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18.미투나상의 향연장, 카주라호

신 왕오천축국전 별곡 18

2007-10-02     김규현

돌 위에 피어난 딴트리즘(Tantrisim)의 현장

카쥬라호(Khajuraho)로 가는 길목인 잔시(Jhansi)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탔다. 이 곳은 기차길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외진 곳이기에 대개의 관광객은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지만 명색이 해동의 순례자라는 이 몸이야, 비록 혜초처럼 걸어가지는 못할 망정, 몸 좀 편하자고 어찌 날아갈 수 있으랴!

물론 카쥬라호는 10세기에 조성된 것이기에 혜초의 발걸음이 스쳐갔을 가능성이 없는 곳이다. 그렇지만 이 곳은 현재 인도를 대표하는 가장 흥미로운 유명 관광지이고 또한 혜초가 밀교승이기에 그를 알기 위해서도 이 번 길은 필수적이었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도 카쥬라호 같은 곳은 없을 것이다.

이 ‘없다’라는 의미는 그 곳에 현재 남아있는 유적들이 우리들의 상식과 상상을 초월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들은 한 마디로 괴상망측하다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인간의 원초적 본능의 하나인 ‘종족의 번식’과 ‘섹스의 환락’에 대한 은밀한 관심은 중국의『소녀경(少女經)』이나 인도의 『까마수트라(Kama-sutra)』같은 교육적 성전(性典)으로 만들어졌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밀하게 제작되어 배포되고 이용된 것이지 카쥬라호처럼 당당하게 드러내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카쥬라호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한 것이리라.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이 고대의 진귀한 예술품을 보는 이들은 한편 흥미로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아해마지 않는다. 왜 신성한 종교적 상징물에 인간의 남녀를 비롯해서 신과 동물과 인간들이 한데엉켜 있는, 속칭 ‘그룹 섹스’를 하는 망측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카쥬라호의 역사는 신화로부터 시작한다. 달의 신 찬드라(Chandra)가 인간의 여인을 사모하여 지상에 몰래 내려와 회포를 풀고는 새벽에 떠나기 전에 둘 사이에 태어날 아이는 천하를 지배할 왕이 될 것이며 그 후손들은 많은 사원을 지을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바로 찬델라(Chandella) 왕조의 시조인 ‘달의 아들’이란 이름의 찬드라뜨레이아(Chandratreya)다. 과연 예언대로 이 찬델라 왕조는 강력한 무력으로 중부지방을 모두 정복하고 5백년간을 이어 내려오며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는데, 특히 950년부터 백 년 사이에 카쥬라호를 중심으로 85개의 사원을 조성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모슬렘의 침공과 세월의 침식으로 많이 사라져버려 약 20여 개 정도만 남아 있다.

그 사원들은 동, 서, 남부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마을 인근의 서부군에 유명한 락쉬마나 사원과 칸다리아 마하데요 사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입구에서 종을 치고 사원의 외벽으로 다가가자 주위에서 거침없이 탄성을 질러대는 코쟁이 아줌마들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 속을 비집고 다가가니 과연 사진 상으로는 눈에 익은 예의 미투나상이 기둥과 벽에 가득 새겨져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과연 그랬다.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에 비추이는 그 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밀교승으로서의 혜초의 초상

다시 우리의 혜초로 돌아가자. 혜초가 중국 밀교의 초조(初祖)로 꼽히는 인도의 밀교승 금강지(金剛智, 671∼741)와 불공(不空, 705∼774)의 제자로서 중국 밀교사에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왕오천축국전』에는 밀교적인 어휘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왜 그럴까?

혜초가 중원을 거쳐 어렵게 천축 땅을 밟았을 때 인도대륙은 딴트리즘의 회오리에 한참 싸여 있을 때였다. 이는 힌두뿐만 아니라 불교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당시 인도 불교는 수세기 동안 전성기를 구가하던 대승불교의 반작용 - 즉 지나친 이론화로 인한 사변적인 불교로 변한 것에 대한 - 으로 변화하는 시대와 호흡을 같이하기 위해서는 딴트리즘이라는 신사조를 긴급 수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불교가 가진, 항상 시대와 함께 했던 일종의 탄력성이었다. 그 결과 딴트리즘은 불교학의 메카였던 나란다대학을 비롯한 전 인도중기불교 속으로 깊숙이 자리잡게 되고 그 신사조의 여파는 바로 당시 세계불교의 최대의 수요처인 중국대륙으로 밀려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 선봉장이 바로 혜초의 두 스승들이었다.

