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

징검다리

2007-09-30     관리자

해 질 무렵의 어스름에 한 늙은 여인이 보드가야 마을에 도착하였다. 여인은 아주 먼 곳에서 며칠씩 걸려 왔으므로 지치고 피곤하였다. 이제 목적지에 이르렀으니 잠시 쉬고 기운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숙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여인은 마을 저 편에 우뚝 솟아있는 탑을 보았다.
눈부신 황금빛 햇살을 온 몸에 받으며 푸른 하늘 속에 둥실 떠있는 탑은 왕처럼 위엄 있고 왕비처럼 신비로우며 부드러웠다. 묻지 않아도 그것이 마하보디 사원의 대탑(大塔)임을 여인은 알 수 있었다. 가서 도착의 인사를 드려야지, 하고 여인은 생각하였다. 쉬는 것은 나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사원으로 향하는 길은 좁고 혼잡스러웠다. 마을 입구의 놀이터에는 네온싸인이 번뜩이고, 커다란 수레바퀴에 탄 아이들은 오줌을 지리는 재미에 들떠서 소리질렀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방송이 확성기에서 계속 터져 나오고, 좁은 길을 뚫고 지나가기 위해 차는 끊임없이 경적을 울렸다. 총천연색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파는 노인 앞으로 자주색 옷을 입은 티벳 승려들이 무리지어 지나갔다. 젊음의 패기가 넘치는 청년들로부터 뺨이 빨갛게 트고 코를 흘리는 어린 동자승에 이르기까지, 그들도 세상살이의 호기심에 이끌려 티셔츠가 걸린 노점 안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길을 한 발자국만 벗어난 곳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고, 검푸른 물이 고인 웅덩이는 썩는 냄새를 풍겼다. 먼지와 냄새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하얀 마스크나 목도리 자락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마을 보드가야도 지금껏 지나쳐온 많은 마을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음이 여인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갑자기 사람들에 떠밀려서 반쯤 열린 철문 안으로 밀려들어간 뒤에야 여인은 그곳이 마하보디 사원임을 알았다. 철책으로 울타리를 두른 사원 경내(境內)는 네모반듯하고 넓었다. 가까이서는 올려다보기도 까마득한 대탑의 네 귀퉁이에는 풀밭이 있고, 오체투지의 예를 올리는 순례자들과 잠시 쉬며 땀을 닦고 물을 마시고 웃고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인해 마치 시골 학교의 운동장 같았다.
순례자들은 또한 아래, 위 두 층으로 나뉘어서 탑을 한바퀴 돌아가는 제법 넓은 통로를 빈 틈 없이 메웠다. 염주를 굴리며, 소리내어 염불을 하며, 탑돌이를 하던 사람들은 철책 안으로 손을 들이밀고 초와 향을 파는 아이에게서 한 묶음의 초와 한 다발의 향을 샀다. 그들은 초에 불을 붙여서 돌담 위에 세우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 다발을 그 옆에 놓았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켰던 초는 이미 다 타버리고 촛농은 굳어서 돌담에 허옇게 엉겨붙어 있었으며 초가 탄 자리는 시꺼먼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하였다.
여인은 가파른 층계를 내려가서 대탑 안으로 들어갔다. 탑 안의 중앙에는 금빛 불상이 모셔져 있고, 순례자들은 다투어 무릎을 꿇고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웠다. 촛불 끄을음과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깨끗지 않은 옷과 자주 닦지 않은 몸에서 나는 냄새로 인해 탑 안의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 조용히 도착의 인사를 드리려던 바람은 깨어지고 순식간에 싫은 마음, 업신여기는 마음,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어나서 수그러들지 않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여인은 금빛 불상을 잠시 우러러보았을 뿐, 삼배(三拜)의 인사도 드리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돌담 위의 촛불은 더 밝게 너울거렸고 다 타지 못하고 꺼진 향 다발 위로 촛농이 녹아 내렸다. 그 사이 한층 짙어진 어둠으로 인해 혼잡은 더 심하여진 듯 하였고 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여인은 그 자리에 멈추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어둠 속에 서있었다. 무수한 잎새가 달린 나뭇가지를 자애로운 아버지의 팔처럼 넓게 벌리고, 온갖 소음과 혼잡을 묵묵히 견디며 늠름히 서있었다.
부처님이 그 그늘 밑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리수.
여인은 나지막한 돌 위에 앉았다. 나뭇잎을 살랑이는 바람이 스쳐 지나갔고 바람은 새들의 지저귐으로 이어졌다. 나무 아래에는 육 년의 고행으로 뼈만 남은 초췌한 모습의 부처님이 앉아 계셨다. 주위의 세계는 서서히 멀어져갔다. 남은 것은 보리수 밑에 정좌하신 부처님과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은 여인뿐이었다.
- 제가 꿈꾸며 기대하였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어요, 하고 여인은 말했다. 여인은 자기의 실망이, 그리고 분개함과 원망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려야만 했다.
