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16.영혼의 석굴 엘로라(Ellora)

신왕오천축국전 별곡 16

2007-10-01     김규현

천년의 침묵

남천축의 수도였던 나시크에서 혜초의 흔적을 확인한 ‘해동의 나그네’는 목적을 달성한지라 발걸음을 다시 북으로 돌려 엘로라로 향했다. 물론 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멀지 않은 곳에 인도 최대의 도시인 뭄바이(Mumbai)와 몇몇 석굴사원들이 있고 또한 뿌나(Poona)에는 유명한 ‘라즈니쉬의 아쉬람(O.R. Ashram)’ 본부가 있기에 일정만 넉넉하다면 마땅히 들려야만 할 곳이었다.

지나간 7, 80년대, 열풍같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간 ‘라즈니쉬 신드롬’에 영혼이 뜨거워지지 않았던 젊음이 어디 있었으랴만, 물론 필자도 그 열병을 앓았던 사람 중에 하나이기에 한번은 그 후의 라즈니쉬 열풍의 현주소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엘로라와 아잔타의 부름 소리가 더욱 강렬했기에 잠시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에 내린 시각은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이 도시는 한 때 무굴제국의 수도였기에 볼 만한 이슬람의 유적들이 많았지만 오늘날 대개의 여행자가 이곳에 들르는 목적은 엘로라와 아잔타를 가기 위해서다.

역전에서 뜨거운 ‘짜이(茶)’로 목을 축이고 있으려니 마침 엘로라로 가는 미니버스가 호객을 하고 있어 우선 올라타고 보았다. 뭐 두 석굴의 순서가 바뀌어도 무방했기 때문이었다. 목적지가 가까워 오면서, 정말 오래 전, 외국의 자료가 귀했던 시절, 어렵게 구해 본 화보에서 엘로라를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이 새삼 되살아났다. 그 어둠 속에는 수많은 고혼(孤魂)들이 떠돌면서 천년 동안이나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던 환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해동의 나그네’가 엘로라에 꼭 와야만 했던 이유는 단지 유명한 석굴이기에, 화가로서의 의무로 걸작품이나 감상하기 위한 것 이외에도 ‘카일라스 산의 신비’를 풀기 위해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첫째 이유는 엘로라가 혜초의 체취가 묻어 있는, 그 석굴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티베트 고원에 솟아 있는 카일라스 산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바로 그 석굴이기 때문이었다.

인도 우주론의 스메루(Smeru), 즉 한역 경전 속의 수미산(須彌山)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진 이 카일라스 산은 힌두이즘에서는 쉬바(Shiva)신의 거처로 인식되고 있는 신화적 산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산에서 힌두교를 비롯한 4대 종교와 갠지스를 비롯한 4대 강이 시작할 정도로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사실 필자는 그 동안 무언지도 모르는 그 정체 모를 흡인력에 끌려서 이미 여러 번이나 그 산을 다녀온 바 있고 누구보다도 그 산을 잘 알고 나아가 숭배한다고 자부하고 있기에 이 산의 축소판이라는 카일라샤 사원은 마땅히 들러야 할 곳이다. 이후에 독자 제위를 위해서 필설로는 그려내기 어려운 이 신비로운 산의 의미를 새겨볼 기회가 있겠지만, 지금은 우선 천년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급하리라….

엘로라의 백미인, 제16호 카일라샤(Kailasha) 석굴

엘로라는 야트막한 바위산 중턱에 긴 허리띠처럼 2km에 걸쳐 있어서 탁 트인 전망을 갖고 있다. 7세기 초에서 9세기에 걸쳐 조성된 이 석굴군(群)은 아잔타 전체가 불교적이고 벽화로 유명한 데 반해 엘로라는 조성시기 순서로 불교 12개, 힌두교 16개, 자이나교 5개로 나누어져 있고 벽화보다는 웅장한 석조품이 일품이다. 아잔타가 감추어진 모양새라면 이 석굴은 인도대륙에 뿌리를 굳건히 내린 힌두이즘처럼 당당히 그 몸체를 드러내고 있는 차이가 있다.

