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苦), 갈애(渴愛), 도(道)

초대설법 - 아짠 마하 부와의 수행법문 여섯번째 법회(1)

2006-11-12     관리자

이 글은 태국을 대표하는 위빠사나 대선사, 아짠 마하 부와가 영국을 초청방문하여(1974년 6월) 설한 법문과 질의 응답들을 수록한 수행법문집, 『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 중, 여섯번째 법회의 질의 응답입니다.


문: 어제 아짠께서는 마음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마음은 영혼(soul)과 동일한 것인지 좀더 상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답: 마음(citta, heart)은 ‘앎(knows)’입니다.
그러나 식(識, vinnan, consciousness)은 6근(六根: 眼·耳·鼻·舌·身·意)을 통해 감지되는 인식작용으로, 6근과 연계되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따라서 오온(五蘊: 色·受·想·行·識) 중의 하나인 식은 마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결생식(結生識: 다시 태어날 때의 의식)’은 마음에 속합니다. 사후(死後)에 다양한 곳에서 각양각색의 상태로 다시 태어날 때의 의식인 결생식은 ‘씨앗’, 즉 업(業: 결과를 낳는 원인으로서의 행위로, 다양한 상태의 탄생으로 마음을 이끄는)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바로 이 결생식으로 인해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다른 환경과 상태에서 태어나게 되며, 이 의식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합니다. 이처럼 업은 마음을 조정하는 힘(force)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맑게 닦아 청정해지면 이 같은 업과 번뇌로부터 저절로 벗어나게 됩니다. 청정해진 마음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되므로, 마침내 무상·고·무아의 법칙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음이나 결생식이 아직 모든 면에서 청정하지 못하면 무상·고·무아의 굴레에서 여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이란 지극히 복잡하고 미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무아(無我)일 수가 있을까요? 아마도 공(空)에 관한 다음의 비유가 그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방이 비어 있는지 살펴보라는 심부름이 주어졌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는 지정된 방으로 들어가서 살펴보고는 곧바로 알립니다. “이 방은 비어 있습니다.” 그러자 심부름을 보낸 이가 되묻습니다. “당신이 그 방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 있는데 뭐가 비어 있다는 거요?” 그제야 심부름꾼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방에서 나오자, 비로소 그 방은 텅 비게 됩니다.

마음이 아집(我執)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면 세속과는 완벽하게 단절되게 마련입니다. 그런 마음을 일컬어 ‘빈 마음’ 혹은 ‘완벽한 청정심(淸淨心)’이라고 이릅니다.

그 같은 마음속에는 자아(自我)도 무아(無我)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자아나 무아의 모든 조건들로부터 이미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문: 고(苦, dukkha)란 정작 무엇입니까?

답: 고는 어느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존재합니다. 법(法, Dhamma)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고는 실재(實在)하며 모든 이들에게 내재(內在)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고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려 하지 않으므로 끊임없이 고를 부인하게 됩니다. 미혹된 마음은 고의 실체를 알지 못하므로 고를 치유할 방법을 찾고자 해도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고에 길들여짐으로써 (고의 실체를 알든 모르든 간에) 항상 고를 끌어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대의 질문처럼, 이 ‘고’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대 안에 고가 자리 잡고 있을 때면, 그 고의 실체를 주도면밀하게 고찰해보십시오. 바로 자기 안에 고를 품고 있으면서도 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다른 누구에게 가서 고에 관해 묻겠다는 것입니까?

만일 고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붓다께서 가르치신 방법대로 수행하십시오. 그런 수행이야말로 고의 실체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문: 자아에 대한 확신이나 집착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요?

답: 그것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에서 비롯됩니다.

일례로, 잃어버린 말(馬)을 어딘가에서 찾아냈다고 칩시다. 그런데 정작 말을 붙잡으려 하지는 않고 그 말이 도망쳐온 말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말의 발자국들을 좇아 집까지 되돌아간다면, 과연 현명한 처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비근한 또 다른 예로, 길을 걷다가 발에 가시가 박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즉시 가시를 뽑아낸 뒤 상처를 치료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가시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 출처는 어디인지 등등을 알아내기 위해 조사에 착수해야 할까요?
만일 후자(後者)를 선택한다면, 상처는 점점 더 곪아 확산됨으로써 결국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지경까지 내몰리게 될 것입니다. 다리를 잃고 싶지 않다면 당연히 전자(前者)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마음이 없다면 후자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문: 갈애(渴愛)가 고(苦)의 원인입니까?

답: 어떤 경우에 고는 갈애와 함께 하며, 갈애가 배제된 고는 어떤 경우에 가능할까요? 달리 말하자면, 고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이 갈애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와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에 관해 알기를 원하는 것은 갈애가 아니라 도(道, Magga)입니다.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진정한 평화와 행복의 추구로 전환함으로써 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원함’은, 갈애가 아닌 ‘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