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성품을 깨달아 환히 통달하면 곧 도를 실천하는 것이로다

|고승법석 35|/경봉(鏡峰)스님 (1892∼1982)

2007-10-02     관리자


조선 불교는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중생들이 마음을 기댈 큰 봉우리들을 일구어냈다. 참혹하다고 할 일제시대를 지나면서도 앞날을 준비하며 역량을 키워나갔다. 조선 불교의 역량은 근대와 현대 고승들로 하여 사바 세계의 고통을 달래주도록 했으니, 경봉 스님은 우뚝 솟은 봉우리 가운데서도 우뚝 솟아 지친 중생의 마음에 큰 빛줄기로 자리 잡았다.
경봉 스님은 1892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용국(金鏞國)이며, 경봉은 호이고 시호는 원광(圓光)이다. 어려서부터 하늘이 내린 재목으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는데, 7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익혔다. 1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907년 양산 통도사 성해(聖海) 스님 밑에서 출가 득도하였다. 1908년 통도사에서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인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서 수학하였으며, 9월에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 스님에게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으며, 이후 강원에서 경전 연구에 정진하였다.
어느 날 경전을 보다가 “하루 종일 남의 보물을 세어 본다고 해도 단 반푼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을 보고 문득 깨우친 바 있어 내원사(內院寺)를 찾아 혜월(慧月) 스님에게서 법을 구하는 등, 해인사 퇴설당, 금강산 마하연과 석왕사 등 전국의 선원을 다니면서 수행하였다. 이후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을 장좌불와(長坐不臥)하였다. 스님은 동시에 화엄산림법회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정진하였고,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한다. 1930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의 원장으로 취임한 뒤, 50여 년을 지냈다. 1935년 통도사주지, 1941년 서울 안국동에 있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 이사장, 1949년 4월에는 다시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전국의 선승들을 지도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었다. 1953년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스님은 속랍 90이 넘은 뒤에도 사자좌에 오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통도사가 오늘날의 웅장한 대 가람을 이루기까지 쉼 없이 불사를 봉행하였다. 1982년 7월 17일에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법어집인 『법해(法海)』·『속법해 (續法海)』와 시조집인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인 『선문묵일점(禪門墨 一點)』, 서간집인 『화중연화소식(火中蓮花消息)』 등이 있다.
이번 호에서는 스님께서 생전에 설하신 반야심경 주해를 소개한다. 스님의 반야심경 주해는 한 폭의 선시(禪詩)가 흐르는 웅장한 계곡 같은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구조는 반야심경의 원문을 설하고, 원문에 대한 주해, 게송으로 되어있다. 지면 사정 상 게송 부분만을 모으고, 그 게송이 반야심경의 어떤 구절에 관한 것인가만을 간추려 소개하도록 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 주해(註解)

반야심경 주해를 시작하며
마하반야는 취하지도 못하는 것이며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그만 두고 오늘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화창하며 산은 층층하고 물은 잔잔한데 산 꽃은 웃고 들새는 노래하니 시자야, 벽계수로 차 한잔 달여 오너라.
지금의 이 일을 어찌 알겠는가.
청산에 흐르는 푸른 물의 그 깊고 깊음 마저 등에 지고 가는도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마음을 깨달아도 깨달은 마음이 없고 경계를 능히 꿰뚫어 통달하나 통달한 경계가 본래 없는 것이어서, 마음과 경계를 모두 여의고 깨닫되, 깨닫지 않은 것이 없도다.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으므로 자재(自在)라 한다. 보(菩)는 능히 꿰뚫어 통달함을 뜻하는 것이요, 살(薩)은 견(見)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법을 통달하여 보되, 본래 텅 비고 고요하므로 이름하여 보살(菩薩)이라 하는도다.
이 모든 것을 알겠는가.
눈으로 (본래 내 안에) 흐르는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아는 법이로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보살(菩薩)이 자기의 마음 근원이 본래 청정한 줄 살펴 아니 앞의 다섯 가지 법이 생긴 곳이 없고, 본래 비고 고요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가히 얻을 것이 없도다. 그러하므로 오온(五蘊)을 모두 텅 빈 것으로 비추어 보고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는도다.
본래 모습 비어 있음만을 살피어 보려하는가
문득 머리를 들고 보니 푸른 학이 산성으로 날아가는도다.

