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17.불교예술의 정수, 산치대탑

신왕오천축국전 별곡 17.

2007-10-01     김규현

돌꽃으로 다시 피어난 여인이여!

엘로라의 여운을 가슴에 담고서 밤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하다가 문득 스쳐 지나가는 기차역에 이끌려 허겁지겁 짐을 챙겨 다음 역인 비디샤(Vidisha)에 내렸다. 특별히 불적(佛跡)에 큰 관심 없는 여행자의 경우 산치(Sanchi)를 찾는 일은 드물다. 특급기차가 서지 않기 때문에 그냥 지나쳐버리거나 아니면 도중의 잔시에서 카주라호로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이 시골역에서 돌을 던지면 떨어질 만한 거리에 있는 자그마한 언덕 위에는 예술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세계적인 유적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것이다.

널리 알려 있듯이 스투파의 기원은 붓다의 사리(舍利)를 봉안하기 위해서 비롯되었는데 처음에는 사발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반구형(半球形)의 모양으로 출발하여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지금의 전탑, 목탑, 석탑(塼,木,石塔)형태로 변해왔다. 이렇게 변천된 ‘스투파 변천사’-그 최초의 정점에 바로 산치가 있는 것이다. 아니 산치로부터 스투파는 시작되었다. 전세계의 모든 불탑, 하다못해 우리의 다보탑, 석가탑의 고향도 결국은 산치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 실물이 남아있는 스투파 중에서 산치의 것이 가장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질적, 양적으로도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 뿐인가 다음과 같은 애달픈 전설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어찌 이곳을 지나칠 수 있으랴!

때는 B.C 2∼3세기. 인도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한 마우리아왕조를 연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쇼카가 아직 태자로 있을 때 그는 잠시 웃자인 총독으로 이 지방 일대를 다스렸다. 그 당시 이곳에서 그는 데비(Devi)라는 상인의 딸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쇼카는 곧 이곳을 떠나 인도를 통일하는 전쟁에 몰두하게 되고 자연히 남겨진 그 여인은 점차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데비 여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이 사랑을 나누었던 언덕에 올라 돌아올 기약 없는 님을 기다렸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고 여인은 기다림의 한을 품고 숨져 갔으나 그 둘의 사랑의 씨앗인 남매는 훌륭하게 성장하였다. 후에 남매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정표를 들고 이미 대제국의 왕이 되어 있는 부친을 찾아갔다. 그때서야 아쇼카는 잊은 지 오래인 한 여인을 기억해내었고, 잠시 후회를 하였지만 어쩔 수 없는 세월은 이미 흐른 뒤였다.

이에 아쇼카는 그녀의 비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그 기다림의 언덕에 그녀의 영혼을 달래줄 아름답고 웅장한 스투파를 짓고 그 속에 붓다의 유해를 봉안하고 그 사연을 적은 사자석주(獅子石柱)를 하늘 높이 올려 세웠다. 또한 이미 승단에 귀의한 남매를 역시 소원대로 지금의 스리랑카로 다르마를 전파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그들이 바로 남방불교의 장을 연 마헨드라와 상가미트라 남매이다. 이렇게 해서 평생의 기다림 끝에 망부석이 된 데비여인은 수만 송이 돌꽃으로 산치언덕에 다시 환생하여 지금까지 이렇게 세계인의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불교예술의 극치, 마하 스투파(大塔婆)

유적지는 역에서 지호지간이었다. 정면으로 뻗은 길을 따라 곧장 가다 보면 나직한 산언덕이 보이고, 그 중간에 왼편으로 박물관이 있고 다시 언덕길을 조금 오르다보면 먼발치에 스투파의 둥근 지붕〔覆鉢〕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위 넓게 퍼져있는 유적지 한 가운데 흔히 산치대탑이라 부르는 마하스투파는 마치 사발을 뒤집어 덮어놓은 모양으로 그렇게 작은 동산처럼 솟아 있었다. 하늘로 향해 뾰죽하게 치솟는 다단형(多段型)의 중국이나 해동의 탑만 보아온 우리들에게는 약간 낯선 모양이지만 한눈에도 정제되고 단순화된 아름다움은 범상치 않았다. 아니 그것은 아름답다는 차원을 넘어 어떤 장중함을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드디어 마하산치스투파의 대문인 ‘토라나(Torana)’ 앞에 섰다. 아!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해동의 나그네’는 우선 몇 번의 심호흡으로 그 벅찬 감동을 진정시키고 그 대탑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북문으로 들어가서 순환로를 돌아 남문으로 나왔다가 다음으로는 다른 문으로 들어가서 그 반대편으로 나오는 반복적인 행위를 몇 번을 되풀이하면서 심미안(審美眼)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그 오묘한 구조를 뜯어보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그렇게 동분서주하다보니 이상하게 보였던 스투파의 전체적인 구조는 의외로 단순한 것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단(基壇), 탑신(塔身), 상륜부(相輪部)로 구성된 일반적인 탑의 기본 구조는 우리의 그것과 같다는 말이다.

