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도량 지리산에 앉아계신 오백 나한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지리산 웅석봉 지곡사(智谷寺), 심적사(深寂寺)

2007-10-01     관리자

백두산 에서 뻗어 내린 큰 산줄기가 지리산에 이르러 드디어 머리를 들어올린다. 천왕봉(天王峰 1,915m)이 하늘을 향했다면 웅석봉(熊石峰 1,099m)은 그 처음을 돌아보는 찰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끝자락이자 또 다른 시작이다.
허리께부터 가로막힌 백두대간이기에 금강산 아래 건봉사부터 내려왔는데 손꼽아 보니 17번째다. 대간에 깃든 사찰이 어디 그뿐이랴. 하지만 한 곳 한 곳 부처님을 뵙자면 그 오랜 세월을 감당치 못할 터이고 또 대간의 이름난 사찰에는 앞선 발걸음이 있었으니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성큼성큼 내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예 서고 보니 별안간 저기 저 허리 위 대간의 큰 머리 곁으로 눈이 가닿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단군신화에 깃든 웅녀의 이야기를 여기 곰바우산(웅석봉)에서 떠올린 억측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데 없는 끝자락에 서서는 대간을 걸어오면서 들었던 등 뒤 저쪽 대간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쯤 저 꽉 조인 허리띠를 풀고 떡벌어진 대간의 가슴팍이며 검게 그을린 그 얼굴들을 더듬어 볼 수 있을까. 오늘밤 백두산 장군봉에 오르는 기막힌 꿈이라도 꾸어야 하겠다.
백두대간의 이녘 끝은 어디일까. 물론 하늘과 맞닿은 지리산 천왕봉이 틀림없다. 하지만 노고단에서 천왕봉만을 지리산으로 부른다면 이는 옛사람들의 눈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추파(秋波, 泓宥 1718∼1774) 대사의 『추파집(秋波集)』 「유산음지곡사기(遊山陰智谷寺記)」에도 “지리산의 한 가지가 구불구불 동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린 봉우리 아래 지곡사(智谷寺)가 있다.”고 하였다. 천왕봉에서 북동쪽으로 중봉과 하봉을 넘어 동으로 왕등재와 밤머리재를 지나면 바로 웅석봉이 버티고 섰고 그 아래 지곡사가 있으니 옛사람들의 눈에 비친 지리산의 너른 품을 짐작할 수 있다.
산청에서 웅석봉을 향해 들어가다 보면 그 웅장함 때문에 놀라게 되는데, 웅석봉은 그렇게 백두대간의 끝자락이 아쉽다는 듯 산청읍을 감싸고 지리산을 막아서듯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웅석봉은 지리산이 달려온 길을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산이기도 하다.
지곡사 가는 길가 밭 한쪽에는 “무지개를 걸어놓은 듯한 다리” 세진교(洗塵橋)의 옛 빗돌이 서 있다.
구름과 비가 걷히고 그 위에 올라 보면 물과 하늘이 한 빛으로 생각의 티끌마저도 씻어낼 만큼 멋진 풍광을 자랑했음이 앞 사기(寺記)의 기록에 분명한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니 그 아쉬움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이 빗돌만이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으리라.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지곡사는 한때 승려가 300명에 달했고 물방앗간이 12개나 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전해지지 않는데 고려시대에 혜월(慧月)과 진관(眞觀)이 머무르면서 큰절의 면모를 유지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다만 추파의 「지곡사청련당기(智谷寺靑蓮堂記)」에 “터를 열어온 지 수천년(蓋自開基以來 歷千載 至于今)”이라거나 「지곡사용화당기(智谷寺龍華堂記)」에 “선종고가람이 있으니 즉 신라 법흥왕 때 건립되어 천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라는 기록으로 지곡사의 건립시기를 어림해 볼 수 있다.
더불어 「유산음지곡사기」에 대웅전, 약사전 등의 전각들과 심적(深寂)·영당(影堂)·적조(寂照)·나한(羅漢)·태자(太子)·서운(瑞雲)암 등 당시까지 남아 있던 산내 암자들을 일러주고 있으니 찾을 길 없는 모습을 더듬는데 옛기록의 고마움이 이토록 절실하다.
현재 지곡사의 옛터는 창원문화재연구소 등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데 얼핏 드러난 법당 터며 주초석, 석재 등이 과연 지곡사의 융창했을 규모를 실감케 해준다.
