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평의 꿈

함께사는 세상 이렇게 일굽시다

2007-09-30     관리자

승려가 ‘고향이… 어쩌고’하면 우스울 것 같다. 출생의 땅이라는 지리적 고향은 누구나가 있는 것이지만, 구름 따라 물 따라 가며 어떤 만남에서도 ‘인연’의 실을 불법으로 엮어 삶의 가치를 눈 뜨게 해주는 것으로 본분, 보람을 찾아야 하는 몸이니 그 어디, 그 누구도 고향 같고, 고향사람같이 반갑고 소중하다. 어찌보면 이것도 승려가 된 복이 아닐까.
Korea, 나의 출생 고향 ‘미얀마’에서 멀고 먼 서쪽에 있는 크지 않은 나라 그곳에 대하여 특별히 아는 것도 없고 길잡이가 되어 줄 친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런지 늘 그곳에 가고 싶었다. 그저 가고만 싶다는 것, 그것뿐이지 따로 설명할 아무 조건도 없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한국의 대승불교를 배우고, 간화선의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한국선원에서 참선을 배우고 싶어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미얀마’를 떠나 소원대로 한국에 온 지 벌써 삼년이 되었다. 그간 ‘송광사’에서의 하안거·동안거 세 번을 빼고는 줄곧 서울에서 거주했다.
송광사 선원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수행한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위빠싸나와 참선을 수행해본 결과 두 가지 수행법 다 부처님 되게 하는 좋은 수행법이라 생각한다. 그 차이를 비유하자면, 위빠싸나가 평탄한 길이라면 참선은 오르막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선은 빠른 길인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도 부단히 정진해야 할 수행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미얀마 선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금 한국에는 ‘미얀마’인이 1,500명 가량 와 있다(거반이 노무자이다). 그들이 일요일엔 예불, 기도, 법문, 명상 한국어학습 등을 위하여 내가 있는 작은 지하실 선원에 모여든다. 어쩌면 법회는 이차적인 문제고, 낯익은 얼굴들을 보면서 모국어로 실컷 말이라도 하고 싶어 그리도 열심히 올 것이다.
법회가 끝난 뒤 한동안 술렁이며 수다를 떨고 있는 듯한 그들의 모습을 볼라치면 내 자신 아직 젊은데도 ‘남의 집에 왔으면 행동 하나 말 한마디 조신해야지.’하고 마음 쓰는 할머니나 엄마가 된 기분이 들어 혼자 웃는다.
그렇지, 헤아리지도 못할 아득한 불연(佛緣)의 끈이 나를 이곳까지 오게 했듯이 그들 또한 피부색깔, 말, 풍습 모두가 다른 이곳 생활이 그냥 단순한 인생의 계획, 욕구, 목적 때문이라고만 처리 못할 것 같은 인연(因緣)의 수수께끼로 나를 흥분시킨다.
깍지 굵은 두 손의 합장, 진지한 눈빛, 어딘가에 부딪쳐서 부서진다 한들 사양 안 할 젊은 육체가 때묻은 작업복 속에서 꿈틀거리는 그 열기는 분명히 남국 ‘미얀마’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몫이었을텐데, 어찌하여….
‘미얀마’에 있었다면 만나지도 못하고 스쳐갔을 얼굴들. 나는 새삼 신기한 기분으로 동포 그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 작은 지하실이 붐비도록 와주고 모든 아픔과 그리움을 부처님한테서 달래는 그 모습이 고마워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 그럴 때면 나는 늘 “부처님, 그들과 나의 젊은 날의 선택 ‘한국에서의 세월’을 후회없는 기억으로 남게 하여 주십시오. 먼 훗날 한국, 서울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 설레이고, 일요일이면 부처님 뵈러 오고 우리 모국어(母國語)를 홍수처럼 쏟아 부우며 떠드는 날들이 즐거운 그림으로 가슴에 새겨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한편 한국의 불자들에게 ‘미얀마’를 상징하는 세계적 대불탑으로, 수도 ‘얀공’에 있는, 황금색의 ‘슈웨다곤 불탑’(높이 100m)의 아름다움과 열반의 모습이 아니고 쉬고 계시는 아름다운 얼굴의 모습으로 미얀마 불교예술을 세계적으로 빛나게 한 대횡와불(大橫臥佛, 전장 54m 높이 16m)을 꼭 보여 드리고 싶다.
‘미얀마’에 가서 한국불교를 자랑하고 싶고, 한국에 와서는 ‘미얀마’ 불교를 자랑하고 싶은 내가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제2의 고향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다’라고 생각하며, 사랑은 원래 사람을 유치하게 만든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고 웃는다.
내가 미얀마 승려로서 한국을 좋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바 미래불교의 희망은 한국과 미얀마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한국의 서울에서 덕천 스님 덕으로 암사동 지하실에 자리를 잡고 제일 큰 기쁨은 역시 금색찬연한 부처님을 모신 일이다. 또한 그리도 춥던 선원(禪院)이 법보신문과 한국 불자들의 도움으로 난방을 설치한 일, 여기 저기서 얻어 온 냉장고 등속, 태국 불교서적 200권, 미얀마 불교서적 300권 등을 애쓰고 장만한 것이 뿌듯하게 느껴진다.
또 무엇보다 흐뭇한 것은 재한 ‘미얀마’인들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에 와서 고달픈 몸에 그 정신마저 방황과 고독에 시달린다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을텐데 얼마나 다행인가. 이 모든 것을 부처님 은혜로 알고 오직 감사의 기도를 올릴 뿐이다.
앞으로 이 선원에 올 사람이 더 많아질지언정 줄지는 않을 것 같으니 법당이 좀 더 넓어져야겠는데, 더도 덜도 말고 40평 쯤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설법의 목소리가 지금의 두 배 세 배 높아져야 골고루 들릴 것이다.
그렇게도 오고 싶었던 한국에 왔고, 암사동 한 구석 지하실에 뿌리를 내렸으니, 이제 잎새가 돋고 꽃이 피려면 5년, 10년 아니 20년이 걸린들 어떠랴. 언젠가는 40평의 법당이 주어지고 목이 터지도록 설법을 하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난다. 그러나 이 신나는 꿈을 설사 이루지 못한다 할지언정 나는 실망이나 좌절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홉 살에 출가한 나, 전생인연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고, 전전생부터 승려였을 것 같은 내가 승려로서의 본분, 진면목을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 목마르도록 오고 싶었던 한국에서 그 서원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금 나는 이곳에서 외형부터 다른 암적색의 승의(僧衣)를 몸에 둘러 감은 이방인이지만 이미 마음은 한국이요, 미얀마요 하는 분별조차 없어졌다. 나와 한국의 깊은 인연이 마치 두 나라 불교가 손잡고 화합의 계단에 같이 오른 것 같아 기쁘기 이를 데 없다.
내일 일은 기약 못하겠지만 지금 나의 계획과 희망은 한국에 영주하여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부처님의 초기 근본불교와 위빠싸나를 재한 미얀마 불자들과 아울러 한국의 불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모두가 너니 나니 내 나라니 남의 나라니 분별없이 서로를 위하며 함께 사는 세상을 일구고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험난한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평화롭고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이끌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행도 감내할 수 있으리라.
때로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누나의 얼굴이 떠오르고, 내가 밟고 다닌 땅, 내가 쳐다 본 하늘의 빛깔이 어찌 그립지 않으랴마는, 나는 그 그리움을 소중히 접어서 가슴 깊이 묻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한다. 내 원력이 빛바래지 않고, 반드시 이룰어질 수 있도록 불전에 고개 숙여 기원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