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20.불국토였던 카시미르(kashmir)

신왕오천축국전 별곡 20

2007-10-02     김규현

‘가라국(迦羅國)’은 어디인가?

‘어떤 부름소리’가 있었기에 나그네는 다시 떠나야만 했다. 남천축국의 순례를 마친 혜초는 서천축국을 경유해 북천축국〔蘭達羅國, Jullundur〕에 도착한 뒤 바로 ‘보름 동안’을 걸어 카시미르 고원으로 올라왔다.

혜초는 이 지방이 “길이 험악하여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현재는 국경분쟁지역이라 반군과 정부군들의 빈번한 교전과 테러리스트의 출몰로 인해 수시로 총알이 날아다니는 곳이다. 그래서 외국인의 통행이 쉽지가 않았지만 혜초의 일정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관계로 이 ‘해동의 나그네’도 위험을 무릅쓰고 수많은 검문을 당하는 곤욕과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와하르’라는 길이 2.5km의 긴 터널과 큰 고개를 넘어 힘들게 200km에 달하는 카시미르 대협곡을 거슬러 올라 주도(州都) 스리나가르(Srinagar)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혜초는 이 나라의 이름을 ‘가라국’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이 곳에서 북쪽으로 15일을 가서 산 속으로 가면 가라국에 이른다. 이 나라 역시 북천축국에 속하는데 이 나라가 조금 크다. 왕은 300마리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고, 산중에서 산다. 길이 험악하여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 백성이 매우 많은데 가난한 자가 많고 부자는 적다. 왕과 수령과 여러 부자들은 의복이 중천축국과 다를 것이 없으나 그 밖의 백성들은 모두 담요를 덮어쓰고 몸의 추한 곳을 가렸다. 토지의 산물로는 구리와 철과 모직물과 담요와 소와 양이 있으며, 또 코끼리가 있고 말과 쌀과 포도 등이 조금 난다.

땅이 아주 추워서 앞에 말한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가을에는 서리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며, 여름에는 장마비가 많이 내려 온갖 풀들이 푸른 잎으로 자라다가 가을에 잎이 시들어서 겨울이 되면 모두 말라 버린다. (운운) 왕과 수령은 밖에 나갈 때 코끼리를 타고 작은 관리들은 말을 타며 백성들은 모두 걸어다닌다. 나라 안에는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모두 행해지고 있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은 삼보를 대단히 공경한다.”

혜초의 가라국에 대한 기술은 다음 회의 ‘너와지붕 조(條)’에서 증명되듯이 매우 상세하다. 이는 2년간을 대승경전을 연구하고자 스리나가르에서 보낸 현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는 이 나라를 ‘가엽미라국(迦葉彌羅國)’이라 부르며 역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카시미르 국은 주위 7천여 리이다. 사방에 산을 등지고 있다. 그 산은 매우 험하며 들어갈 길이 있다 해도 아주 좁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웃 나라도 이 나라를 정복하지 못했다. 대도성은 서쪽으로 대하를 바라보고 있으며 남북은 12리, 동서가 4리이다. 토질이 농업에 알맞고 꽃이나 과일이 많다. 기후는 아주 춥고 눈이 많으며 바람은 적다. 털옷과 무명을 입는다. 사교와 정법을 모두 믿고 있다. 가람은 1백여 곳 승도는 5천여 명이다.”

차창 밖으로 본, 이틀간의 카시미르 지방의 인상은 한 마디로 ‘인도 같지 않다’였다. 그것은 고생 끝에 도착한 주도 스리나가르에서 더욱 확실해졌다. 이 지방은 현재는 주민의 90% 이상이 모슬렘이다. 스스로를 ‘카시미르’라고 지칭하는 이들은 자주성이 강해서, 여자들도 이슬람 풍속대로 ‘부로커’라는, 눈만 내놓고 전신을 가린 옷을 입고 있으며, 사원들도 온통 뾰족한 모스크뿐이어서 여기가 인도라는 사실이 선뜻 수긍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분명 이곳은 ‘잠무 - 카시미르’라는 이름의 주(州)로서 인도에 속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회교색이 훨씬 강하기에 서쪽의 이웃인 파키스탄 편을 드는 주민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도 분리독립운동이 가끔 일어나고 있고 히말라야와 이웃한 중국과도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 마디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인 셈이다.