다만 기단이 사각형이 아니라 원형이라는 점, 거대한 반구형의 복발(覆鉢)이 비신(碑身)을 대신하고 있고 그 위에 치장용 산개(傘蓋)가 세워져 있다는 점과 원형 울타리〔欄楯〕안으로 내부순환로가 나 있고 그 울타리 사이로 대문이 나 있는 점 등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니까 산치형의 스투파는 북인도를 거쳐 중국대륙으로 전파 과정에서 기단부가 점차로 사각형으로 변하며 강조되는 동시에 복발 부분이 축소 변형되어 상륜부로 변하는 과정을 겪었지만 전체구조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것이었다. 다만 무엇보다도 스투파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와 그 사이로 난 대문은 특이하였는데 정확한 방위에 따라 배치되어 있는 4개의 대문은 스와스티카(Swastika, 卍字)를 구조로 하고 있었다.

이런 일반적인 ‘스투파변천사’ 보다도 나그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티벳불교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는, 성지를 도는 순례로, 즉 ‘꼬라(Kora)’- ‘안쪽꼬라와 바같꼬라’- 의 개념이 여기에서 이미 실용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산치대탑의 가운데 복발은 바로 우주의 중심 산인 수메루(Sumeru), 즉 카이라스를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또 하나의 화두가 가슴속으로 들어앉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이한 형식보다 이 산치스투파가 세계적인 이유는 그 돌 위에 새겨진 조각품의 아름다움에 있다. 특히 울타리 사이로 난, 두 기둥과 대들보로 이루어진 4개의 대문에 새겨져 있는 조각은 가히 석공예의 극치였다. 그 중에서 북문이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였다. 그것들은 기원전의 작품들로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하였다. 예를 들면 붉은 빛이 감도는 사암(砂岩) 위에 반양각(半陽刻)기법으로 새겨진 천녀의 자태는 윤기 있는 피부를 가진 풍만한, 요새말로 색시한 여인의 관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고 기둥을 받치고 있는 사자들 또한 금방이라도 포효할 듯 하였다.

돌 위에 새겨진 내용들은 붓다의 일생과 전생도인 ‘자타카(Jataka)’가 주제를 이루고 있지만, 붓다의 유촉이 지켜지던, 초기 무불상(無佛像)시대를 상징하는 내용들-연꽃·보리수·법륜·족적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붓다의 존재와 가르침을 암시하고 있었다.

우거진 키니나무 그늘에 반쯤 가린 남문 앞에는 예의 아쇼카 왕 석주가 부서진 채 누워 있었는데 원래 그 위에서 포효하던 사자들은 현재 아래의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하고 있다. 이를 보면 대탑의 정문은 현재의 북문이 아니고 남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산치의 유적군은 원래 아쇼카가 붓다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시작하여 그후에 중축되면서 모두 8기의 스투파와 45개의 사원이 세워졌다고는 하나 20세기초에 발굴되어 현재 정리된 것은 모두 3기의 탑과 부셔진 석주 그리고 넓은 건물터와 그리스풍의 기둥들뿐이다. 언덕 입구의 스투파는 규모는 좀 작지만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의 사리를 안치한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탑문의 품격은 마하 스투파의 것에 뒤지지 않았다. 가장 작고 고졸미가 돗보이는 또 다른 스투파는 언덕 아래에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그 곳으로 내려가는 고색창연한 돌길의 양편으로는 붉은 주황빛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큰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고 그 가지에는 새떼들이 줄지어 앉아 지절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