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닮고 싶어요

|불광이 만난 사람|/화성 신흥사 오륜회 회장 한영우 씨

2007-10-01     관리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와 선뜻 사진기자의 카메라 가방을 짊어지고 앞장서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남을 배려하는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었다. 한편 요즘 ‘가정의 위기’를 개탄하는 소리가 드높은 상황에서 모범적인 불자 가정을 소개하는 것도 해결 방안이 될 것 같아 평소 존경하는 화성 신흥사 성일 스님께 여쭈었는데, 스님께서 기꺼이 그를 추천하신 까닭을 알 수 있을 듯싶었다.

삶의 잣대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까지 다른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종교적 가치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삶의 잣대가 달라질 수 있기에 가족이 같은 종교를 갖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가정을 일구는 주춧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8년 전 부인을 따라 처음 절에 갔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불혹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타종교의 주일학교 교사, 청년부장, 구역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히 전도활동을 해왔던 터라 거부감이 커서 법당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그렇게 법당 밖에서 배회하길 1년, 성도재일 법회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법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매우 큰 감명을 받았고, 그 이듬해 여름수련회에 참석하여 2박 3일 동안 수련하면서 불교에 매료되었지요.”
초발심 때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이 있던가. 그는 곧바로 부인과 함께 신흥사 불교대학 5기에 입학, 단 한 번도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새롭게 불교에 눈뜬지라 그 열의가 남달랐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참으로 기뻤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 실천한다면 세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대사회적인 문제와 봉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 교회에 다닌 것도 종교적 열정보다는 사회 봉사에 뜻이 있어서였다.(청년시절에 4H구락부 활동으로 국회의원 표창을 받은 바 있고, 현재 청소년 선도위원, 방범기동순찰대 운영위원, 문화환경실천연합회 홍보위원, 자녀 안심하고 학교 보내기 운동 자원봉사자, 바르게 살기 운동 매교동 지회장으로 수십 년 동안 봉사한 공로로 국회의원, 수원시장 표창 등을 수십 차례 수상하였다.)
그런데 불교에 입문하면서 평소 추구해왔던 봉사에 대한 가치관이 올곧게 정립되어 날아갈 듯이 기뻤다. 보시를 하고도 보시했다는 상(相)을 내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는 불교야말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점점 각박해지는 이 세상을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일굴 수 있는 종교가 아니겠는가.(신흥사 불교대학 5기 졸업생으로 이루어진 오륜회의 회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된 그는 절에서도 쉴새없이 봉사할 거리를 찾는다. 전공인 전기 배선이며 보일러를 살피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의 몫이 되었고, 수련대회를 비롯하여 각종 특별법회가 열릴 때는 미리 며칠 전부터 절에 가서 구석구석 점검, 원만히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주춧돌을 놓고 있다.)
“온 가족이 절에 다니면서 가정이 화목해졌고, 아내와 함께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기쁩니다. 불교로 인도해준 아내(고의분 보살, 43세)가 고마울 따름입니다.”라며 부인에게 은근한 눈길을 건네자, 그녀는 “부처님과 신흥사 성일 스님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다.”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행복의 원천
“절에 다니기 전엔 집안에 풍파가 심했어요. 남편이 쌀독을 박박 긁어서까지 남을 도와주는 사람인지라 살림하는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일을 해놓고도 돈을 못 받는 일이 잦아 고생이 심했지요.”
그들은 열심히 일했으나 늘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왜 그리 교통사고는 자주 나는지 하루하루 고통의 나날이었다.
“10여 년 전 신흥사에 발 디디고 부처님을 만난 날부터 내 인생에 햇빛이 났습니다.”
그녀는 불연(佛緣)을 그렇게 표현했다. 길디 긴 축축한 장마 끝에 나온 햇살이 얼마나 고마운가.