불교왕조 귀상(貴相) 왕국

우리에겐 ‘카시미르 양모(羊毛)’의 원산지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 지방은 한 때는 찬란한 불국토로서 불교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던 곳이었다. 바로 불교왕국 쿠샨 왕조의 중심지로서 불경의 ‘제4차 결집(結集)’이 열렸던 곳이며, 또 대승불교의 쟁쟁한 논사들이 활약했던 명실상부한 인도대륙의 불교학의 중심지였던 곳이었다.

카시미르가 인도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B.C 2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 시대였다. 인도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대륙을 무력 통일하여 대제국을 세웠던 이 왕은 말년에 불교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불교적 이상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면서 카시미르 곳곳에 사원과 대탑과 석주를 세웠다.

이는 7세기, 현장이 여기에 머물렀던 때에도 목격되고 있는데, “4개의 대탑이 있는데 각기 여래의 사리가 한 되 남짓 들어 있으며 모두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아쇼카 시대의 이 땅은 불국토였다. 뒤이어 카니쉬카(Kanishika, A.D 78∼81) 왕 시대를 거치며 불교는 더욱 번성하였는데, 이 쿠샨(Kushan)은 중국 사서에 ‘귀상(貴相)’이라고 나타나는 왕국으로서 그 영토가 인도 서북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와 현 중국령 신강(新疆) 깊숙한 곳까지 미쳤었기에 ‘동서교류사’ 연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왕조이다. 이런 면에서, 카시미르의 불교는 ‘대승불교의 완성지’라는 자체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중국, 티벳, 중앙아시아의 길목에 위치한 지형적인 요인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북방불교로의 전파의 거점 노릇을 하였다. 이는 불교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카시미르에 대승불교가 번창하던 시기에 우리의 혜초나 현장은 이 곳을 지나가며 많은 가람·탑·사원·고승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지만, 역사는 흐르게 마련이던지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이어지며 만개했던 이 지방의 불교는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이슬람 세력에 편입되고 뒤이어 14세기에 무갈 왕조 역대 왕들의 여름 휴양지로서 개발되어 내려왔다.

근대에 이르러 영국의 식민시대 말기에 일시 독립국이 되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카시미르는 반쪽으로 나눠지며 반은 인도에, 반은 파키스탄에 소속되는 분단의 운명을 맞게 되어 현재 인도에 속해 있는 이질적인 주(州)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막막했다. 막상 스리나가르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과거 찬란했던 불국토가 대개 그러하듯이 카시미르에서 ‘불(佛)’자가 들어간 자료나 유적지 안내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혹시나 하여 찾아간 박물관은 총을 든 군인들이 가득하였는데 알라신에게 기도 드리는 날이라 평일인데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겨우 연구원을 불러내 어렵게 B.C 2세기 아쇼카 때의 구도시였던 판드레탄(Pandretan)이라는 곳을 알아냈지만 역시 군인들의 주둔지여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뒤에 들으니 이 곳도 불교사원 위에 힌두사원이 다시 건립되었기에 불교 유적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나마 남아 있던 불보살의 석상들을 병사들의 사격연습용 표적이 되었기에 그나마 모두 부서졌다는 것이었다.

막막함에 심한 허탈감이 몰려와 무거운 다리를 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날 저녁 ‘해동의 나그네’에게, 아마도 불보살의 가피력 같은 행운이 찾아들었다. 물의 도시 스리나가르의 여행자가 대개 그러하듯이 필자도 아름다운 ‘달 호수’에 떠 있는 호텔인 허름한 ‘보트하우스(Boat House)’에 여장을 풀었는데, 저녁 후에 보트의 주인이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부디즘’이 어쩌고 저쩌고 하던 끝에 주인이 갑자기 안으로 들어가더니 궤짝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왔다. 무심코 그 낡은 책을 받아든 필자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겠지만, 바로 정신을 차려 눈빛을 숨기고 몇 장을 넘겨 보는 둥 마는 둥하며 “그냥 흔한 책입니다.”라며 도로 주인한테 넘겨주었다.

그 고서는 바로 주인의 부친 대에 가끔 그 호텔에 묵고 갔던 프랑스의 불교학자 쟝(Jean Naudou)이 그 인연으로 친필 사인하여 주인의 부친에게 준 『카시미르의 불교(Buddhists of Kashmir)』라는 귀중한 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무리 뒤져도 ‘불(佛)’ 자 하나 찾을 수 없어서 난감해하던 내게는 그것은 행운 정도가 아니라 관음보살의 친견 같은 기연(奇緣)이었다. 그 날 밤 ‘해동의 나그네’는 일렁거리는 침대에 누워 다음날 그 책을 공짜로 넘겨받을 어떤 ‘작전계획’을 짜며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