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오선사 어록철오 선사(徹悟禪師)의 간략한 전기

2007-10-01     관리자

선사의 휘(諱:본명)는 제성(際醒)이고, 자(字)는 철오(徹悟)이며, 또다른 자는 눌당(訥堂)인데, 별호(別號)는 몽동(夢東)이다. 북경 동쪽 하북성(河北省)의 풍윤현(豊潤縣) 사람으로, 속세의 성(姓)은 마(馬) 씨인데, 아버지의 휘는 만장(萬璋)이고, 어머니는 고(高) 씨였다.
선사는 어려서부터 특출하고 기이하였으며, 자라면서 책 읽기를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를 비롯한 여러 서적을 두루 열람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22살 때 큰 병을 앓으면서 허깨비 같은 육신이 덧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출가할 뜻을 품었다. 병이 낫자, 방산현〔(房山縣:본디 하북성에 속해 있었는데 1958년 北京市로 편입되었으며, 북경원인(北京猿人)과 산정동인(山頂洞人)의 화석이 발견되어 유명해진 주구점(周口店)이 있다.〕에 가서 삼성암(三聖庵)의 영지(榮池) 노스님에 귀의하여 삭발하고 출가하였다. 이듬해 수운사(岫雲寺)에 가서 항실(恒實) 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 다음해에는 향계사(香界寺)에서 융일(隆一) 법사가 원각경(圓覺經) 강의를 연다는 말을 듣고, 선사로 가서 참석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파헤치고 캐물으며 오묘한 뜻을 정밀하게 탐구하여, 마침내 원각경 전체의 요지를 깨달았다. 다시 증수사(增壽寺)의 혜안(慧岸) 법사에게 법상종(法相宗) 강의를 듣고 미묘한 요체를 얻었다. 그 뒤 심화사(心華寺)에 가서 편공( 空) 법사 아래에서 법화경(法華經)·능엄경(楞嚴經)·금강경(金剛經)등을 원만히 이해하고 단박 깨달아, 법성(法性)·법상(法相)의 2종(二宗)과 3관(三觀:天台宗의 空觀·假觀·中觀이 가장 보편스러운 학설임)과 10승(十乘)의 요지에 전혀 막힘 없이 두루 통달하였다.
건륭(乾隆: 淸나라 高宗 황제의 연호) 33년(戊子, 1768) 겨울, 광통〔廣通: 雲南省에 있던 옛날 현(縣)〕의 수여순(粹如純) 노옹(老翁)을 참방하여 향상(向上:선종에서 돈오의 지극한 곳을 일컫는 말)의 일을 밝히니, 스승과 제자의 도(道)가 딱 들어맞아 마침내 마음을 인가(印可)하였다. 바로 임제(臨濟)의 36세(世:代)이자, 경산(磬山)의 7세 법손(法孫)이 되었다.
건륭 38년(1773) 수옹(粹翁)께서 만수사(萬壽寺)로 옮겨 가시자. 선사가 그 뒤를 이어 광통에 주석(主席)하게 되었다. 대중을 거느리고 참선하며 후학들을 채찍질하고 격려하였는데, 14년을 하루처럼 조금도 피곤하거나 싫은 기색없이 부지런하였다. 그래서 그 명성이 남북으로 널리 퍼지고, 선종의 기풍이 크게 떨쳐졌다.
선사께서 매양 제자들에게 상기시킨 가르침은, 영명(永明) 연수(延壽) 선사께서 선종의 거장이시면서도, 오히려 마음을 정토(淨土)에 귀의하여 매일같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명호를 10만 번씩 염송함으로써 안양(安養: 極樂)국토에 왕생하길 발원하셨던 수행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 같은 말법 시대에 더더욱 받들어 따라야 할 게 아닌가 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마음을 정토에 깃들이고 연종(蓮宗:정토종)을 크게 주창하였다. 낮에 잠시 동안만 손님을 맞이하고, 그 시간 이외에는 오로지 부처님께 예배 올리며 염불을 지속할 따름이었다. 건륭 57년(1792) 각생사(覺生寺)로 옮겨 8년간 주지를 맡으면서는, 온통 폐허가 된 절을 죄다 일으켜 세웠다(百廢盡擧). 정업당(淨業堂) 외에 따로 세 당(堂)을 세웠으니, 열반당(涅槃堂)·안양당(安養堂)·학사당(學士堂)이 그것이다. 그래서 노인이나 병자(환자)가 의탁할 곳이 생겼고, 초학자(初學者)들이 독송이나 학습하기가 편리해졌다.
