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

길을 묻는 이에게

2007-09-30     관리자

D보살님이 나와 가끔 차담을 나누며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항상 정갈하고 단정한 모습의 D보살님은 어쩌다 한 번씩 불교교리에 대해서 물어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때그때 본인이 공부하고 있는 책이며 테이프를 나에게 소개해주었다.
때로는 이 곳 보스톤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시사거리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우리는 만남의 기쁨을 나누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학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자연스럽게 자녀는 몇이나 되는지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묻게 되었는데 세 명의 자녀가 하버드를 나왔고 막내가 예일을 나왔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처사님과 자녀들, 사위의 직업도 모두가 우리 한국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그야말로 꿈처럼 원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뜸 말하기를 “언젠가 이 곳 한인회보에서 아들을 하버드에 보낸 어머니를 초청해서 자녀교육에 대한 특강을 했다는 내용을 읽은 일이 있는데, 보살님이야말로 한인회에 나가서 특강을 하시던지 아니면 한국 TV에 출연해서 뭔가 한마디 하셔야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내 속뜻을 알아차린 보살님과 나는 같이 웃었다.
자신이 뭔가 남보다 잘난 것이 있거나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람들은 대개 다소 들뜨고 조급한 마음을 드러낸다. 반대로 뭔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거나 알까봐 두려운 것이 있으면 웬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자식이 서울대를 다니는 어머니나 아버지들은 제발 남들이 자기 아이가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물어주기를 바라고 그 반대로 소위 이름없는 학교를 다니면 남들이 물어올까봐 겁을 내는 부모들이 있다. 물론 더욱 성질 급한 부모들은 묻지도 않는데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왜인가?
질문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중생심인 줄은 알지만 나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해답 가운데 하나를 우리 한국의 서글픈 교육현실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해마다 학년이 바뀌면 담임선생님이 가정환경조사를 했다.
자기 집에 전화기 있는 사람 손들어봐? 피아노 있는 집? TV? 신문 보는 집? 셋방 사는 사람? 부모가 대학교 나온 사람? 중학교? 국민학교?… 더욱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질문은 자기 엄마가 친엄마 아닌 사람? 아버지가 친아버지 아닌 사람? 부모가 이혼한 사람? 질문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고아원에서 다니는 사람?….
도대체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부모가 이혼했으면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위로하고 도움을 주었고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무시하고 동정했는가. 그리고 가난과 부자를 조사해서 몇 명의 선생님들이 공짜급식을 주었고 학용품을 사 주었으며 몇 명의 선생님들이 오히려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대우를 했는가.
또 아이들끼리는 어떤가. 도대체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 가정조사를 하는 것이 아이들의 인성과 교육에 무슨 도움이 되었으며 선생은 또 무슨 유익을 줄 수 있다고 믿었는가. 왜 어린 나이에 자기 집에 전화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학교 문전에도 못 가본 부모를 중졸을 위조하게 만들고, 피아노가 있는 집 아이는 뻐기게 만들고, 없는 집 아이는 주눅 들게 만드는가. 그러지 않아도 주인집 아이는 셋방 사는 아이를 괴롭히고 뻐기기가 일쑤였는데 굳이 학교가 그들의 그릇된 아만과 우월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는가.
지금은 그 때의 그 어린이들이 자라서 피아노를 장식품으로 전시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컴퓨터까지도 장식물로 모셔두는 사람들이 생겼다. 또한 자기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비싸고 남들이 좋아하는 것이면 무조건 사는 그런 풍조를 만들어 냈다. 그런 사람들은 남의 집을 방문해서도 집주인과의 대화보다는 그 집에 뭐가 있는지 자기는 없는데 그 집에 있는 것이 있을까봐 열심히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그뿐인가. 오랜만에 동창들끼리 만나면 상대방 차를 살펴서 자기보다 작은 차면 일단 여유를 내고 자기보다 비싼 차면 기운이 빠진다. 어떤 여행사들은 한국사람들의 그러한 심리를 이용해서 해외관광을 안내하면서 현지의 상점과 여행사 직원이 짜고 장사를 한다고 들었다. 즉 한국인 관광객들 앞에서 사전에 계획된 사람이 “이거 대게 좋네! 이거 얼마죠? 굉장히 싸다.”면서 사는 것을 보면, 저게 좋은 건가보다 싶어서 우르르 몰려들어 바닥을 낸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학교에서는 환경조사를 하는데 요즘은 학원을 몇 개 다니느냐는 목록이 첨가되었다고 한다. 아마 오래지 않아서 외국에 어학연수 다녀왔는지 물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 싶다. 도대체 우리 학교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건가? 그들은 무슨 마음으로 어떤 목적으로 질문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부모들의 교육 방향에 얼마만큼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는 아는가? 이제는 학원과외나 해외연수 바람이 학교만의 문제도 책임도 아니지만 적어도 환경조사에 그런 질문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아이들 교육에 필요하다면 조용히 비밀로 개인적으로 할 수는 없는가?
