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수행자다워야

|우리스님|/팔공산 동화사 지성 스님

2007-10-01     관리자


여느 해보다 무더운 여름! 장마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오전 10시부터 연일 계속되는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棟華寺, http://www.donghwasa.net)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는 삼복더위도, 거센 빗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열기가 날로 더해지고 있다.
지난 7월 20일 입제(10월 27일 회향)를 시작으로 100일간 100분의 고승대덕이 초청되는 법석에는 1000여 명의 대중들이 매일 운집하여 감로법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기 493년 극달(極達) 화상에 의해 팔공산 남쪽에 세워진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 대사께서 승군을 지휘, 왜병을 무찌르며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어 호국의 간성으로 나라를 구하는 데 일선에 섰던 도량이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에 밀려 남하하는 국군과 유엔군이 팔공산 기슭 다부동 전투에서 필사의 방어로 그 이남을 사수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9·28 서울 수복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면면히 이 조국을 유지케 해주신 호국 충의 열사와 호국 영령들과 선망 조상님들과 유주무주 고혼들을 지극정성으로 천도하여 사바와 법계가 법열에 들게 하고, 민족 화해와 조국 통일, 그리고 이 시대 우리 모두가 풀어야 할 난제 중의 난제인 교통안전을 기원하는 백고좌법회를 열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때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호국이라고 해서 꼭 승병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가서 싸워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토청정과 인간완성의 이념 실현이 될 수 있는 불교철학으로 국민사상을 향도할 수 있는 확고한 사상적·신앙적인 지도정신이 호국불교의 이념인 것이지요.”

전통적인 수행가풍 진작과 포교의 활성화
지난 6월 3일 동화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지성(63세) 스님은 단임(單任)을 선언하며 화합승단을 구축, 문중의 화합과 동화사가 수행도량으로 거듭나며 대구 경북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고자 원을 세웠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연임하려는 데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되고 화합이 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지로서의 소임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재임하면서 해야 할 만큼의 일을 단임기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하면 그뿐인 것이지요.”
선거 전만 하더라도 사실 스님이 주지가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능성도 10%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은 통한다고 했던가. 원력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이번 기회에 또 한 번 직접 실감하게 되었다. ‘나’가 없어지고 보면 일은 될 대로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었다.
100개가 넘는 동화사 말사스님들을 직접 한 분 한 분 만나면서 그 분들의 진솔한 여망을 직접 듣게 되었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좀더 분명해진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항상 귀를 활짝 열어두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모든 것을 양보하다 보면 화합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그 동안 동화사가 외형적인 불사에 치중해왔다면 앞으로는 우리의 전통적인 수행가풍을 진작시키고 포교의 활성화를 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선맥이 살아 숨쉬는 동화사 금당선원은 근세 경허 스님을 비롯하여 향곡 스님과 구산, 금오 스님과 최근 진제(금당선원 조실) 스님에 이르기까지 그 선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어 다행스럽습니다. 그런데 협소한 공간에 그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강원은 활성화를 위해 우선 학사부터 건립할 계획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수행자의 본분을 항상 생각하신다는 스님의 출가 수행담이 궁금했다.
스님께서는 토굴 수행 중 여백에 쓴 것이라며 책을 한 권 건네주신다.

화두를 놓치면 그것이 중생의 길
1958년 출가 당시 동화사에는 설석우 노스님이 조실로 계셨다. 행자시절 스님의 시봉을 들며 『초발심자경문』과 『금강경』 『육조단경』을 배우게 된 것은 생각할수록 크나큰 지복이 아닐 수 없었다.
1955년 불교정화 이후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받으시기도 한 석우 노스님은 유불선 삼도에 두루 통달하시고 선의 묘의를 깨달아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에서 자적하고 계신 분으로 방에 홀로 계실 때에나 제자를 제접하실 때에도 몸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누워계신 적이 없이 항상 앉아서 정진하셨다.
선요(禪要)에 ‘칠표파단(七票破團)’이라는 말이 있다. 앉아서 좌복 일곱 개가 구멍이 나고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져도 신심은 호리도 동요하지 말고 참구에 참구를 거듭해야 삼매에 들 수 있다는 말이다.
어느 날 목욕을 거들어드리던 중 노스님의 엉덩이에 굳은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엉덩뼈에 시커멓게 굳은살이 달라붙어 있었다. 수천 마디의 설법보다도 더 깊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또한 금당선원의 입승이신 지월 스님은 인욕보살의 화현으로 널리 칭송을 받는 분이셨다. 늘 하심(下心)하시며 갓 절문에 들어온 행자들에게도 꼭 경어를 쓰셨으며 화내는 일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다. 스님 앞에 서면 모든 잡념이 없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며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오곤 했다. 스님께서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 일초도 화두를 잊어서는 안 되는 일, 화두를 놓으면 바로 그것이 중생의 길이라.”고 늘 말씀하시곤 하셨다.
동화사에서의 1년간의 행자생활은 신심이 내면 깊이 뿌리내려 신심의 주춧돌이 되었고, 훗날 두고두고 참으로 값진 정진의 밑거름이 되어 절대적인 인생좌표가 되었다.
출세간의 사문이 되어 바랑을 걸머지고 길을 나서니 발자국 한 걸음 한 걸음이 쩌렁쩌렁 팔공산을 울리는 것 같았다.
울진서 70리 길은 족히 걸어서 들어가야 했던(당시에는 차가 다니지 않았음) 불영사에는 은사이신 혜진 스님을 비롯하여 금담 스님, 비룡 스님 등 한국 당대의 최고 선지식들이 웅거하며 가행정진을 하고 계셨다.
이 세 분의 정진력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주무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장좌불와, 등을 바닥에 대지 않고 피나는 정진에 정진을 계속해가고 계셨다.
사십대를 지나 오십대를 바라보는 장년의 스님들의 피나는 정진을 보며 열 번 스무 번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 길을 걷겠노라. 이 생명 바치고 또 바치더라도 대각을 이루겠노라고 굳은 심지를 돋웠다.