- 당신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는 한적하고 평화로우며 사람들 마음에 저절로 환희심이 우러나올 만큼 경건하고 아름다운 곳이리라 생각하였지요. 그런데 보세요. 여기는 시장바닥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작거리며 저 철책 밖에는 장사꾼들이 들끓고 있지 않아요? 한적하고 경건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요? 게다가 사람들은 촛불과 향과 부적과 음식 찌꺼기로 사원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있어요.
바위로 된 돌담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끊임없이 촛불을 켜서 뜨겁게 하면 언젠가는 금이 생길거예요. 처음에는 아마도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눈에 띄지 않는 금이겠지요. 그렇지만 비가 오면 그 금 안으로 비가 스며들고 밤이 되면 비는 얼어서 얼음이 되고 그 얼음이 다시 녹으면서 바위에는 돌이킬 수 없는 틈이 생길 것이에요. 바위가 깨지는 것도, 저 대탑이 무너져내리는 것도 다만 시간의 문제예요.
이 성스러운 곳이 훼손되어서는 안 돼요. 누군가가 저 사람들을 몰아내야 해요.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돈을 빌려주고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치들을 쫓아버린 것처럼!
여인은 격한 감정에 씨근대며 말을 멈추었다. 자기의 분개와 실망이 정당한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앞에 앉은 분이 머리를 끄덕이며 칭찬해줄 것을 기다렸다.
- 그런가. 저들을 다 몰아내야 하는가. 그대도 저들과 같이 한 순례자가 아니었던가.
- 그야 물론이지요, 하고 여인은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 탑을 돌고 있는 저 아기 업은 어머니와 절음발이와 보행이 불편한 할머니를 보게. 저들은 가난하게 살면서 일년 내내 모은 돈을 바쳐 이번 순례의 길에 올랐네. 차비를 아끼기 위해 먼길을 걸어온 사람도, 밖에서 잠을 자는 사람도 있네. 바위가 끄슬리고 금이 간다고 해서 저들이 촛불과 향으로 예를 갖추고 소원을 밝히는 것을 막을 것인가. 그대가 보아야 하는 것은 남루한 옷과 때묻은 몸이 아니라 저들의 지극한 정성이네.
- 다른 방법이 있겠지요? 촛대를 준비한다던가 향로를 군데군데 놓는다던가 하면 어떨까요? 무엇인가 좀 더 질서 있고 정결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 예수가 장사치들을 몰아낸 그 성전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그곳은 오랜 역사를 통해 끊임없는 전쟁의 불씨가 되어 왔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은 겉모양과 이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을 불변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네.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라면 예수는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그 성전을 내주었을 것이네.
- 그렇다면 보존되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인가요? 당신께서 깨달음을 얻은 이 신성한 곳도?
- 그런가. 내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 여기인가. 그리고 그대가 순례의 목적지로 정한 곳이 여기인가. 정말로 그러한가.
부처님의 물음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여인의 가슴에 꽂히었다. 살을 찢는 아픔이 핏줄을 타고 발 끝까지 퍼져나갔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고 새들의 지저귐이 이슬비처럼 내렸다. 아픔은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의 입맞춤이 되어 여인의 이마전에 와 닿았다.
고요와 평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을 때의 홀가분함. 눈을 뜨고 보는 세상의 차별 없는 아름다움. 그리고 소중함.
- 염려할 것은 없네. 이 마하보디 사원의 대탑도, 이 보리수 나무도, 언젠가는 다 스러져버릴 것이며 그것은 오직 당연한 일이네. 그러나 삶의 고통, 살아있는 사람들의 고뇌와 환희, 신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그런 것들은 변함이 없이 있을 것이고, 그 고통과 고뇌의 바다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진리 또한 변함이 없을 것이네.
그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맛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것, 맛볼 수 없는 것들에로 그대를 이끌어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대는 아주 어둡기 전에 집에 돌아가서 쉬도록 하시게.
여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발 밑에 깔린 보리수 나뭇잎 하나를 주웠다. 두 손을 나뭇잎 위로 합장하고 나서 여인은 서로 밀고 밀리우며 탑돌이를 하는 순례자들 속으로 기꺼이 끼어 들었다. 바위에 금이 가는 나지막한 소리는 서러움과 고마움의 노랫가락이 되어 여인의 가슴에 울리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