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19.기적의 현장, 샹카샤

신 왕오천축국전 별곡 19

2007-10-02     김규현

삼도보계(三道寶階)의 전설

이른바 실증적 사고방식에 물들어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과학이 이루어 낸 업적을 모조리 뒤집어버리는 초자연적 능력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초기불교의 현장들 중에서 이 샹카샤는 단연 이채로운 곳이다. 물론 이 곳은 흔치않은 불타의 초자연적 일화가 어려 있는 현장이기도 하지만 속칭 불교의 ‘8대 성지’의 하나로 꼽히는 의미 있는 곳이어서 불자라면 그냥 지나갈 수는 없는 곳이다.

그렇기에 이번 길은 좀더 큰 기대가 있었기에 다시 중천축으로 올라와 몇 번씩이나 차를 갈아타야 하는 그간의 여정이 그리 힘들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의 혜초의 발길도 분명히 지나쳤던 곳이다.

“이 중천축국 안에 네 개의 대탑이 있는데 항하의 북안에 세 개가 있다. (중략) 넷째 탑은 삼도보계탑(三道寶階塔)으로 중천축국의 왕이 사는 성에서 서쪽으로 7일 거리에 있는데 두 항하 사이에 있다. 이 곳은 부처님이 도리천(刀利天)에서 삼도보계로 변하게 하여 밟고 염부제주(閻浮提州)로 내려온 곳이다. 보계의 왼쪽은 금이고 오른쪽은 은이며 가운데는 유리로 만들었는데 부처님은 가운데 길로 내려오고 범왕(梵王)이 왼편으로, 제석(帝釋)이 오른편 계단으로 부처님을 모시고 내려온 곳이라 하여 이 곳에 탑을 세웠다. 절도 있고 승려도 있음을 보았다.”

혜초는 절과 승려가 있다는 점은 강조했지만 그 규모에 대해서는 상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한 세기 먼저 도착한 현장 법사에 의하면, 샹카샤는 ‘카핏타카(劫比他國)’라는, 주위가 2천여 리이고 도성의 주위가 20여 리나 되는, 당당한 한 나라의 도읍이었다. 이 나라에 대하여 현장은 기후와 산물은 중천축국과 비슷하고 풍속은 온화하며 사람들은 학예를 즐겼으며 가람은 4군데이고 승려는 1천 명으로 모두 소승의 정량부(正量部)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고 기록하고, 이어서 샹카샤의 유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성의 동쪽 20여 리에 대가람이 있다. 규모가 광대한데 조각은 정수를 다했고 여래의 상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승도는 수백 명인데 모두 정량부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으며 수만 명의 사람들이 사원 쪽에 살고 있다. 가람 경내에 세 개의 보계가 남북으로 벌려져 동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바로 여래가 33천(三十三天)에서 내려오신 곳이다.”

그러니까 샹카샤는 도읍지의 동쪽 교외에 있던 곳으로 절 주위의 인구가 수만 명이나 되었던 큰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지만 그러나 천국으로 통하는 하늘길이 열려 있었던 기적의 땅 샹카샤는 현재는 교통편도 거의 연결이 안 되는 작은 마을로 전락해 있었다.

그것은 인근의 이슬람 유적인 아그라(Agra)의 타지마할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어 있는 사실과 대비되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는데 마을 입구로 들어가는 입구에 글씨가 반쯤 벗겨진 채로 서 있는 ‘Holy Place’라고 씌어져 있는 낡은 표지판이 그 느낌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것은 현재 고향인 인도에서의 불교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어서 나그네의 가슴에 한 줄기 소슬한 바람이 스쳐가게 만들었다. 역시 영원한 진리는 없다는 말인가? “아니차(Anicha)!” 그래 그것이 바로 붓다가 말씀하신 진리인 아니차〔無常〕였다.

천국으로 통하는 ‘하늘 길(Sky cord)’

마을 입구에서 배낭을 맡기고 지나가는 자전거 뒤에 매달려 유적지에 내렸다. 그리고는 철책에 갇힌 채 보관되어 있는 아쇼카의 석주 앞에서 잠시 발길을 머문 다음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는 그 현장에 섰다. 그리고 말을 잃었다. 그 곳은 기적의 현장도, 의미 있는 성지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수많은 경전이나 박물관의 유물들을 보면서 상상했던, 그 찬란한 기적의 현장이란 느낌을 도대체 느낄 수가 없었다. 그 곳은 붉은 벽돌의 건물 잔해만 뒹구는 폐허 바로 그것이었다.

