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의 복음(福音)과 십자가

특집/채식

2007-10-01     관리자

바닷가에서 자라 해물을 자주 구경하긴 했지만, 어렸을 적 밥상은 주로 채식이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느라 도시로 유학 나오면서, 우리의 경제수준 향상과 함께 식단이 어느새 살생의 피비린내로 오염되는 줄도 모르고, 나의 영육(靈肉)도 가랑비에 속옷 젖듯 업장이 두터워만 갔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조교업무를 겸하면서, 과욕과 무절제로 드디어 발병한 만성간염은 엄청난 경종과 시련으로 다가왔다. 그 즈음 송광사 수련대회에 참석할 인연도 닿아, 고요한 심령의 참선과 함께 정갈한 순수채식공양의 묘미를 비로소 새롭게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운은 4박 5일 출가에서 환속한 뒤 길어야 한 달도 채 이어지지 않았다.
아아! 채식공양을 식생활의 기본원칙으로 자각(自覺)하여 본격 실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박사과정 진학 후 어떻게 인연이 닿아 (하늘의 안배와 불보살님의 인도이시리라!) 유학하게 된 대만에서, 예정된 3년의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놓고 죽지 않으려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수행도량에서였다.
채식의 복음(福音)에 비로소 영혼의 귀가 뜨인 기연(機緣)은 죽음의 문턱에서, 그것도 이역만리 대만 땅에서, 유불선(儒佛仙) 합일적인 종교수행의 법문과 함께 맞이하였다. 나면서부터 주어진 따분하고 미지근하던 모태신앙이 상당한 방황과 시험을 거쳐 마침내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자아신앙으로 환골탈태(換骨脫胎)했다고나 할까?
7년쯤 뒤 간디 자서전을 읽어 알았지만, 말 그대로 철저한 채식의 모태신앙에서 자란 간디도 나중에 영국 유학 가서 채식의 원리와 이상을 새롭게 자각하고 종신서원을 세워 실행하였단다.
여하튼 처음 시작할 때, 완전채식이 수행의 필수조건으로 엄격히 요구된 것은 아니었지만, 도량에서는 채식을 한다는 규칙(계율)에 따라, 이왕이면 채식도 함께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아예 한 학기 수업과 책을 모두 내려놓고 도량에서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채식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도량에서는 우유와 함께 계란은 허용하는 가장 느슨한 채식을 채택했기에, 나도 처음에는 거기에 따랐다.
시련은 귀국과 함께 닥쳤다. 나의 살던 고국은, 얼른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는 나의 수행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 채, 당장 눈에 띄는 식생활의 변화에 대해서 너무도 민감하고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자친께서는 본능적으로 자식의 건강을 염려하고 나섰고, 형제와 친지,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함께 밥 먹기 어려운 불편함과 언제 자기 곁(세속)을 떠나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불안함, 그리고 ‘지가 뭔데 바로 도인이 되겠다는 거야?’ 하는 식의 비아냥과 시기질투가 복합된 심리반응을 점차 강하게 드러냈다.
도가 높아지면 마장도 따라서 더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一丈)더니, 달리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상대적인 역풍도 더 거세지는 법. 귀국 후 박사과정 복학해 수료할 때까지 학교에 나갈 때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파·마늘도 안 먹는 데다가 대만서 3년간 고춧가루를 안 먹는 데 습관이 들어버려, 밖에서 반찬을 아무리 잘 골라 가려먹어도 그 매운맛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심지어 지도교수님의 식사초대도 사양하였다. 수업이나 특별한 볼일이 없는 날은 아예 학교에 안 나가고, 나가는 경우도 되도록 식사시간을 피해 다녔다. 처음에는 인사상 어쩌다 좀 중요한 회식에 동석은 했는데, 박사수료 후에는 논문 쓴다고 아예 두문불출하다시피 했다. 규칙적으로 관악산에 운동 삼아 오르내리는 일 이외에는, 집에서 잠자고 밥 먹고 글 쓰고 쉬다가 수행하는 것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수행하다 보면 시련은 으레 가장 가까운 데서 가장 크고 강하게 닥치는 법이다. 하긴 남이야 내가 죽을 쑤든 풀을 쑤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좋게 말하면 나한테 사랑과 관심을 가진 분들이, 달리 말하면 나한테 기대와 애착을 가진 분들이 나의 세속 이탈적 성향에 염려하고 간섭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사적인 감정(人情)을 갈고 닦아 천지자연의 진리와 도덕(天理, 天道)에 합치하게 대승적인 자비(慈悲)로 승화시키는 과정이 바로 수행의 본래 모습이리라.
공부 잘해 서울 법대 들어갈 때만 해도, 사법시험 합격해서 검판사 되어 출세하고 집안을 번창시키길 열렬히 기대했는데, 고시도 포기하고 교수한다고 대학원 가서 유학까지 가더니만, 아니 대만에 갔다 오더니 사람이 완전 딴판이 되어 이제 자칫하면 박사도 교수도 팽개치고 출가 수행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런 우려를 용케도 누르고 일단 박사도 따고 7년 가뭄 기다려 교수자리도 얻었다.
그간 채식과 수행 때문에 겪은 고초를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리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식사 때마다 크고 작은 고난의 십자가가 나를 따라다니며 영혼을 짓눌렀다. 박사논문 심사 때는 지도교수님의 배려로 학교 안에서 간단히 두 차례 점심대접으로 떼웠는데, 내가 동석은 하였으나 심사위원들 식사하시는 걸 지켜만 보았으니, 참으로 전무후무할 진풍경이었으리라. 귀국 직후 법제연구원 자리가 나서 추천 받았는데, 채식과 수행의 기초가 잡히기 전 세속사회에 적응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박사논문 준비에 전념하겠다는 핑계로 사양했다.
그리고 시간강의도 전혀 하지 않았다. 박사학위 받고 2년 반 만에 모교에 자리가 났으나, 우여곡절 끝에 응모해 두 차례 계속 밀려났다. 삼세인과로 따지면, 아마도 내가 전생에 큰 빚이나 죄를 졌든지, 아니면 모교 교수자리에 앉을 만한 복덕을 쌓지 못했든지 둘 중의 하나겠지만; 현세의 인과로만 따지면, 채식과 수행으로 말미암은 세속 인간관계(人和)의 실패가 주요인이리라.
그래도 나는 채식의 신념을 굽히거나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채식은 분명 청정한 수행의 필수요건이고, 그 자체가 수행의 중요한 핵심이라고 믿는다.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수행에서 남들처럼 크게 깨닫거나 한 소식 얻은 것이 전혀 없기에, 단지 13년째로 접어든 채식원칙과 약간의 복덕 인연을 짓기 위해 번역한 중국 고승대덕의 법문만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수행자의 천국이라는 대만처럼, 우리도 얼른 채식이 보편화되고 순 채식 인구와 순 채식 식당이 많아지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대학에 나다니기 시작한 지금도 기꺼이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해 혼자 조촐히 점심 드는 걸 즐기고 있다. 간디의 말씀처럼, 진정한 맛은 혀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다.(간디의 채식주의에 관해서는 대한변협 ‘인권과 정의’ 올해 6월 호에 글을 실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