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이 만난 사람] 대전 그린타워 신영자 사장

행복한 회향

2007-10-02     사기순

입소문처럼 빠른 게 없다고 했던가. 이 지역에선 그린타워 사장이 좋은 일 많이 한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도 부끄럽다며 극구 만류한다. 하여 여태 어떤 매체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는데, 불광은 부처님 덕분에 그녀(백제불교문화대학 부회장)와 만날 수 있었다.
불연(佛緣)에 감사하며 길을 떠난다. 대전 보문산 공원 입구에 자리한 그린타워로 가는 길목이 아름답다. 단풍이 금세 낙엽되어 흩날리는 모습을 보니 문득 대자연의 이치가 곱씹어진다. 때가 되면 저절로 피고 지듯 사람의 덕화 또한 자연스레 퍼져나가는 것을….

손이 아름다운 사람

그녀는 손수 점심공양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그런데 음식을 내오는 그녀의 옷차림, 아니 손을 보고 더 놀랐다. 기자가 거친 손에 눈길을 보내자, “손을 놀리지 않고 살다보니 이렇게 너덜너덜합니다. 예전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는데, 이 건물과 인연을 맺고부터는 그 동안 편하게 산 것 다 갚게 되었지요.”라며 활짝 웃는다.

신입직원은 주방아줌마인 줄 착각할 정도로 허드렛일을 가리지 않고 하다 보니 그녀의 표현대로 손이 너덜너덜해졌다. 또한 그 큰 건물(연건평 1600평)이 한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구석구석 그녀의 손길이 안 간 곳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따사로운 훈기가 느껴졌나 보다.

어디 그뿐인가. 빼어난 꽃꽂이 솜씨로 그린타워 웨딩홀의 신부 부케를 비롯해서 온갖 꽃장식도 다 그녀 몫이다.(순수 재료비를 뺀 나머지 이익금은 그린타워 내에 있는 법당 불전함에 넣어 이웃돕기에 쓰고 있는데, 그린타워 직원들은 그녀의 손을 ‘은행보다 나은 손’이라고 한다.)
한시도 손을 놀리지 않고, 더욱이 남을 위해 회향하는 데 부지런한 그녀의 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습관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는데, 평생 일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듯 변할 수 있을까.

