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스님] 춘천 봉덕사 혜욱 스님

따뜻한 보시

2007-10-02     남동화

서울에서 구리, 강촌, 북한강 줄기를 따라 의암호에서 화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으로 쑥 들어간 후미진 골에 전형적인 농촌마을 덕두원이 나온다. 올망졸망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 양옆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는 마을, 왼쪽 실개천을 따라가다가 작은 다리(봉덕교)를 건너 오솔길로 올라가면 봉곳한 산 밑에 따뜻하고 편안한 절 봉덕사(奉德寺, 1971년 覺林 스님 창건)가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예쁜 혜욱(慧煜,45세) 스님을 만날 수 있다.
혜욱 스님 앞에는 늘 법호처럼‘예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닌 게 아니라 마흔 중반의 나이임에도 스님은 참 예쁘다. 군더더기 없이 맑고 투명한 모습도 그러려니와 누구에게나 항상 따뜻한 배려와 손길, 그리고 예쁜 것을 유난히도 좋아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받는 절에서 주는 절로
스님은 지난 10월 22일에는 법당 앞에 은사스님의 뜻에 따라 두 기의 석등을 조성해서 부처님 전에 봉헌했다. 우리의 멋과 맛을 아는 조각가 오채현 선생의 손으로 빚어진 석등에 새겨진 팔부성중의 모습은 참 예쁜 부처님의 모습들이었다.
석등이 모셔지는 그 날 회향법회와 감사의 뜻으로 펼쳐진 봉덕사 작은 산사음악회(진명 스님 사회와 시 낭송회, 심진 스님, 김무한의 노래와 국악포뮤지션 이성원 출연)도 조촐하고 예쁘게 차려진 음악회였다.
스님은 작은 초대장, 발원문, 책자 하나도 그냥 만드는 법이 없다. 늘 받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기분좋게 만들어 기꺼이 대접한다.
1년에 한 번 신도님들에게 드리는 달력도 그 해 달력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손수 골라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 마치 예쁜 새해 연하장을 보내는 마음으로 드린다.
동짓날 한 가마 반이나 되는 팥죽을 쑤어서 절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공양을 하고 페트팩에 담은 팥죽과 새해 달력을 일일이 예쁜 종이백에 담아 전해주는 것도 봉덕사 연례 행사 중의 하나다. (1993년부터 춘천시로부터 위탁을 받아 운영하고 있는 연꽃어린이집 160명 원아들을 위해서도 매년 똑같이 팥죽과 달력을 준비해 나누어주고 있다.)
지난 11월 5일 대학입시기도와 초하루법회가 있던 날 역시 스님은 입시기도를 하신 부모님들에게 일일이 포장한 찰밥과 찰떡, 그리고 도반스님이 꿰어서 보내준 단주를 함께 나누어주셨다 받는 절에서 주는 절! 덕을 베푸는 절 봉덕사에는 오시는 분들을 위한 배려와 사랑이 여기저기 묻어나 있다. 법당 맨 뒤에는 다리가 불편해서 오래 못 앉아 계시는 분들을 위해 긴 의자 두 개를 준비해 두었고,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진 공간으로 지어진 요사채 한 켠에는 신도들을 위한 커다란 찻상과 함께 다구와 차가 놓여 있다.
무엇보다 봉덕사의 공양은 맛있기로 유명하다. 농촌마을에서 나는 흔한 먹거리들로 만들어진 음식들이지만 꼭 밥 한 그릇을 더 비우게 된다. 특히 요즈음 먹는 봉덕사의 청국장 맛은 입에서 입으로 그 소문이 전해진 지 오래다. 원주이신 구혜(求慧) 스님의 맛깔스러운 솜씨와 정성이 깃든 데다 따뜻한 마음까지 보태진 까닭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덕두원 사람들과 봉덕사
가을걷이가 되면 윗마을 아랫마을 100여 호의 마을사람들은 콩이며 팥이며 무우, 배추, 고추, 산더덕 등 좋은 농작물은 봉덕사로 가져온다. 절에서 우선 필요한 만큼 구입하시게 하고 나머지를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 지 오래다.
커다란 장작불 가마솥에 쪄서 발효시킨 봉덕사 청국장이 유명해지고부터는 마을에서 나는 콩은 거의 전량이 봉덕사에서 소모가 되고 있다. 마을에 그 해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이 있으면 뉘 집 아들딸이 대학에 들어가노라고 아주 당연스럽게 연락이 온다. 봉덕사에서 오래 전부터 장학금을 주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을사람들과 봉덕사는 풋풋한 정이 오간다. 마을에 함박눈이라도 내리고 나면 이장님이 방송을 한다.
“마을 주민 여러분! 오늘 눈이 많이 왔습니다. 모두들 봉덕사 앞으로 눈 쓸러 오세요.”
방송을 듣고 나온 15∼6분의 동리분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봉덕사 어귀부터 앞마당까지 말끔하게 눈을 쓸고, 스님은 따뜻한 공양과 잣술이며 모과주와 차를 준비했다가 대접한다. 모두들 선량하고 정겨운 이웃들! 겨울이면 할 일이 없어진 마을 사람들을 위해 찜질방을 만들어드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스님은 해본다.

