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달빛 아래서 쓴 유서(遺書)

특집/욕심을 줄이는 법

2007-10-01     관리자


덕유산(德裕山) 남쪽에 자리한 영각사(靈覺寺)엔 열흘이 넘도록 장대비가 내리고 있어요. 연일 퍼붓는 비 속에서 갓난아기 머리만한 다알리아꽃이 녹아내리는 습습하고 암울한 도량에서 생기차게 자라는 이끼풀을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어요.
가물던 날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묵은 바위에 낀 이끼 풀들이 요 며칠 얼마나 신비로운 초록빛으로 변했는지 몰라요. 호기심에 손끝을 대보면 싸늘한 물방울과 함께 닿는 묘한 부드러움은 대단히 매혹적이에요.
새벽에는 돌배를 주웠는데 볼품없는 작은 배지만 많이 달린 가지는 여지없이 꺾이고 찢어져 땅에 떨어진 것을 보고는 나도 욕심 때문에 이것저것 달고 살다가는 언젠가는 이 꼴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기사 그 많던 산새들, 심지어 매미조차도 몸을 숨긴 물안개에 갇힌 산사의 뜰에 날아다니는 잠자리도 그 날개가 유난히 얇고 성글고 가볍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지닌 것 없는 욕심 없는 영혼만이 하늘세계로 오를 수 있다는 진리에 그 누가 의심을 내겠어요?
유달리 웃음이 많고 경쾌하게 느껴지는 보살님! 벌써 13년째 해마다 유서를 쓰는 것을 빤히 알고서 욕심을 줄이는 데 좋은 방편이 될 것 같다며 공개해달라고 하니 여간 쑥스럽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네요.
더욱이 지금은 결제 중, 이 곳 대중스님들께서도 한 순간 한 순간을 아껴가며 각기 근기(根機)에 따라서 묵언(默語), 장좌불와(長坐不臥),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행하며 정진을 하고 계시는데 죽비잡이(입승 소임인데, 시간마다 죽비 치고 입선 목탁을 치므로 죽비잡이, 목탁새라는 별칭이 있다.)인 내가 글판을 벌여야 하니 이것이 다 인연(因緣)과 업연(業緣)의 소치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행히 오늘은 열흘마다 돌아오는 삭발목욕일이라 그나마 오후에 몇 시간 자유입선(自由入禪)이 있어서 대중스님들께서 풀빨래 손질하는 틈에 눈치를 살피며 두서없이 적어 내려가고 있어요.
우선 유서를 미리 쓰게 된 연유부터 밝히자면 13년 전 팔월 초승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운전기사의 졸음운전으로 차가 전복되었는데, 그 때 한 차안에서 생사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어요. 나 또한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니까 유서를 미리 써놓아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이왕이면 일 년 중에서 가장 풍성한 계절인 한가위 보름날을 정해 죽음을 연습하고 익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고 싶었던 거지요.
백지 한 장을 앞에 두고 ‘나의 죽음과 함께할 것이 무엇인가?’로부터 인연과 인과(因果)에 대해서, 물질과 정신에 대해서 보다 신중히 생각하며 참회(懺悔)하고 발심(發心)하는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를 지내듯 만월(滿月)의 밤을 보냈지요.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간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며 부탁드립니다. 제 생애에 있어 모든 분들은 진정 여래(如來: 부처님)셨습니다. 허물 많은 저를 늘 은애(恩愛)하여 주신 여래셨습니다. 때론 지혜가 없어서 세월의 강물이 흘러간 자리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길을 제 스스로 불태워버린 자리에서, 혼자라는 착각에 외로워도 했지만, 그것은 저의 어리석은 생각이었을 뿐, 여래께서는 늘 ‘깨달음’이란 선물을 주시기 위해서 함께 계셨습니다.
-중략-
첫째: 제 몸을 이미 ‘생명나눔실천회’에 각막·장기·시신·골수를 기증하였으니 연락(02-734-8050)하여 주십시오.
(※각막은 사후 10시간 이내에만 개안(開眼) 수술에 사용.)
둘째: 부고장을 보내지 마시고 부의금과 화환을 사절하시고 현재 제 용돈 360만원만 장례에 쓰십시오.
셋째: 호상(護喪)은 여일(如一) 스님께 부탁드립니다.
모든 재는 간소하게 하시고 사십구재로 탈상하시고 그 후 어떤 추모행사나 제례의식도 원하지 않습니다.
-이하 생략- ”