선사는 선종(禪宗)과 정토종(淨土宗)의 요지에 대하여 모두 정밀하고 심오한 부분까지 훤히 통달하였다. 자기를 다스림은 몹시도 엄격하였고, 남들을 대함은 몹시 간절하였으며, 법을 설하여 대중을 일깨우고 인도함은, 마치 감로수 병을 쏟아내고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듯 하였다.
대중과 더불어 정성껏 수행하여 연화정토종의 기풍이 크게 떨치자, 사방 원근에서 모두 그 교화를 우러러 따르고, 승가나 속가 모두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선사는 당시에 법문으로 최고 제일의 분이었다.
가경(嘉慶: 淸나라 仁宗 연호) 5년(1800), 선사는 홍라산(紅螺山) 자복사(資福寺)에 은거하여 조용히 한평생을 마치려 했다. 그러나 납자(衲子: 禪僧의 별칭, 본뜻은 頭陀行의 승복을 입은 자.) 대중 가운데 그를 흠모하고 존경하여 놓치지 않고 뒤따라 나서는 이들이 몹시도 많았다. 선사는 불법(佛法:진리)을 위하고 사람(중생)을 위해서라면, 마음에 조금도 싫어함이나 물림이 없었던지라, 마침내 다시 대중들을 받아 주어 함께 머물게 허락하자, 눈깜짝할 사이에 금세 총림이 이루어졌다.
땔감을 장만하고 물을 길어 나르며, 진흙을 이겨 집의 벽을 땜질 수리하고, 물 한 모금 마시거나 밥 한끼 공양을 들기까지, 모두 대중과 함께 똑 같이 생활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또다시 10년, 가경 15년(1810년) 2월에 만수사에 몸소 찾아가, 은사이신 수조사(粹祖師)의 부도탑을 참배하고, 여러 산사(山寺)를 돌봐주고 보호하는 재가 신도 대중(外護)들한테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다음과 같이 부촉하였다.
“허깨비 같은 세속 인연 길지 않으며, 인간 세상 참으로 덧없으니, 짧은 인생 허송 세월하면 안타깝기 그지 없소. 각자 모두들 마땅히 염불 공부에 노력해야 할지니, 그래서 앞으로 극락정토에서 서로 반갑게 만납시다.”
3월에 다시 산(홍라산 자복사)으로 되돌아와 당신의 다비에 필요한 물품을 미리 준비해 두도록 분부하였다. 10월 17일에는 대중들을 모두 불러모아 사원의 일들(院務)을 하나하나 당부한 뒤, 제자인 송천(松泉)스님한테 주지를 맡아 대중들을 잘 거느리라고 분부하면서, 이렇게 훈계하였다.
“염불 법문은 상중하 세 근기의 중생 모두가 진실한 이익을 얻고, 어떠한 근기나 인연도 두루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네. 내가 십여 년 동안 줄곧 대중과 함께 고심하고 고생하며 이 도량을 세운 까닭은, 본디 천하 사방에서 오는 사부 대중을 모두 맞이하여 함께 정토 염불 공부(淨業)를 열심히 닦기 위함이었네. 무릇 그 동안 내가 세운 규약과 법도는 영구히 준수해야 마땅하며, 함부로 뜯어 고치거나 바꾸어서는 안 되네. 그래서 이 노승이 대중과 함께 오랫동안 애쓰며 심혈을 기울여 온 당초 발원(기대)에 어긋나지 않길 바라네.”
입적하기 반달쯤 전에 몸에 가벼운 병세가 느껴지자, 선사는 허공중에 수없이 많은 깃발(幢幡)들이 서쪽으로부터 오는 모습이 보인다고 말하면서, 대중들한테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다 함께 염송해 달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는 대중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극락 정토에서 함께 만나세. 나는 곧 서방으로 돌아가려네.”