출가수행자는 출가수행자다워야
선객(禪客)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토굴생활을 그려보지 않던가. 불영사 선방을 나와 지리산 토굴생활을 위해 길을 떠날 때 은사스님께서는 산문 밖까지 배웅해 주시며 품속에 간직하고 계시던 회중시계를 꺼내 주시며 하신 말씀은 지금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다.
“토굴은 사중생활과 달라 아무런 제약이 없는 곳이니 투철한 신심과 발심이 없는 수좌는 타락하기가 십중팔구일세. 나태와 해이가 찾아올 때마다 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듯 간단없이 정진하길 바라네.”
시계는 일정한 시간을 두고 태엽을 감아야 하듯 일정한 시간을 두고 육체적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시며 시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래서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간까지 정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수좌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토굴생활은 결코 낭만으로 시작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극도로 절제된 무제약의 제약을 극복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극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화두를 잡고 여명을 맞이할 수 있는 부단한 정진력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안일이나 나태의 온상에 오히려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때론 생명과도 맞바꾸어야 할만큼 뼈를 깎는 인고와 절망을 순간순간 만나야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현상계와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내심의 갈등과 번뇌를 방기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도 합니다.” 해발 1천 미터의 깊은 산중 민가와는 20리 길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한겨울에는 눈을 녹여 식수로 써야하는 엄동설한을 보내며 극도의 영양실조에 걸리기도 했지만 몇 번인가 정신적으로는 값진 승화를 맛보기도 했다.
스님은 ‘∼다운’ 것을 가장 좋아한다. “중은 중다워야 한다.” 다행히 좋은 선지식들이 계셨기에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출가자의 삶이며 면모인지도 직접 보았고, 법명인 지성(知性)! 본래 성품을 안다. 본래 성품이 무엇인가? 궁금증이 없어진 지는 오래다.
“우리의 옛 주지스님들이 주지소임을 사시면서도 수행자로서의 풍모를 그대로 지니고 계셨듯이 스님 또한 푸근한 모습으로 대중을 아우르시는 모습이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본래의 뜻을 살리고 사심이 없으신 모습이 수행자의 모습 그대로”라고 지환(금당선원장) 스님은 잠깐 귀뜸하신다.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가리
동화사는 스님의 출가본사이기에 남다른 애정과 꿈이 있었다. 다른 교구본사들이 거의 단일문중이지만 동화사는 다문중(多門衆) 간의 갈등과 이합집산으로 승가화합이 무엇보다 절실했기에 그만큼 주지소임을 맡게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신의 인생 좌우명대로 인욕하고 양보하며 화합을 무엇보다 우선시 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신라 고려불교를 통한 영남인들의 밑바탕은 불심으로 가득 차 있으나 20년 이상 포교와 대사회적인 복지에 등한시하고 소홀히 한 채 침체되어왔기에 신도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왔습니다.
이번 주지소임을 맡게 되는 과정 중 그 분들의 말을 귀담아 듣다 보니 저까지도 몸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뜻 있는 분들의 여망을 저버리지 않아야지요. 중원인 이곳의 불교가 제대로 활성화되어야 한국불교도 다시 깨어나리라 봅니다.” 수행공간으로서의 동화사의 면모를 새롭게 하며 지역 포교와 복지를 위해 여러 가지 구체적인 복안들이 있지만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렇게 소리없이 조용조용 전개해나갈 것이며,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이 산문을 들어왔듯이 나갈 때도 또한 그러할 것이라는 우리 스님, 지성 스님! 불법 만난 것을 누구보다도 고맙게 여기며 기쁘게 살아간다는 스님은 쓸 데 없는 일로 혼잡스러운 것을 경계하며 단순명료함을 좋아하시고, 바쁜 중에도 여유와 한가로움을 잃지 않으신 채 맑은 물처럼 담담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