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의숙공주여 이 공양 함께 받으소서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서울 백련산(白蓮山) 백련사(白蓮寺)

2007-10-02     관리자

대간의 산들은 크고 높다. 그 깊고 높음이 헤아리는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그런데 정맥의 높은 산들은 우리네가 발붙이고 사는 들판 뒤로, 땀흘린 몸을 씻는 개울 앞까지 몸을 낮추어 내려와서는 듬직하게, 때로는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는 산이 된다. 거추장스런 이름 따위는 내던지고 어느새 뒷산이거나 앞산으로 친구처럼 다가온다.
도봉산, 삼각산(북한산), 인왕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등등. 모두 백두산만큼 높았을 한북정맥이 부려놓은 서울의 정다운 산들이다.
이렇듯 서울의 곳곳에 산과 내를 떨구는 한북정맥은 서쪽으로 세검정, 홍제천을 이루고 모래내로 스며들어 한강에 몸을 더하는 삼각산의 물길과 함께 그 산줄기 하나를 삼각산 비봉에서 떨어뜨려 녹번동의 큰 길을 넘어 백련산을 이루고 곧 성산에 이르러 한강을 대하며 그 마지막 모습을 보인다.
서울 도심에서 통일로를 향해 인왕산(仁旺山 338.2m) 아래 무악재를 넘자면 왼편으로 우뚝한 바위봉우리가 뒤편으로 봉원사를 안고 있는 안산(鞍山:毋岳, 金華山 295.9m)이고 그 너머로 건너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줄기가 바로 백련사가 앉아 있는 백련산(白蓮山 215.5m)이다.
언제부터 그 이름으로 불렸는지 모르지만 “절이 있고 난 후 산은 그 이름을 얻는다.”고 하신 옛 스님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보면 백련산은 곧 백련사에 의해서 이름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산너머 응암동에서는 옛날 왕족들이 매를 날리며 사냥을 즐기던 매바위가 있는 곳이라 하여 그 봉우리 하나를 응봉(鷹峰)이라 하였다고 하고 최근에 조성된 일주문에는 ‘삼각산 정토백련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에 백련산은 그 이름을 얻기 전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백련사(02-302-0288)는 신라 경덕왕 6년(747)에 진표율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이름은 정토사였다. 그 후의 역사는 알 길이 없고, 조선 정종 원년(1399)에 스승인 무학왕사(無學王師)의 지시로 함허화상(涵虛和尙)이 중건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이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난 뒤에 요양차 정토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보이고, 다른 기록에는 태종 또한 태종 13년(1413)에 요양차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 고려말 조선초 정토사의 당당했을 위세가 짐작된다.
이후 세조의 하나뿐인 딸 의숙 공주와 관련된 이야기가 백련사의 이름과 관련해 전해오고 있어 흥미로움을 더한다.
전설에 의하면 어느 여름날 경복궁 서쪽에 있던 ‘서방정토 정토사’ 연못에서 갑자기 하얀 연꽃이 피어올라 그 이름을 백련사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 의숙 공주의 묘가 백련산 밑에 있었으므로 세조가 이 절을 의숙 공주(懿淑公主)와 부마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의 원당으로 정하고 백련사(白蓮寺)라 개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조의 생몰연대가 의숙 공주의 그것보다 앞서므로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의숙 공주가 20세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비통함을 달랠 길 없어 여기저기 절을 찾아다니다가 어느날 백련사에 오게 되었다. 덕종(1438~1457)과 예종(1450∼1469)이 불과 20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은 것을 보면서 일찍이 어린 단종을 죽인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참회하고 있던 그였다. 아버지 세조의 건강을 위해 상원사에 문수동자상을 조성(1466년)하고 말년(1575년)까지 회암사의 중수에 힘을 쏟는 등 부처님 전에 지성으로 참회한 공주. 하지만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퍼부었던 단종의 어머니 현덕 왕후의 원한 또한 깊고 깊은 것이었다. 공주는 자신의 목숨은 구할 수 있었으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절을 찾아 상심과 참회의 나날을 보내던 공주는 정토사 들머리에서 가시나무보다 더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해동목(海東木, 음나무 또는 엄나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나머지 인생의 참뜻을 깨닫고 이 절을 원당으로 삼고 재가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절 이름도 백련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의 엄나무는 지금 수령 500년의 거목이 되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경기도 의왕시 초평동 아랫말이라는 곳에 하성부원군 정현조의 묘가 있었고 큰 음나무가 있어 음나무재라고 불렸다기에 의숙 공주와 이 엄나무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었던 듯 하다.