그 곁에 근대에 지어진 지곡사 역시 도량을 정비하는 불사가 한창이다. 일꾼들 속에 계신 스님께 인사를 드리니 바쁜 와중에도 주지 지담 스님께서 직접 재배하여 제다까지 한 녹차를 내주시는데 그 맛 또한 일품이다.
심적사는 지곡사에서 넉넉잡고 걸어도 한두 시간은 올라야 할 높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청문화원에서 펴낸 『산청지명고(山淸地名考)』나 『산청향맥(山淸鄕脈)』 등에는 신라 경순왕 3년(929)에 창건하여 인조 7년(1630)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추파 홍유 스님의 「산음심적암기(山陰深寂庵記)」는 앞의 「유산음지곡사기」보다도 더 상세하게 심적암의 모습을 밝혀주고 있어 흥미롭다.
이 기록에는 당시의 스님들이 공부하고 좌선만 할 뿐 쓰러져 가는 당우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음에 가람을 여법하게 지키는 것 또한 부처님을 받드는 것이요, 나라를 돕는 것이라는 홍유 스님의 목소리가 담겨 있어 스님의 면모를 짐작케 준다. 이어 광해군 2년(1610) 운일(雲日) 스님의 심적암 창건 이후 설암(雪巖)·이암(怡巖)·설봉(雪峰) 스님 등의 중건과 중수를 밝히고 있는데 영조 25년(1749) 여름에는 자신과 한암(寒巖) 스님이 머물며 전각을 보수할 것을 계획하고 대중들의 의견을 모아 이듬해 전 통상(統相) 이언상(李彦祥) 시주로 중수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심적암의 규모가 산내 암자치고는 외롭지 않은 사세임을 알 수 있는데 융성했을 지곡사의 모습과 더불어 생각해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한가지 모를 일은 창건 시기의 혼동인데 지곡사의 창건 시기를 신라 법흥왕 대 또는 통일 신라시대로 본다면 심적암의 창건 역시 운일 스님의 창건보다는 상당히 앞서야 하지 않을까 싶다.
홍유 스님의 ‘심적암기’는 퇴락해 자취를 찾을 수 없었던 심적암 터에 새롭게 가람을 일구면서 기록한 제2 창건기가 아닐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홍유 스님이 입적한 후에 그 제자들이 스님의 영정을 이곳에 모실 정도 였다고 하니 심적암에 대한 스님의 애틋한 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던가 보다. ‘심적암기’의 꼼꼼한 역시 그 두터운 인연의 반영일 것이다.
옛날 지곡사에 300여 명의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때는 심적암, 나한암 등 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곡사 스님들은 그 동안 해온 공부도 시험해볼 겸 산내 9암자의 스님들과 줄다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그런데 산내 암자 스님들은 지곡사 300여 명 스님들 모두와 시합을 하자는 게 아닌가. 드디어 시합 날, 산내 암자쪽으로 이어진 줄과 지곡사 300여 명 스님들이 잡고 있는 줄이 팽팽히 당겨졌다.
그런데 자신만만해 하던 지곡사 스님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줄이 점점 암자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 산내 암자 스님들이 줄다리기 시합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스님들이 마시는 산 속 장군샘의 물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물을 마시면 원기가 왕성해지고 무병장수한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샘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심적사(주지 법경 스님, 055-973-1769)에 오르니 멀리 바라보이는 산들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황매산이 눈앞이고 저 멀리는 가야산이리라.
심적사에는 최근 오백나한불이 조성되었다. 심적사 뒤 나한암에 계시던 나한님들을 한때 심적사에 모셨던 인연 때문이다. 이 나한님들은 강원도 어디에서 옮겨왔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데 지금은 6.25 동란을 피해 산청읍내의 심적사에 모셔진 후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조성된 심적사의 나한님들은 목아 박찬수 씨의 작품인데 지리산에 조성된 오백나한으로는 처음이다.
문수도량 지리산에 널리 중생의 원을 듣고 그 뜻을 이루게 해 주시는 오백 나한님이 앉아 계신다. 두손을 모으고 정성스레 기도 공양 드린다면 이제 지리산을 찾는 이들의 가슴 한켠에 묻어둔 소망 하나쯤은 거뜬히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