색불이공(色不異空)
마음에 부질없이 집착하여 다시 마음 밖에 색(色)을 보되, 색이 마음으로 인해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또 다시 마음 근본을 찬찬히 살피고서야 색이 본래 없는 것이구나 한다. 그러니 무엇을 말미암아 경계와 색을 세우겠는가. 그러므로 색이 공(空)과 다르지 않다.
봄비는 복숭아꽃 불그스름한 꽃술을 적시고
봄바람은 짙어 가는 푸른 실버들 가지를 가볍게 흔드는도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중생의 마음이 일어날 때에 실로 일어난 곳이 없으니 곧 색이요, (그 자리가) 곧 공이로다 … 몸과 마음, 모든 만법이 전부 이 같은 이치에 있으므로 공이 곧 색이로다… 색과 공, 여기에 모든 법을 포함하여 홀연히 한 몸을 이루었는데 참으로 둘이 아닌 법문이로다. 진여(眞如)의 오묘한 이치에 어찌 색과 공의 두 이치를 따로 두리오.
알겠는가. 공도 없음이요, 색도 없음이니
포대 화상(布袋和尙)이 한산 습득(寒山 拾得)을 만난 것과 같도다.
이는 어떠한 경지인가.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마음이 본래 맑고 텅 비어 굳이 닦아 증득할 필요가 없다고 고집하는 것을 이름하여 고제라 하고, 성품이 모든 것을 포함하였으니 어찌 찾고 구할 것이 있겠는가 하는 것을 집제라 하고, 망상이 일어나지 않아 본래 스스로 항상 고요하다 하는 것을 멸제라 하고, 적정이 둘이 아니고 삿된 것과 올바름이 다르지 않다고 고집하는 것을 이름하여 도제라 한다… 만일 무심을 능히 꿰뚫어 보아 남김없이 안다면 어찌 굳이 사제가 있으리오. 그러므로 고·집·멸·도 또한 없도다.
대나무 무성해도 흐르는 물은 걸림이 없고
산이 제 아무리 높아도 하늘을 나는 구름은 방해받지 않는도다.

즉설주왈(卽說呪曰)
말을 해서 본래 성품을 나타내므로 이를 말하는도다
비가 지나간 뒤 이끼는 푸르게 피어나고
봄이 오니 풀들은 절로 나는도다.

아제아제(揭諦揭諦)
어지러운 망상을 지혜로 여의어 없애므로 아제라 하고, 거듭 아제라 한 것은 마음이 공(空)함을 능히 꿰뚫어 보아 환하게 알고, 몸이 공(空)함을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아제아제라 하였다.
수고로이 돌 거울을 매달아 달지 아니하여도 하늘이 밝아 오니 스스로 환해 지는 도다.

바라아제(波羅揭諦)
마음이 이미 청정하니 어찌 망상을 따로 없앨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라아제라 한다.
달이 산마루에 솟아오르니
아마도 별산(別山)을 지나왔을 것이로다.

바라승아제(波羅僧揭諦)
청정한 것이 혼탁한 경계를 대함을 이름한 것이로다. 탁한 경계란 본래 없는 것이니 청정하다는 것도 언급할 필요가 없으므로 바라승아제라 하는도다.
진흙 소가 다투며 바다로 들어갔는데
아직까지 자취도 보이지 않는도다

보리사바하(菩提娑婆詞)
보리(菩提)는 도요, 사바하(娑婆詞)는 수행이다. 본래 성품을 깨달아 환하게 통달하면 곧 도를 실천하는 것이로다.
구름은 산봉우리에서 개이니 천 길이나 푸르고
물은 강남으로 흐르니 만리나 깊도다.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