천축을 여행할 당시의 젊은 혜초는 아직 밀교에 대한 개안을 하지 못했을 때였다. 그것은 혜초가 당시 밀교학의 메카였던 나란다대학에 입학조차 하지 못한 실력(?)을 미루어 짐작하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장안으로 돌아온 뒤부터 혜초는 본격적으로 두 스승으로부터 범어를 공부하고 금강계(金剛界)의 비밀교법을 전수 받아 후에는 밀교경전 번역에 참여하는 공을 세워 불공의 ‘6대 제자’의 하나로 꼽혀 중국 밀교사의 맥을 잇게 된다. 이를 보면 혜초의 밀교승으로서의 활약은 말년에 활발했다고 볼 수 있으니 『왕오천축국전』에 밀교적 어휘가 없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혜초는 733년부터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스승 금강지와 불공을 모시고 번역을 시작하여 780년에 혜초 자신에 의해 서문이 쓰여진 밀교경전 『대교왕경(大敎王經)』의 번역사업에 참가했다.

또한 혜초에 의해 직접 지어진 기록 「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祈雨表)」에 의하면 774년에는 큰 가뭄이 들어 대종(代宗) 황제의 명으로 혜초가 법주가 되어 기우제를 지냈는데, “혜초가 옥녀담에서 제단을 쌓고 향을 피우고 7일이 지나자 산천이 감응하는지라 사리를 던졌더니 비단 같은 보슬비가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기우제를 지내는 혜초의 이런 모습은 마치 우리의 『삼국유사』의 한 구절을 보는 듯한데 초능력을 중시했던 밀교승의 본령을 엿보게 하고 있다. 밀교의 범위는 광범하다. 크게는 신구의(身口意)로 실제적 수행을 중시하는 중기밀교, 즉 순밀(純密)파와 인도와 티벳에서만 성행했던 우리가 속칭 좌도밀교(左道密敎)라고 폄하하여 부르는 금강유가파로 갈래를 달리한다. 순밀은 다시 태장계와 금강계로 갈라지는데 우리의 혜초는 바로 금강계의 후계자로 밀교사에 우뚝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대칭되는 원리의 합일을 상징하는 미투나상

곧잘 오해되고 있는 용어의 개념 정리를 좀 해보자. 바로 미투나(mith una)상에 대해서다. 흔히 인도에서는 마이투나·아디붓다 또는 한역으로는 쌍체불상(雙體佛像)·환희불상(歡喜佛像)·합환상(合歡相)으로 불리는 불상은 우리 불교권에는 없는 생소하고 해괴한 것이다. 어째서, 본능의 극복을 방편문으로 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이론을 가진 종교들이, 그것도 뭐 신흥 사이비 종교도 아닌 수천 년의 뿌리를 가진 고등종교가 마치 섹스행위를 통해서 영원한 세계인 니르바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해 놓았을까?

비록 오해의 소지는 있더라도, 딴트리즘은 결코 원초적인 본능대로 성행위를 통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이론을 가진 사상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한 마디로 줄여보자면 ‘모든 이원론적 요소’, 즉 ‘음과 양’·‘정과 동’·‘지혜와 자비’·‘침묵과 행위’·‘반야와 방편’ 등의 합일을 의미하는 시각적인 ‘방편론’이라 말할 수 있다.

선(善)과 빛과 지혜를 중요시하는 것 못지 않게 그에 상반되는 요소, 즉 악(惡)과 어둠과 무지도 중요시하는 이 획기적인 사상은 기존의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무시되었고 배척되었던 인간의 원초적 본능까지도 진리의 한쪽 단면으로 여기고 동시에 추구하였던, 세계사상사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회오리바람이었다. 그 진원지의 한 곳이 바로 이 카주라호이고 그것의 힌두적 결정체가 바로 이 곳의 돌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1,300여 년 전, 우리의 혜초도 당시 부처님의 나라에 열병처럼 번지는 신사조였던 이 딴트리즘의 위세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도 우리처럼 어떤 충격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젊은 혜초 스님이 이런 해괴한 미투나상을 보고 받았을 충격은 과연 어떠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