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다하지 않는 도적(道跡)은 밤에 쏜 화살과 진배없다

함께사는 세상 이렇게 일굽시다

2007-10-02     관리자

현대를 일러 ‘윤리의 시대’, ‘윤리가 제일 철학인 시대’라고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죄아닌 죄’ 하나만으로 고향도, 모국어도 빼앗기고 인·륜(人倫)의 땅 유럽에서마저 부초처럼 떠도는 신세로 살아야 했던 레비나스(E. L vinas)라는 프랑스의 철학자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가 말하는 윤리란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내’가 먼저 ‘나의 할 바’를 다하라.”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만일 히틀러가 스스로 자행한 일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라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그토록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 인륜적 윤리, 도덕이 혼자만의 자유나 종족적 권위보다, 평화가 전쟁보다, 금강의 지혜가 갈꽃과 같은 알음알이보다 선양(宣揚)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어떤 일이건, 만일 그 결과가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타인에게 미루지 않는 것, 바로 ‘내’가 그 책임을 고과(苦果)로 달게 짊어지는 것, 정말이지 오늘날과 같이 윤리(도덕)가 땅에서 나뒹구는 악도(惡道)의 시대에 이보다 더 절박한 충고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가만히 살펴 보라.
최근 열린 ‘지구정상회의’에서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의 환경까지 자신들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며 발뺌을 하고 있지 않는가.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눈먼 이 땅의 정치가들은 국민을 완전 봉으로 안 지 이미 오래다.
기업의 사장님들이라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직원들을 일개미 정도로 생각하고 산술적 이익만을 내라고 독촉한다.
이렇듯 모두가 이기적으로 자기 이익만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에만 집착한 결과 일찍이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서로 존중하지 않으며, 좋은 길로 상대를 인도하지 않으며, 서로 겸손하지 않으며, 극단적으로는 상호간에 원수가 되어 있다.”(『華嚴經』) 한마디로, 책임 불감증이 부른 화(禍)다. 이렇듯 세인들은 더불어 살기보다 차별심을 일으켜 무명(無明) 가운데 악(惡)을 짓기 일쑤며,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소임,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게 이 즈음 일반적 세태다.
실로 오늘날 무책임과 무관심, 변명과 비겁의 극치가 난무한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들 잘한 일은 다 내 몫이요 못한 일은 다 남의 탓이란다.
생각해 보시라. 이럴 경우 아(我) 아닌 타자와의 진정한 의미의 대화, ‘내’ 가진 것을 ‘남’과 나눠 가짐, 용서와 화해, 배려를 운위한다는 것은 이미 어불성설(語不成說)에 가깝다. 아니, 그러하기에 역설적으로, 함께 더불어 사는, 함께 살아야 할 미래 세상을 위해 ‘책임의 윤리’가 강조되어 마땅한 것이리라.
돈이면 전부라는 무물불성(無物不成)이 지배적인 시대일수록, 개인의 욕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는 소유, 낭비가 중심이 된 시대일수록, 이기심이 가족간의 온화한 대화를 가로막는 시대일수록, 토담 아래 코스모스, 봉숭아를 심는 대신 그 곳에 유리조각을 박고 철조망을 쳐 타인들의 접근을 봉쇄하는 적대적 배타심이 이타심(利他心)을 능가하는 시대일수록, 필요하고 급박한 일이 바로 ‘나의 책임’을 알고 이를 곧장 실천에 옮기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나보다 타인을 먼저 고려하고 생각하는 마음, 누구라 그 뜻을 모를까만 어려운 것은 역시 이의 실천이다. 그래서, 여력이 허락한 대로, 최소한 내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불도자라면, 이타심(利他心)과 보리심(菩提心)을 크게 발원하고 이를 실천해야 하는 것을 이제 소명이자 책무로 알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가꾸어 가는데 ‘화려한’ 이론들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조그마한 실천이라도 현장에서 내가 직접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보다 먼저, 바로 내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은 독재적(獨在的) 단독자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인, 대승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인간이 사회인이어야 하는 이유는 물고기가 물이 있어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를 떠난 개인이란 이미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공동체 속의 사회인이 된다는 것이다. 사회인으로서 인간만이 현대의 이기적·자폐적·병적 오만과 미혹에서 벗어나 공생·공존·공영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공유할 자격이 있다.
헌데, 문제는 늘 그랬듯 세상이 이치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한경쟁이란 요상한 외제 ‘룰’이 세상 인심(humanity)을 흉흉하게 만들고 있는 듯하다. 화탕지옥(火湯地獄)을 방불케 하는 껍데기 세상, 경을 칠 일이다. 다행스러운 일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헛돌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로 천만다행인 것은 적잖은 사람들이 그래도 이를 비판할 눈쯤은 가지고 산다는 점이다. 무책임한 사람이 절반 이상이지만 목숨을 걸고 진리를 대변하고 수호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엔 늘 존재했고, 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들 진리의 수호자들로 인해 세상이 무명의 수렁에서 더 이상 허덕이지 않고 진여(眞如)의 순리(順理)를 따를 수 있게 한다.
그렇다. 세상은 진리가 모델이다. 또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진리라, 법(Dharma)을 법이라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진리는 일리(一理)의 법이며, 잘난 몇몇 사람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사는 모든 사회인으로서 인간의 본형(本形)을 제시하고 밝히는 등불이다.
사는가, 그대는 이대로? 아니면 그래야 한다는 생각뿐인가?
필자는, 대답하기가 머뭇거려진다. 남을 헤아린다는 것, 내가 해야 할 바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낯설기만한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를 끌어와 희떱게 지껄여보았지만, 추상적인 생각이란 현실 속에서 쉬 무너지는 수도 있음을 경험을 통해 필자는 알고 있다.
뻘 바닥을 기는 자세로 나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나의 눈과 마음을 낮추지 않는다면, 위의 모든 이야기들이 헛수고일 수 있다.
‘함께 사는 세상’이란 란(欄)을 미욱하게나마 메우면서 새삼 나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었다. 회언(悔言)이 훈계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박치완 님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및 철학과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의 부르곤뉴대학(Univ. de Bourgogne)에서 앙리 베르그송의 방법(직관)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전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몸』(공저)이 있고, 앙리 베르그송의 「있는 바 그대로의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시도」, 「프랑스에 수용된 (反)-현상학」, 「프랑스철학의 주인공, 유대인」 등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