“처음에는 법당에 들어가는 것도 부끄러워 공양간에 가서 설거지만 했어요.”
그녀는 먼저 100일기도에 입제한 뒤 아침 저녁 신묘장구대다라니 10독, 108배를 하는 등 스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지극정성 기도하였다. 기도를 하면서 마음이 점차 편안해졌고, 신심이 깊어졌다.
“100일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많은 가피를 입었습니다. 뚱뚱한 몸이 날씬해져 건강을 얻었고, 아들과 딸이 자청해서 절에 다니겠다고 하고, 남편 하는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겁니다. 또 기도를 한 뒤부터는 단 한 번도 교통사고가 나지 않았습니다.”
절에 다니면서 심적· 물적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야말로 지극한 기도가 행복의 원천임을 체험하면서 그녀의 믿음이 얼마나 강건해졌는지, 얼마나 지극 정성 기도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1000일기도를 회향하고 얼마 전 다시 100일기도에 입제했다.
“절에 다니면서 기도한 것밖에 없는데 마음 먹은 대로 되고 만사가 다 잘 풀리니 그저 부처님과 스님께 감사할 뿐이지요. 경제적인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남편까지 개종하여 온 가족이 함께 절에 다니면서 자연히 대화거리가 많아지고 도반처럼 지내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화목해졌습니다. 요새는 저보다 남편의 신심이 더 지극해서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라는 그녀의 말에 싱긋 미소지으며 그가 한마디 거든다.
“저 사람 절에 다니면서 사람(?) 됐어요. 예전엔 내성적이고 어두웠었는데 얼굴도 성격도 아주 밝아졌습니다. 또 요새는 다른 사람을 많이 배려하고, 베풀고, 봉사하려 애쓰고, 우리 어머니께도 아주 잘해서 효부 소리를 듣고 있지요.
저 사람 저렇게 좋아지고, 또 우리 아들 딸(아들은 신흥사 학생회장 출신으로 대학 다닐 때는 학생회 간사를 하다가 입대, 딸은 현재 학생회 총무로서 한 번도 법회에 빠지지 않고 전법에 힘쓴 공로로 부모에게 자녀포교상과 가족상을 안겨주었다) 일요일이면 자발적으로 일어나 즐겁게 절에 다니면서 아무 문제없이 잘 자라주니 제가 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의 말마따나 이 댁의 보기 좋게 변한 모습에 친척들도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한때 고부간의 갈등이 심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젠 시어머니가 그녀를 가장 깊이 신뢰하고, 작은아들에게 “너희도 형네처럼 불교를 믿었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꾼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자 실천하는 종교지요. ‘세상 모든 만물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의상관적인 존재로서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니, 남에게 자랑하지 말고 마음속의 불심으로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섬기며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살라’는 스님 말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즈음 100원 이익 남길 수도 있었지만 10원만 남겼을 때 그 10원이 나중에는 1000원이 되어서 돌아온다는 것, 즉 몇 년 전 고객이 계속 찾아오고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는 것을 보면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임을 체득하고 있다. 실로 부처님 마음을 닮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체험할 때면 법열로 충만해진다.
“내 가족, 내 핏줄만을 생각하는 본능에 가까운 가족 이기주의가 우리 사회를 열린 사회로 발전시키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요, 형제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가족 이기주의’와‘가정의 실종’으로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노인문제, 청소년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독거노인과 불우청소년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물적·심적으로 돕고 있는데, 특히 청소년들과 상담할 때는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고, 가까운 포교당으로 인도하여 불심을 싹 틔워 주고 있다.
한편 어려서부터 꿈꾸어왔던 소망, “양로원을 설립하여 노인분들이 편히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불법을 만나고 나서 더욱 확고해졌고, 요즘 그 원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음 속 깊이 기도하며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단다. 지면에는 밝히지 말라고 당부하는 그와 기꺼이 남편과 뜻을 같이하겠다는 그녀가 참으로 아름다워보였다. 장마 끝에 햇살이 더욱 눈부신 행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