그 중심 부분에 카일라샤는 하늘을 이고 있었다. 여기서 ‘하늘을 이고 있다’라는 표현은 주위의 다른 석굴과는 구조와 그 제작공법이 다르다는 말인데, 대개의 인도 석굴이 수직의 바위를 옆면에서 파고 들어가 기둥과 조각상을 남기고 천장과 바닥을 만들어 사원을 조성한 것에 비해 이 16호굴은 거대한 하나의 바위를 위에서부터 쪼아 내려오면서 조각상과 기둥 그리고 위층의 천정·바닥을 만들고 다시 그 아래층의 천정·바닥·회랑·광장을 만드는 식의 공법을 사용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카일라샤는 석굴식으로 쪼아서 만들었지만 땅에서부터 쌓아올린 일반사원과 같이 하늘을 이고 있는 상태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석굴은 온통 섬세한 조각으로 뒤덮인 ‘통체(統體) 조각품이면서 또한 독립된 빌딩’인 것이다.

이 석굴은 라쉬트라쿠타 왕조가 7천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150여 년간에 걸쳐 만들었는데, 높이가 33m, 넓이가 40×80㎡나 된다. 계산에 의하면 이곳에서 파낸 부스러기 돌만도 20만 톤이나 되었다고 수치상으로는 설명하고 있지만 이 거대한 사원이 하나의 바위를 쪼아내어 만들어졌다는 것을 누가 선뜻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경전상의 말처럼 ‘불가사의(不可思議)’ 그 자체였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이 밀려왔다. 이어서 이상한 냄새도 따라서 밀려왔다. 무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그 냄새는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역한 냄새였다. 그것은 천년이란 시간이 훈제된 그런 냄새였다. 어둠 속에서 떠돌고 있을 수많은 영혼의 냄새였다. 잠시 어둠과 냄새에 적응하기 위해 단전에 힘을 가해 가만히 ‘옴(Aum)’ 만트라(Mantra)를 외우자 역시 영혼들의 화답이 돌아왔다.

중앙 광장으로 나가자 밝은 하늘이 보였다. 참았던 숨을 내쉬고 찬란한 남국의 햇살을 마음껏 들이마신 다음 중앙 광장을 둘러싼 ‘ㅁ’자의 회랑을 한 바퀴 돌면서 거대한 코끼리 석상을 비롯한 수많은 힌두신상들과 돌기둥을 돌아보려니 그 정교한 솜씨와 물량에 기가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좌우로 갈라진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드디어 2층 중앙에 큰 강당만한 신전이 나타났다. 바로 그 곳이 내가 확인하고 싶어했던 이 사원의 은밀한 핵심 부분이었다.

역시 그 가운데는 이 사원의 주인이며 또한 이 산의 주신인 쉬바가 거대한 ‘링가(Lingga, 男根)’ 형상으로 ‘요니(Yoni, 女陰)’ 위에 삽입되어 있는 형태로 서 있었다. 바로 카일라스 산이 마나사로바 호수에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발기된 남근’ 모양 그대로였다. ‘창조의 에너지’로서의 이 산을 그대로 이미지화한 것이리라. ‘요니’는 맷돌형으로 만들어져 한 옆이 터져 있는데 그 곳으로 쉬바신과 여성 배우자인 사크티(Sakti)에 의해 생산된 창조의 정액이 흘러서 온 세상에 골고루 공급되고 있었다. 그 정액은 바로 인도 민족의 생명수, 즉 이 성산에서 발원하는 갠지스였다.

처음에는 어둠에 눈이 익지 않아서 보지 못했지만 관리인의 은근한 손짓과 조명에 이끌려 그가 가리키는 천장과 벽을 보니 천연색의 벽화가 있었는데 에로틱한 합환상(合歡像)인 미투나(Maituna)상이 숨어 있었다. 우리가 속칭 밀교(密敎)라고 부르는 딴트리즘(Tantrism)의 영향이 농후한 그림들이었다.

사실 인도에 발을 들여놓은 이방인들이 의아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런 것들인데, 왜 신성한 종교적 상징물에 난잡하게 보이는 성애(性愛)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복잡다단한 힌두이즘을 이해가 가게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후일로 미루지만, 꼭 그것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단지 한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가슴으로 그 많은 신들을 받아들이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혜초도 밀교승이었다’는 명제 속에서 말이다.

16호 굴을 나오자 걱정거리가 생겼다. 34여 개의 석굴군 중에서, 이제 겨우 하나만 보았을 뿐인데 해가 벌써 중천을 넘기고 있으니 어느 시절에 이 엄청난 석굴들을 다 볼 것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해동의 나그네’가 누구인가? 해동 최초의, ‘배낭족의 원조’인 혜초 스님의 후예가 아닌가 말이다. 본전 그 이상을 무조건 뽑아야 아까운 달러를 써가며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을 것이 아닌가? ‘오늘 다 못 보면 내일 다시 보면 될 것이 아니더냐?’ 하는 오기가 솟아 생수병과 밀떡 ‘짜파티’ 몇 개를 싸들고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