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13. 가야국 왕비의 고향, 아요디야

신왕오천축국전 별곡 13

2007-09-30     김규현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외가 고향

오늘 ‘해동의 나그네’의 발길은 아요디야로 향한다. 그 곳은 바로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首路王)의 왕비였던 허황옥(許黃玉)의 고향으로 비정되고 있는 곳이다. 6백만 김해 김씨와 허씨들의 외가인 셈이니, 그 방계에 속하는 혈통의 필자에게도 ‘외할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외에도 이 곳은, 비록 혜초의 기록에서는 언급이 없었지만 현장의 기록에 의하면 8세기 당시에는 대승불교의 중심지였기에 혜초의 발길이 닿았을 가능성도 있는 곳이고 또한 힌두이즘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서사시 「라마야나(Rama yana)」의 무대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도 ‘쌍어문(雙魚紋) 화두’를 풀기 위해서도, 반드시 가야만 했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목적지가 가까워오자 벅찬 기대감으로 가벼운 흥분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갠지스의 지류인 가가라(Ghaghara) 강 다리를 건너니 아요디야는 찬란한 오후의 역광 속에 들어 있었다. 역시 유서 깊은 고도답게 고색창연하면서 고즈넉하였다. 우선 강을 건너자마자 그럴듯한 건물로 무작정 달려갔다.

아! 정말, 거기 정말 곳곳에 쌍어문이 대문마다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바로 김해 수로왕릉(首路王陵)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일단 짐을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온 시가지를 돌아다녔지만 역시 집집마다 대문마다 심지어는 지나다니는 버스에까지도 ‘쌍어문’ 천지였다. 아! 『삼국유사』의 거짓말 같았던 기록대로, 정말로 아요디야는 고대 아유타국(阿踰陀國)이었던가? 허황옥은 정말로 2천년 전에 2만 5천리나 떨어진 한반도까지 시집을 와 김해 김씨와 허씨의 외할머니가 되었단 말인가?

자, 그럼 독자제위도 잠시 일손을 놓고 이 ‘해동의 나그네’를 따라 흥미진진한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때는 서기 42년 3월 초하루 신성한 제사 날, 장소는 경상도 김해 가라뫼[龜旨峰] 아래였다. 9개 부락의 추장[九干]들과 수백 명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늘굿[天祭]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하늘에서 상서로운 기운과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바로 이 곳이로다. 하늘이 명하시길 우리에게 이 곳에서 나라를 일으켜 임금이 되라 하셨으니 너희는 산꼭대기의 흙을 한 줌 파거라.”라고 하기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땅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약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하는 노래를 부르니 이윽고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드리우며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金盒)이 내려왔다.

열어보니 그 안에 ‘6개의 황금 알’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에 한 추장이 집으로 조심스럽게 가지고 돌아갔는데, 그런데 다음 날 그 알들은 늠름한 옥동자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나날이 자라면서 용모가 비상하게 변하였다. 이에 구간들과 백성들은 논의 끝에 그 중 먼저 나온 동자를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추대하게 되었다. 머리가 처음 나왔다 하여 ‘수로(首路)’라 하고 성을 ‘김씨’(金氏)라 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가락(駕洛)’ 또는 ‘가야(伽倻)’라 하니 바로 오늘날의 ‘6가야 연맹’의 시작이었다.