이에 대중들이 선사께 세상에 좀더 머무시도록 권청(勸請)을 드리자, 선사는 또 이렇게 답하였다.
“백년 인생이라고 해도 나그네처럼 잠시 붙어 사는 신세에, 어차피 언젠가는 되돌아가야 하는 법! 내가 성인의 경지(극락정토)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스승을 위해 다행으로 여기고 환송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붙잡으려고 애쓰는가?”
12월 16일에 감원(監院)의 책임자인 관일(貫一) 스님한테 열반재(涅槃齋)를 올리도록 분부하더니, 17일 신(申: 오후 3~5시)시에 대중들한테 작별 인사를 하였다.
“나는 어제 이미 문수·관음·대세지 세 보살님(大士)을 친견하였네. 오늘은 다시 부처님께서 친히 나투시어 나를 맞이하여 데려가시려고 오셨네. 나 이제 가네.”
대중들이 부처님 명호를 더욱 큰소리로 세차게 염송하는 가운데, 선사는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합장을 하신 뒤, 이렇게 말했다.
“위대하고 거룩한 명호(洪名: 나무아미타불)를 한 번 염송하면, 한 번 염불한 만큼의 부처님 상호(相好)를 친견한다네.”
그리고는 마침내 손을 미타인(彌陀印)으로 바꾸어 짓더니, 평안하고 상서롭게 서거(입적)하였다. 그 때 대중들은 공중에 특이한 향기가 가득 퍼짐을 냄새 맡았다. 입적하신 유해를 이레 동안 받들어 공양하는데도, 얼굴 모습이 마치 살아계신 듯 자애롭고 온화하며 생기가 가득 넘쳤다. 머리카락 흰색에서 검은 색으로 바뀌고, 빛과 윤기가 특이하고 비상하게 넘쳤다. 이칠(14)일에 감실(龕室:坐棺)에 모시고, 삼칠(21)일에 다비(茶毗:화장)를 봉행하자, 사리 백여 과가 나왔다. 이에 문하 제자들이 선사의 유촉을 받들어 영골(靈骨:신령스런 유골이라는 뜻으로, 舍利와 같은 말)을 보동탑(普同塔) 안에 안장하였다.
선사는 청나라 건륭(乾隆) 6년(1741) 10월 14일 미(未: 오후 1~3시)시에 태어나, 가경(嘉慶) 15년(1810) 12월 17일 신(申)시에 열반하였다. 세간 수명(世壽)으로는 70세이고, 출가 연령〔僧臘〕으로는 49세이며, 정식 비구 수행 연령〔法臘〕으로는 43세이다. 저서로는 선종·교종·율종에 관한 법문들과 염불가타(念佛伽陀)가 세상에 전한다.
가경 17년(1812) 임신(壬申)년 9월 기망(旣望:음력 16일)에 선사의 제자인 성총(惺聰) 스님이 선사의 행적 기록을 가지고 찾아와, 나한테 선사의 간략한 전기〔行狀〕를 적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 또한 선사와 서로 알고 지낸 지 여러 해 되었고, 평소 일깨움과 가르침을 받아 배우고 얻은 게 정말로 많다. 선사는 진실로 보통 사람을 훨씬 초월하는 분이다. 육근(六根)이 예리하게 통달하였고, 이해와 깨달음이 비상하게 뛰어났으며, 법문을 유창하게 설하는 변재를 갖춘 데다가, 엄격한 계율로 고행(苦行)까지 겸비하였는데, 수행의 기풍이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시종일관 청정하였다.
선사의 행실은 내가 눈으로 직접 본 바로서, 지금까지 적은 내용은 한 글자도 거짓이나 꾸밈이 끼어들지 않았다. 정말로 부끄럽게도, 나는 문장 짓는 솜씨가 전혀 없어서, 특별히 질박한 말로써 사실(알맹이)만 기술하여 믿음을 전할 따름인 것이다.

염화사에서 연화세계를
그리워(慕蓮)하며 두타 체관(體寬)
통신(通申)이 공경스럽게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