아! 그래요? 그랬군요. 그렇게 하세요
은사스님을 시봉하는 일, 주지로서의 소임, 그리고 춘천 시내에 있는 연꽃 어린이집 원장의 소임…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자리에 편히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스님을 찾는 사람과 전화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그러나 스님은 순간 순간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늘 밝고 긍정적인 말로 그 사람을 위한다. 그래서인지 스님 옆에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며 힘이 난다. 바쁘고 힘들다 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그것이 항상 가능한 것일까.
8∼9년 전만 하더라도 스님 또한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는 헐떡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고, 위장장애가 심한데다가 성격 또한 깐깐했다. 무언가 일을 벌이지 않으면 불안해서인지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일 이외에도 끊임없이 일들을 벌여 일에 휩싸였다.
그러면서도 언제 이곳에서 벗어나 선방에 가보나 하는 분별심으로 몸과 마음의 병은 더해갔고, 결제철이 되면 마음이 두런두런거려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의 전환이 왔다. 늘 부처님 전에 독송하던 금강경, 관세음보살 보문품, 그리고 보현행원품의 말씀이 어느 날 문득 그대로 귀에 들어왔다. 특히 보현행원품의 ‘수순분’이 가슴속에 확 들어왔다.

수순중생하리
“제불공양(諸佛供養)이 중생공양(衆生供養)이요, 중생공양(衆生供養)이 제불공양(諸佛供養)이라. 능히 중생을 수순(隨順)함이 곧 모든 부처님을 수순하며 공양함이 되고 만약 중생을 존중히 받들어 섬기면 곧 여래를 존중히 받들어 섬김이 되며 만약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심이 나게 하면 곧 일체 여래로 하여금 환희하시게 함이니라.”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리키고 어두운 밤중에는 광명이 되고 가난한 이에게는 보배를 얻게 한다.”
왜 부처님께서는 50도가 넘는 더위에 그 열악한 대지를 맨발로 걸으시며 전법을 하셨는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셨을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나이 35세! 그렇게 발원하던 끝에 35살 되던 해의 인도성지순례! 부처님의 길을 따라 걸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부처님께서 마치 어제 걸으시고 앉으셨던 것 같은 그 길을 걸으며 감동에 복받쳐 울었고, 환경이 너무나 척박하고 열악해서 가슴이 메었다. 이에 비하면 나는 갖춰진 조건 속에서 얼마나 제대로 살아왔던가. 부다가야에서는 함께 간 일행 모두가 목놓아 울었다. 그래, 도대체 출가 수행자가 되어 무엇을 나누며 무엇을 분별하고 차별하며 달리 찾아왔던가. 중생을 받들고 수순하며 공양한다는 것은 실로는 자기 공양이며 자기 성숙이며 자기 성장이 아닌가. 일체 차별이 없는 가운데 수순하는 삶이 수행자의 삶이 아닌가.
“선방 못 간 것도 무엇 무엇 누구 누구 때문이요, 기도를 해야 하는데 누가 와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밖으로 돌리며 탓해왔던가. 그러나 달리 어디 다른 곳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집착하며 나누고 분별하는 것은 출가수행자답지 못한 일이다.