첫째 부탁의 이유는 나의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아서 일체중생의 몸을 괴롭혀 키운 것이니 죽어서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보시하면 부모님께도 공덕이 돌아갈 것이요, 중생에게 진 빚도 갚을 수 있기에 결정한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생전에 육신 보시를 행하셨는데 나는 아직 헌혈밖에 한 것이 없으니 죽어서라도 부처님처럼 보시수행문을 통하고 싶어서이기도 하고요.
둘째 부탁의 이유는 나의 안부가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언젠가는 연락하실 것인즉 그 때가 몇 년 후라도 알고자 할 때 말씀드리면 늦지도 않고 예의에도 벗어나지 않으므로 공연히 미리 알려서 번잡스럽게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당신의 열반 후 장례식은 신도들이 알아서 진행하고 스님들은 정진하라 하셨으며, 육조단경(六祖壇經)에 혜능(慧能) 스님께서도 부처님처럼 말씀하셨으니 나 또한 그 뜻을 받들어 상좌들과 몇몇 신도들이 조용히 장례를 치러주기 바라는 것이며, 또한 선문(禪門)에서는 “결제 때에 돌아 다니는 중은 때려죽여도 살인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출입을 금해 부모님상을 당해도 인간 노릇 포기하고 들어앉아 있는 법이니 혹 결제 중에 죽어서 더욱 스님들을 난감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제가 수십 억 불사를 이루어 두세 번 종단에 증여를 하였고, 인연처(사찰·교도소·대학교·복지시설 등)에 불사와 시주를 하였다고 혹자는 항상 내가 많은 돈이 있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아요. 나는 평소 시주돈이란 가랑잎과 같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주머니에 오래 넣고 있으면 부서지고 남 앞에 내놓고 자랑하다 보면 날라가고 운수가 사나워서 불이라도 붙으면 많을수록 크게 타지요. 그래서 인연 되면 쓰는 거예요.
나는 시신이 병원에 갈 것이니 평소 내가 입던 옷 중 깨끗한 것 입고 가면 되고, 시신 없이 치루는 장례이니 300여 만원이면 될 거예요.
셋째 부탁의 이유는 나의 행자시절부터 오늘까지 어려울 때마다 찾아와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는 말없이 떠나버리는 청빈하고 올곧은 수좌(首座)인 여일 스님이면 오랜 세월에 나를 동생처럼 돌봐준 도반이기에 내 바람대로 보내줄 것이라 믿어 끝까지 신세를 지려 한 것이에요.
또 사십구재 후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나는 금생에 부모님에게는 불효녀식이요, 스님들께는 불효제자라, 어른들의 생전엔 생신과 명절인사를 빼먹었고 사후에도 제사를 정성껏 받드는 도리를 행하지 않고 있으니 내 죄를 내가 아는지라 나 또한 생일상과 제사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받지 않으려는 것뿐이에요.
나는 기금까지 열심히는 살아왔으나 지혜롭지도 착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잘 살아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흔히 추모행사로 이루어지는 부도(浮屠)나 공덕비·영정 등을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저 나를 아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나를 생각해서 칭찬하거나 욕을 하거나 그 혀끝이 붓이고 그 말들이 비문(碑文)일진대 따로 비를 세울 것이 뭐가 있겠어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새겨진 나의 모습이 가장 잘 그려진 영정일 거예요. 무심한 세월과 인심 속에서 뭘 남길 것이 있겠어요? 특집욕심을 줄이는 법보살님! 보살님도 올 추석에는 유서를 한번 써 보세요. 자신의 욕심 무게도 달아보시고 행여 ‘욕심과 애착’이라는 이름의 불붙은 숯을 손에 쥐고서 놓지 못한 채 ‘뜨겁다’고만 소리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도 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