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과의 인연으로…

나의 인연 이야기

2007-10-01     관리자

불교가 ‘깨침의 종교’라는 법문은 많이 들었으나 `정말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몇몇 선지식을 찾았으나 어느 누구도 시원스럽게 `이렇다`라고 답해 주신 분은 없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 날 `교계 신문`에서 불교교양대학 학생 모집 광고를 보고, 늘 품어 온 의문도 해결하고 동시에 불교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해 보고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입학 후 매주 5일, 매일 2시간씩 야간 수업으로 2년간 교육을 받았다.
불교교양대학에 다니면서 불교에 대해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특히 경전 강독시간에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불교의 진수가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점차 깊어졌고, 나의 오랜 화두였던 `깨달음이 무엇인가`도 서서히 손에 잡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즐거움을 금할 수 없었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가장 감명이 깊었던 것은, `진리의 세계를 알게 된 점`이다. 중생 세계에 나타난 물질과 형상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꿈·거품·그림자와 같으며 이슬·번개와 같다’고 한 말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허깨비와 같다.’는 말이다.
그 때까지 나는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고, 물질 세계만이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강경을 공부함으로써 여태까지 어리석고 우매한 삶을 살아 온 것이 한없이 후회되었다.
‘왜 내가 좀 더 일찍 이 대우주의 진리인 진여(眞如)를 접하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또한 금강경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과정과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비유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금강경과의 인연이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으므로 내가 그 동안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크게 감명을 받고 사색한 진리의 세계관을 먼저 밝혀 보고자 한다.
이를 밝힘에 있어 특히 두려움을 느낀 점은, 진리의 세계는 말과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득이 언급하자니 방편상 도리가 없어서 글로 쓴다는 것을 전제하고자 한다.
진리의 세계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 多羅三 三菩提)’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세계로 우주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 태초의 허공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공’의 세계로 금강경의 근본 핵심 사상인 ‘공사상’의 철학인 것이다.
이 공은 니체의 단멸(斷滅)을 의미하는 허무주의(虛無主義)와는 근본 바탕을 달리하는 것이다. 즉 불교의 공은 ‘만물 형성의 근원인 진여로 이 세계는 너와 내가 없고, 남자와 여자, 큰 것과 작은 것, 귀한 것과 천한 것 등 차별이 없으며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영원하고 평등한 자리이며, 이 자리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없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이다.
이 근본의 자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원통미묘(圓通 微妙)한 작용 즉 인연(因緣)에 따라 생기는 인연소기(因緣所起)로 우리 중생의 눈에 뜨이는 우주만물이 생겨나고, 인연이 다 되면 근본 바탕 자리인 진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금강경은 공(空) 사상의 묘체(妙體)를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근간 어느 과학자에 의하면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의 엠페도클레스가 근본 물질설을 제창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채택한 지수공화(地·水·空·火) 4원소설의 기본 물질관을 근거로 공의 세계에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충만해 있어, 이것들이 서로 주어진 여건 즉 인연에 따라 동식물과 흙, 바위 등 유정, 무정의 물질로 형성되었다가 인연이 다 되면 다시 공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으로 이것은 불교의 연기설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세계를 여여(如如)의 세계, 진여(眞如)의 세계, 반야(般若)의 세계로 우리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진아(眞我)와 일치하는 것으로 봄이 대승불교의 기본입장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진여(眞如)의 세계가 내 마음의 본 자리’라는 것을 모르고 인연에 의해 생겨난 중생의 현실 세계를 진짜 인생인 양 믿고 인간의 욕망을 채우려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안타까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공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금강경은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하여 괴로움과 번민에 찬 중생의 세계를 벗어나야 할 당위성과 수행 없이는 진리의 세계에 접근할 수 없음을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함일지라. 따라서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었다.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지식만 가지고서는 진실한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점차 더해 갔다.
교양대학에서 기초 교리 강좌 시간에 신해행증(信·解·行·證)에 대한 강의를 들었으나 별 실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금강경을 계속 독송하는 가운데 부처님의 가르침인 깨달음을 진정 체득하려면 이 네 과정을 꼭 거쳐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진리의 세계, 반야(般若)의 세계로 나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마음의 병은 사상(四相)을 버리지 못하는 아만(我慢)과 독선(獨善)으로, 바로 그 아만과 독선의 대표적인 예인 각종 편견과 차별심을 버리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 수행의 궁극 목표인 깨달음은 진리의 세계를 찾으려는 것으로 이것은 대승불교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을 근거로 우리 마음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지니고 있는 내 마음의 무명(無明)을 다 벗기면 부처의 성품이 나타난다’는 믿음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실천의 종교이므로 각자의 근기(根機)에 맞는 신행활동을 해야 하며 어떤 신행활동을 하든지 궁극의 목표는 성불 즉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 깨달음을 얻는 길이므로, 나는 그 동안 사찰의 법회 참석, 기도, 금강경 수지·독송과 사경, 여름·겨울의 사찰수련회 등 여러 바라밀 수행에 나름대로 열심히 동참했다. 이러한 바라밀 수행을 통해서 느낀 것이, ‘깨달으려면 선정에 역점을 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참선 수행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몇 사찰을 찾아 선지식의 지도를 받았다. 물론 그 전부터 해온 여러 가지 수행 경험은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자신이 없고 아무래도 체계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 끝에 화두선을 하기로 결론을 얻었다.
‘시심마(是甚 )’의 화두를 갖고 일심 전념으로 참선 수행에 들어간 지 이제 어언 5년째가 된다. 참선을 하고나서 처음 6개월 정도는 다리와 허리가 무척 아팠다. 또한 잡념을 끊으려는 망상(妄想)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해서 적응하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 마음을 단전 한 곳에 집중하여 화두에 몰두하면 내 몸의 존재가 인식되지 않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마음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언설(言說)로는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수행은 진여의 세계를 고해(苦海) 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많은 중생에게 하루라도 빨리, 한 사람에게도 더 알려야 되겠다는 생각과 또 이 공덕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수미산왕(須彌山王)만큼의 재보시(財布施)보다 더 크다는 것, 또 내 스스로 금강경의 진체(眞髓)를 보다 깊게 탐구하는 계기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차원에서 한국사상문화학회(韓國思想文化學會)의 문화 강좌에 ‘금강경을 통한 진리 세계의 탐구’라는 과정을 개설하여 강의,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아무튼 내 삶이 계속 되는 한 견성(見性), 욕심이고 망상을 떨쳐 업을 정화하고 마음을 비워 청정 불국토를 넓히는 데 미력이나마 열심히 정진할 것을 가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