사람 되어가는 과정

“부처님께서 사람 만들어 주셨지요. 아니 이제 사람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무엇보다 부처님께 인도해준 이 건물과의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서양화가요, 서예가(국전 초대작가)로 대학에서 강의를 해왔던 그녀는 96년 2월 주위 사람의 권유로 이 지역의 명소인 그린타워를 인수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운영할 생각은 아니었고, 위탁 운영시키려 했는데, 일이 묘하게 돌아갔다.
“처음 약속과는 다르더군요. 기존의 직원들이 마치 빚쟁이가 빚 받으러 온 사람 취급을 하지 않나, 폭력배들이 건물을 통째로 삼키려 드는 형국이었어요. 안 되겠다 싶어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요.”
영업권을 되찾는데 5~6개월이 걸렸다. 민속관은 1년 동안 구경도 못했다. 폭력배들의 무고로 강의도 못하게 되었다. 거친 사람들과 상대하다 보니 그녀도 그악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인내심으로 간신히 영업권을 되찾았을 때 그녀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게다가 사업의 사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큰 사업에 뛰어들고 보니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급기야 저혈압이던 사람이 혈압이 40도가 넘어 쓰러지기도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때 직원의 인도로 부처님을 만나고 마음의 평온을 찾았단다.
“평생 받아보기만 했지 남을 위해 한 것이 없었어요. 예술가랍시고 아상도 강했고, 본래 다혈질인데다 냉정하고, 거만이 턱에 찼었지요. 목에 힘주고 살면 불편해요. 예전에는 위선과 가식 속에 헛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부처님 덕분에 사람의 도리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여성운전자가 드물었던 30대에 자가용을 타고 전국을 누비며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그녀의 삶은 멋지고 당당했다. 물론 시련도 없지는 않았다. 30대 초반에 육모상피암을 앓았다. 태반에 포도송이 같은 종양이 생겨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피를 쏟고 쓰러져서 병원에 2년간 입원한 적이 있었지요. 그 때 담당의사 말이 5년 안에 재발하면 죽고 재발하지 않으면 오래 산다고 했는데, 다행히 재발되지 않았지요.”
죽음을 경험했기에 삶에 더욱 큰 용기가 생기는 걸까. 예술에 혼신의 힘을 불어넣었다.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내면 한 구석은 늘 허허로웠다. 그래서 더욱 말이 없었고, 남에게 냉정해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따뜻한 속내와 큰 배포는 시아버지가 먼저 알아보았다. 수십 억 대의 유산을 아들을 제쳐두고, 손자도 낳아주지 않은 그녀에게 남겨준 것이다.(시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할 길이 없어 50대의 나이에도 아이 낳기를 시도했고, 55세에 기적같이 아들 준혁이를 낳았다. 그 또한 부처님 덕이란다.) 하지만 그녀는 늦게나마 부처님 품에 안긴 덕에 사람 사는 도리를 배웠다고 거듭 강조한다.
“원광사에 다닌 인연으로 청공 스님께 충남불교대학사무실을 내드리고, 매주 금요일 강의실도 내드렸는데, 어느 날 스님께서 부처님을 모시는 게 좋겠다는 말씀에 두말도 않고 모시게 되었지요. 부처님 모시고 나서 신기하게도 잡음이 없어졌어요. 사업도 아주 잘 되었지요. 전국적으로 힘겨웠던 IMF 때도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
그린타워 1층, 이 건물이 큰 선박이라면 엔진실에 해당하는 곳에 부처님을 모시고 그녀가 정성껏 그린 후불탱화(유화)를 모셨다. 97년도 5월 17일 점안식을 올림으로써 그녀의 삶은 백팔십도 달라졌다.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무조건 절하고 법요집을 읽었습니다.”
새벽예불을 올리며 108배를 하루도 빼놓지 않았던 그녀는 직원들과도 공덕을 나누기 위해 다기물을 올리게 하고 간혹 법당 청소를 시키기도 한다.
“업장이 두터웠었나 봐요. 부처님 앞에 앉아있으면 이유도 없이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나오는 겁니다. ‘죄를 벗으려면 아직도 멀었구나.’ 하는 자책 속에 ‘젊어서는 인기를 먹으며 살고 나이 먹어서는 작가로서 멋지게 살겠다’던 내 인생관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고, 불제자로서의 삶을 조금씩 알아갔습니다.”
부처님을 모시면서 그녀는 다 버렸다. 인기도 명예도 부귀영화도 다 버렸다. 부처님전에서 하루를 열며 오직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남은 생 베풀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
그런데 세상 욕심 다 버리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다보면 복이 굴러 오는 것인가? 그녀는 부처님을 모시고 나서 상복도 터지고 국전 초대작가도 되었다.

보살의 길 성불의 길

“이 큰 집과 인연이 되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런 것 쓰지 마세요.”라며 못내 부끄러워한다. 그 마음 씀에 기자까지 행복해진다. 그녀는 낯 낼 일 아니라지만 수입의 일정부분을 꼭 떼어서 이웃에 널리 회향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97년도부터 지금까지 연례행사로 6월이면 경로잔치(매년 2,000여 분, 재작년에는 옥천 금산 등 인근지역까지 소문이 나 4,000분이 오셨다.)를 열어드리고, 독거노인께 버젓한 칠순잔치(매년 60여분께 한복을 맞춰드리고 선물도 준비한다)와, 김장(2,3천 포기 담아 3,400분과 어려운 이웃에게 돌린다.)을 해드리고, 초등학생들 급식 지원을 비롯하여 송년의 밤(통.반장을 위시한 지역단체장들, 지역봉사단체 자원봉사자들, 여성단체, 그린타워 협력업체 등 수차례)까지 열어 수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또 명절이면 설탕, 기름 등을 마을사람들에게 골고루 선물하고, 복지관에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부처님께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 요샌 장사가 잘 되는 편은 아니지만, 신비하게도 쓸 돈은 꼭 생기더군요. 공을 찢어보세요. 뭐가 있나? 죽을 때 재산 가져가는 사람 없어요. 베풀 수 있을 때 열심히 베풀어야 합니다. 거저 나가는 건 하나도 없어요. 있다고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마음 먹기에 달려 있지요. 계산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열심히 베풀면 다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행복한 회향으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듯싶은 그녀에게 이즈음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늦둥이 아들이 잘 자라 출가했으면 더욱 좋겠고, 스님들이 마음껏 수행하고 전법하는 도량을 일구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이 참 불자답다.
문득 “아이들이 장난으로 부처님상을 조성하고 그리더라도 마침내 부처가 된다.”는 경전 말씀이 생각난다. 불교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젊은 날, 단지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불상을 많이 그렸다는 그녀, 그 때 이미 보살의 길, 성불의 인연을 쌓고 있었던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