여래의 초자연적 능력을 현란하게 열거한 수많은 북방불교의 경전은 물론이고 여래의 행적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록한 초기남방불교의 경전에도 샹카샤의 전설은 기록되어 있다. 이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들은 성경의 구절을 액면 그대로 믿어 예수의 초능력이나 기적을 사실 그 자체로 인정하는 기독교의 근본주의자들과 달리 불경의 구절을 때로는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혜로움이 있다. 종교를 믿되 때로는 이성적인 태도도 유지한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이 샹카샤는 우리에게 어려운 화두로 다가온다. 그냥 북방불교의 수많은 전생담(前生談)처럼 상징적으로 해석해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실적으로 믿기에는 무언가 뒷맛이 남기 때문이니까.
샹카샤의 전설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세존이 슈라바스티의 기원정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 간담바 나무 아래에서 ‘천불화현(千佛化現)’ 기적을 행하신 후 바로 하늘로 자리를 옮겨 도솔천의 선법당(禪法堂)에서 생후 7일 만에 헤어진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 설법을 하시며 90일을 보내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실 때, 신통제일 목건련과 지혜제일 사리불이 하강의 때와 장소를 미리 알고 기다렸다가 천인들을 대동하고 하늘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온 세존을 영접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의 혜초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보계의 왼쪽은 금이고, 오른쪽은 은이며, 가운데는 유리로 만들었는데 부처님은 가운데 길로 내려오고, 범왕(梵王)이 왼편으로, 제석(帝釋)이 오른편 계단으로 부처님을 모시고 내려온 곳이라 하여 이 곳에 탑을 세웠다.”
그러니까 인간 붓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마야부인을 만나고 90여 일 만에 다시 마치 무지개 같은 반짝이는 보석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바로 샹카샤로 내려왔다는 말이다. 이른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하늘 길’을 붓다가 열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마치 기독교의 ‘부활 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개개인에 달린 것이기에 여기서는 그 몫을 독자들에게 돌리겠지만, 하여간 사실이든 전설이든 간에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후대에 수많은 경전에 기록되었고 또한 산치, 마투라, 간다라 유적에 중요한 소재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면 이처럼 현란하게 묘사된 신비스럽던 ‘하늘 계단’이 현재는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로 우리의 관심사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의문의 일단은 현장의 기록에서 대략 풀 수 있다.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계단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제는 부서져서 없어졌다. 그래서 제왕들은 스스로 보계를 볼 수 없음을 한탄하여 벽돌과 돌로 쌓고 보석으로 장식하여 원래의 자리에 보계를 다시 복원시켰다. 그 높이가 70여 척인데 그 위에 정사를 세웠다.

그 안에는 석조불상이 있고 좌우로는 제석천과 범천상이 있는데 그 자태는 처음 것을 본떠 역시 계단을 내려오는 자세이다. 근처에 높이 70여 척 되는 돌기둥이 있는데 아쇼카가 세운 것으로 감색 광택이 나고 질은 단단하고 결이 섬세하다. 위에 사자를 만들었는데 웅크린 채 계단을 향하고 있으며 진귀한 형태의 조각이 그 사면을 둘러싸고 있다.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은 죄와 복의 차이에 따라 그림자가 기둥 속에 나타난다.”

현재 옆의 사진으로 볼 수 있듯이, 근처의 아쇼카 석주와 사자석상은 비록 부서졌지만 아직 그 자리에 보존되고 있다. 이를 보면 위의 현장의 기록은 신빙성이 많다.

그렇다면 적어도 천여 년 전에는 대략 200m에 달하는 원래 상태의 계단을 비롯한 사찰과 웅장한 불상이 존재했었고, 그 후 이것들이 세월에 의해 무너졌다가 역대 친불교적인 왕조에 의해 복원되어 적어도 현장과 혜초 당대까지도 그 구조물들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샹카샤의 폐허화는 인도의 불교유적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슬람의 침공과 인도의 힌두화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 주범은 ‘제행무상’이라는 법문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세월이란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