이른바 가야국 시조의 ‘천강난생(天降卵生)’ 신화다. 뭐 고대국가에서 시조를 ‘난생설’로 설화화한 예가 드문 것이 아니니 색다른 것이 없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6년 뒤 7월 27일 구간(九干)들이 왕을 찾아뵈면서 배필을 정할 것을 권하자 수로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강림한 것도 하늘의 명이었다. 따라서 나의 배필도 하늘이 점지하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갑자기 사람을 보내 작은 배와 말을 준비하여 망산도(望山島)라는 곳으로 가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했다. 이윽고 정말 붉은 빛깔의 돛을 달고 긴 깃발을 휘날리며 이상한 범선이 다가왔는데 그 안에는 범상치 않은 사람들 20여 명이 타고 있었다. 이런 연락을 받은 왕은, “자, 이는 내가 기다리던 일이다. 바로 하늘이 정한 나의 배필이 온 것이니 어서 가서 그들을 맞이하여라.” 하였다. 그리고 친히 나가 임시 궁궐을 지어놓고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허황옥은 이 때 비달치고개[綾峴]에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신령에게 고하는 의식을 치르고 왕이 기다리는 행궁으로 가서 왕과 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는 태양왕조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금년 5월 부왕과 모후가 말씀하시기를 간밤에 꿈에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가야국 왕은 하늘이 내린 신성한 사람이니 공주를 보내 배필을 삼게 하라고 하셨다기에 이에 저는 부모님 분부대로 배를 타고와 지금 용안을 감히 뵙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공주의 말을 듣고 난 수로왕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공주가 이렇게 올 줄 이미 알고 있었소. 그렇기 때문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하자는 청을 거절하고 이렇게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오. 이제 이렇게 아름답고 현숙한 그대를 보니 매우 반가울 뿐이오.” 하였다.

그리고는 둘은 함께 2박 3일의 합환씩(合歡式)을 치르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그 후 둘은 140여 년을 함께 살면서 아들 10명과 2명의 딸을 두었는데 둘째와 셋째에게 왕비와 같은 허씨 성을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쌍어문의 미스터리

위의 설화는 역사적 사실성의 문제만 아니라면 참으로 환상적인 한 편의 드라마틱한 로맨스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이성이라든가 학문이라는 이름 하에 분석을 하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여서 많은 파헤침이 진행되어 고고학적 가야사(伽倻史)는 실체 파악이 좀 진전된 상태이다.

그러나 아직도 수로왕이나 허황옥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특히 아유타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는 몇몇 재야사학자들의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도 야사(野史)적 가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여기에서 그 많은 가설들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다만 한 가지 부분, 즉 아유타국의 비정(比定)은 어떤 식으로든지 정리해 볼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현재 각계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아유타국이 바로 이 곳 아요디야이기 때문이다. 이 가설의 근거들 중의 핵심은, 옆의 사진에서도 확인되듯이, 수로왕릉인 납릉(納陵)이나 숭선전(崇善殿)에서 볼 수 있는 ‘쌍어문’과 ‘태양문’ 그리고 인도식 ‘스투파[塔]’에 있다.

불교와 가야문화권 밖의 한국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 문양이 바로 이 곳 아요디야 일대에서 근거를 두었던 고대왕국의 왕실문장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세계적으로는 물고기 문양은 고대 바빌로니아·로마·페르시아·현 중국 사천성 안악과 무창·일본·티베트 등지에서도 흔히 발견되고 있지만 김해와 아요디야의 문양은 특히 이채를 띠고 있다.

그 외에도 공주가 가져왔다는 현존하는 파사(婆娑)석탑이나 또한 북방불교 일변도였던 해동에 유일하게 가야권의 불교만 남방불교의 색채를 띠었던 점, 그리고 신라나 가야국의 지배계급의 언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남도의 일부 방언이 인도의 고대 드라비다어와 너무나 흡사한 점 등등도 허황옥의 고향을 인도라고 추정하게 만드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예를 한 가지만 들면 ‘가야, 가라’라는 단어는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한다는 것 등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설사 비정되는 대로 공주가 이 곳 아요디야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난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린 공주가 어떤 경로와 이유로 머나먼 해동의 남해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보충 근거이다.

이에 대하여 가설은 대개 둘로 갈라지는데, 배를 이용하여 인도에서부터 곧바로 건너왔다는 것과 아요디야에 근거를 두었던 왕국이 멸망할 때 피신에 나섰던 사람들이 먼저 중국의 보주(普州, 현 사천성 안악)에 정착하였다가, 다시 쫓겨나는 입장이 되자 배로 해류를 따라 피신 길에 나선 끝에 남해에 도착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고기에 취해 싸돌아 다니다보니 어느덧 가가라 강에 석양이 기우는데, 무척 예쁘고 인자했을 것만 같은, ‘외할머니’는 언제 나타나 이 외로운 나그네에게 하루 밤의 잠자리를 마련해 줄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