어떻게 학교의 상담 선생님이 별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데 예방이라는 미명 아래 결손가족 아이들을 불러놓고 “부모가 이혼했냐? 별 어려움은 없냐?” 는 등의 대책없는 무책임한 질문으로 어린 가슴들을 이중으로 멍들게 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질문이기보다는 폭력이다. 그러한 질문은 적어도 그 대답에 책임질 용의가 있거나 가슴으로 함께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로 부모가 이혼하기까지 그들이 겪어야 했던 마음의 불안과 상처, 이혼 후에 겪는 갖가지 어려움과 아픔들을 함께 아파하고 울어줄 수 있는 선생님이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질문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런 식의 질문을 하는 선생님이라면 공허한 질문만 내던질 뿐이지 질문 뒤에 올 대답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다.
학생들은 그걸 알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거나 오히려 분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탈선을 자극하고 부추길 뿐이다. 설사 그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도움을 주는 데도 예의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동정하는 태도나 거드름을 피우는 자세로 누군가를 도우려 한다면 그것은 자칫 상대방의 비굴감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D보살님의 얘기를 하다 말고 너무 많이 온 듯하다. 아무튼 D보살님은 어쩌면 내가 그였더라도 제발 스님이 우리 아이들이 어디를 나왔는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또 내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주었으면 싶었을 텐데, 아니 질문을 기다릴 필요 없이 자신이 먼저 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만난 지 일년이 넘도록 묻지 않은 일에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조건이면 아직 미혼인 두 아들의 며느리감에 대한 기대나 성공한 딸의 남편감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쯤은 할 성도 싶은데 그는 단 한마디 언급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는 D보살님이 화색이 만면한 모습으로 꽃 한 다발을 들고 와서는 자기가 평소에 보고 싶었던 산수유를 인터넷을 통해서 어디에 있는지 발견했노라고 기뻐했다. 그리고는 또 내게 자랑하기를 아주 좋은 보온 도시락 밥통을 하나 샀는데 날이 따뜻해지면 도시락을 싸서 꽃구경을 갈 거라며 그 자랑스러운(?) 자식 이야기를 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소녀처럼 좋아했다.
사실 심리적으로 부자가 부자라는 사실을 즐기기 위해서는 매순간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기억시켜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은 금방 그 사실을 잊어먹고 딴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명상을 해 본 사람들은 알지만 어떤 위대한 생각도 즐거움도 기쁨도 계속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주의를 붙들어 매어 한 곳에 머물게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이 일류대 출신이거나 더군다나 본인도 아닌 부모나 자식 또는 남편의 잘남을 자랑하고 남들보다 더 잘났다는 우월감을 갖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기억을 환기시켜주어야 하는 정신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은 다시금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과 인정이라고 하는 피드백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확인되어야만 된다. 알고 보면 자랑이나 우월감을 갖는 일 또한 열등감이나 숨기고 싶어하는 정신 과정만큼이나 불건강하고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인데, 다만 우리가 그 감정에 빠져 있어서 의식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D보살님의 경우 적지 않은 우리들의 어머니나 아버지들은 성공한 아들이나 딸의 삶에 편승해서 진짜 자기 존재와 삶을 팽개치고 아들이나 딸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도용하고 착각하면서 그들의 미래와 파트너를 구하는 일에 본인보다 더 열성적으로 목을 매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일상에 매달려 웃고 울고 잘나서 우쭐해 하고 남을 무시하고 못나서 기죽는다.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D보살님은 소박한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에 깊은 감동을 드러내지만 성공한 자녀들로 인한 자만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젊음을 온통 남편과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쏟아 붓고 육십을 향해서도 소녀같이 소박하고 순박한 그의 모습에는 오직 자녀들에 대한 진한 사랑과 존중이 보일 뿐이다. 지금은 자신과의 여행을 위해 명상수련을 하고, 그림도 그리며, 불교와의 만남으로 인해 생의 새로운 기쁨과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일전에는 이런 저런 일로 바쁘다가 웬지 허전하고 뭔가를 놓친 것 같아, 가만히 생각해 보았더니 우리 서운사에서의 차담이 그리웠다며 다녀갔다. 다음 만남에는 처사님과의 겨울여행으로부터 케리비안의 아름다운 석양을 담아 올 D보살님과의 차담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