈 터에 천막을 치고 괴목의 뿌리로 화분이나 수석, 도자기 등의 받침대를 만드는 괴목뿌리공예를 하게 되었다. 독학으로 배운 기술이지만 워낙 정교하게 잘 만들어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문제였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두 아들이 번갈아가며 사고를 쳤다. 급기야는 작년에 둘째 아들이 노원 역 공중전화 앞에서 건달패들에게 맞아 머리가 깨지고 갈비뼈 두 대가 나가는 부상을 입었다.
“예전에 하도 때리고 들어와서 ‘맞고 들어와라’ 했더니, 거참 죽도록 맞아서 병원에 누워 있더군요. 애들 키우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더라구요. 내가 왜 이 세상에 났는지, 아무래도 내 인생은 덤핑인생, 더부살이 인생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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