‘그래! 모두 내려놓고 수순하자!’ 생각 하나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 일체를 내려놓고 수순하기로 마음먹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내자 먼저 자신이 평화롭고 밝아졌다. 그리고 주위가 밝고 편안해지면서 건강도 회복되었다. 그러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었고, 그 따뜻한 에너지는 그대로 되돌려졌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올해 일흔일곱이신 은사 각림 스님은 혜욱 스님과는 38년간을 함께 살아오셨다. 스님께서는 당신의 노스님과 노노스님이 그래왔던 것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77세에 가시겠노라고 원을 세워오셨고, 윤회를 하는데 굳이 병들어 힘든 몸을 이끌고 사는 것이 힘에 겨우셨던지 지난 가을에는 가실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두셨다.
스님께서 정하신 그 날 그 시간, 축시(새벽 1시∼3시)가 되자 절에 살고 있는 개 ‘선재’가 마치 사람을 물어뜯듯이 울부짖어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밤새 잠을 주무시지 않고 계시던 은사스님은 백짓장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계셨다.
마침 절에 와 있던 혜욱 스님의 아홉 명 도반스님들과 혜욱 스님은 스님께 마음을 돌리실 것을 간곡히 간청드렸다. 묵묵부답하신 지 여러 시간, 스님은 고비를 넘기시고 마침내 물을 드시고 생각을 내려놓으셨다.
그러자 신기한 것은 그 후 혈압과 당뇨의 수치가 내려가고 뇌경색이 회복되면서 말도 또박또박해지면서 오히려 건강이 회복되시는 것이 아닌가.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 없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생사가 마음대로 안 되니 얼마나 당신의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스님께 오늘 다시 태어나신 것이라고 깊은 위로를 해드렸어요. 그리고 굳이 그렇게 힘겹게 가시려고 하시지 마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말씀드렸지요.
일곱 살에 절에 들어와서 스님의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으로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 자리가 바뀌어 은혜를 갚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스님이 항상 제 곁에 큰 울타리처럼 계셨기에 지금까지 수행자로 남아있을 수 있었지요. 모두들 어른스님 잘 모신다고들 하지만 사미율의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미흡함을 많이 느낍니다.”
노스님이 계시고 상좌스님이 계시고, 또 그 상좌의 상좌스님과 객스님 한두 분쯤은 항상 머무는 편안한 절 봉덕사.
연로하신 은사 스님을 모시는 일이나, 온종일 스님만 따라다니는 여섯살박이 꼬마 세미와도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 많은 일들을 아무 걸림 없이 척척해가시는 순수 수순보살 혜욱 스님이 계시기에 항상 가보고 싶고 따뜻한 그리움이 남는 곳이다혜욱 스님은 1964년 충남 장곡사에서 각림 스님을 은사로 출가, 동학사 강원 대교과와 중앙승가대학을 졸업. 은사스님을 모시고 춘천 봉덕사 산중 일을 보면서 1993년부터 춘천시로부터 연꽃어린이집을 위탁받아 어린 새싹들의 성장을 도우며, 경실련활동과 교도소 교화활동, 그리고 ‘우리 숲 가꾸기’ 등 지역사회 복지와 문화, 환경운동 등에 동참하며 수순중생을 화두삼아 정진하고 계시다. 특히 음악과 그림, 사람과 시를 좋아하는 스님은 요즈음은 숲 속 생활이야기를 담은 『소로의 일기』를 읽으며 숲과 자연에 감사하며 인연되는 이들에게 행복을 나누고 계시다.

혜욱 스님은 1964년 장곡사에서 각림 스님을 은사로 출가, 동학사 강원 대교과와 중앙승가대학을 졸업. 은사스님을 모시고 춘천 봉덕사 산중 일을 보면서 1993년부터 춘천시로부터 연꽃어린이집을 위탁받아 어린 새싹들의 성장을 도우며, 경실련활동과 교도소 교화활동, 그리고 '우리 숲 가꾸기' 등 지역사회 복지와 문화, 환경운동 등에 동참하며 수순중생을 화두삼아 정진하고 계시다. 특히 음악과 그림, 사람과 시를 좋아하는 스님은 요즘음은 숲 속 생활이야기를 담은 '소로의 일기'를 읽으며 숲과 자연에 감사하며 인연되는 이들에게 행복을 나누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