그런데 실록을 보면 성종 8년(1477)에 의숙 공주가 정현조보다 먼저 죽음을 맞았으므로 이 이야기 역시 20세에 죽음을 당한 두 왕자와 공주의 비극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꿰맞춘 후세 사람들의 이야기인 듯 싶다. 실록에는 또 의숙 공주의 제사와 관련하여 정토사의 이름이 여러 번 언급되고 있으니 어떤 이유로든 정토사가 의숙 공주의 원당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백련사라는 이름 또한 실록은 물론 1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와 19세기 말에 만든 경성오부도 등에는 여전히 백련산 정토사로 나와있고, 최근까지도 “경티절(정토절)에 다녀와야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기에 이름을 백련사로 바꾼 후에도 정토사라는 이름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백련사는 이후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대중이 중창불사에 착수하여, 3년 만인 현종 3년(1662년)에 대법전을 중건하였으며, 영조 50년(1774)에는 본사에서 수행하던 낙창군 이탱이 크게 중창하여 사찰의 규모를 일신하였다고 한다. 그후 오늘날까지 수 차례의 중수를 거듭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가을 바람 곱게 물든 백련산은 이제 산 중턱까지 들어선 집과 문화체육회관 등으로 인해 더욱 낮아진 산이 되었다. 산 정상까지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책로가 마련되었고 백련사로 오르내리던 예전의 황토빛 흙길은 이제 제법 넓게 포장되어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이 삼각산 자락임을 알려주는 일주문을 지나니 옛 전설 속의 엄나무가 지난 세월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옹기 종기 모여앉은 스님들의 처소를 지나니 군데군데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징, 바라, 북, 나발 소리가 한데 어울려 오는데 그 소리에 이끌려 가보니 극락전에서 스님들이 바라춤과 함께 49재를 올리고 있다. 영산재가 소중하게 보존되어 있는 태고종의 총본산 금화산 봉원사가 저 앞이니 태고종 백련사의 의식 또한 그에 못지 않으리라.
무량수전과 극락전 사이 덩그마니 자리한 약사전에 들어보니 그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하얀 백불로 앉아 계신 부처님의 모습이 친근하고 정겹다. 철원 심원사 천불전의 부처님을 모시면 밥은 굶지 않는다는 속설과 큰 영험이 있다 하여 봉원사, 청룡사 등 서울 절에는 거의 다 한 분씩 모셔다 놓았다더니 이 부처님이 그 영험한 부처님이 아니신가 생각된다. 또한 부처님 주위로 유리장 속의 제석탱, 구품탱, 현왕탱, 조왕탱, 감로탱 등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빼어나다.
화기가 드러난 몇 군데를 확인해보니 대부분 ‘광무 3년(1899) 기해 5월 18일’ 조성된 것들이다. 금어 서옹당 경환 스님이 그린 것이라고 알려진 조왕탱이며 다른 절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구품탱을 대하고 보니 한동안을 꼼짝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감로탱을 앞에 다가서니 조금 전 보았던 극락전의 스님들이 그대로 그림 속에서 하얀 고깔을 쓰고 나발을 불고 바라를 치며 장엄한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감로탱은 그 하단에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중생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그려내는데 백련사의 이 감로탱은 의식을 재현하고 있는 스님들의 미소띤 모습까지 자세하게 그리고 있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수작이라 해야 하겠다. 융경 3년(1569) 명 범종도 약사전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백련사 약사전만을 둘러보는데도 하루해가 짧기만 하다.
동대문 밖 낙산의 청룡사에는 65년 한많은 세월을 보낸 단종비 정순왕후의 자취가 애닯고 서대문 밖 백련사에는 참회의 나날을 보내던 의숙 공주의 짧은 생애가 남았으니 그 아련한 대비는 무엇일까. 한 산(삼각산)에서 발원한 두 곳 모두 철원 심원사의 부처님이 앉아 공양받고 계시니 이 또한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