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추억 묘관음사(妙觀音寺)

보현행자의 목소리

2007-09-30     관리자

묘관음사는 동해 남부쪽 부산 지방과 인접해 있는, 동래군 월내라는 고장에 있는 작은 절이다.
이 절은 지금은 모두 입적하시어 안 계시지만, 5대 선지식으로 손꼽히던 경봉·구산·혜암·전강·향곡 다섯 분 큰스님 가운데 향곡 스님께서 주석하시던 절이었다. 유수와 같은 세월이 흘러 내가 이 묘관음사를 다녀온 지도 어느 덧 50년 가까운 세월의 광음(光陰)이 바뀌어 갔다.
나의 젊음과 함께 인생만사가 뒤엉켜 흘러간 50년, 긴 세월로 느껴지는가 하면, 어제 밤 잠자리의 한마당 꿈과 같이 짧은 허무감에 젖어, 한 조각 뜬구름과 같이 어느새 저만큼 흘러간 나의 젊음이 마냥 아쉬워지기만 한다.
요즘 세상처럼 급속도로 변모해 가는 시대이고 보면, 불과 50년 전이라 해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어려운 시대였다. 그 때가 바로 동족상쟁의 6·25동란으로 국가민족이 도탄에 빠져 허덕일 때, 휴전이라는 명목으로 치열했던 전쟁이 주춤해지자, 서울가는 12열차가 연일 기적을 울리던 바로 그 후였었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영도(影島) 꼬깔산 넘어 해변마을에 피난 짐을 풀었던 우리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12열차를 타지 못하고 눌러 있게 된 것이 16년이 지난 후에야 상경하게 되었으니, 부산은 나의 젊은 날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시내 산비탈 판자촌보다는 훨씬 여유롭고 공기 맑은 곳이었으나 교통이 무척 불편했던 곳이다.
춥고 지루한 겨울이 지나가고 포화(砲火)에 시달린 대지에 새 봄이 왔다. 앞산 마루에 개나리 진달래 어우러져 피었고 오륙도 너머 가물거리는 수평선에 흰구름도 한가롭던 어느 봄 날, 휴일을 맞아 그간에 쌓였던 모든 시름을 부처님 전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어나 우리 내외는 묘관음사를 다녀오기로 했다.
그 당시 모든 생활 여건이 어려울 때였으니, 철도 사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동해남부선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연발연착은 다반사였고 칙칙폭폭 낡은 고물 기관차의 잦은 고장은 승객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 누구도 짜증도 불평도 내지 않고 그저 그렇게 운명처럼 알고 살아갔다.
그나마도 첫차 시간을 알아두지 못해 아침 일찍 서둘렀으나 아침 밥도 거른 채 나왔다. 헌데 날마다 십이연발하던 첫차가 오늘따라 제시간에 떠났으니, 두 시간 여 줄을 서서 기다려 떠나게 됐다. 그러고 보니 거리는 얼마 안 돼도 월내역에 내릴 때는 이미 정오가 지났다.
기찻길 옆을 따라 약 30분 남짓한 거리의 비산비야(非山非野) 언덕에 복사꽃 붉게 물들고 싱그러운 새풀 향기는 더없이 좋은 활력소였으나 자꾸만 시장기가 들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하지만 절에만 가면 곧 해결될 일이니 걸음을 재촉했다. 절 주위에 묘목이 많이 심어져 있고 잘 정돈된 경내는 아담하고 정결한 도량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절 안은 텅 비어 더 한층 적막할 뿐 인기척이 없고 추녀끝에 부서지는 풍경 소리만이 객을 맞아주었다.
대웅전에 올라 예불를 마치고 나와 도량을 서성이는데 시장기는 더욱 심해져 온다. 이윽고 산 위에서 스님 한 분이 내려오시는 게 보였다. 바로 향곡 스님이시니, 처음 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점심 공양을 일찍 마치고 절 식구가 다 동원돼 산너머 묘목 심기 작업을 가졌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니 어쩔 도리도 없고 부엌을 둘러 보았으나 찬밥 한 덩어리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큰스님께서는 우리를 10년지기를 대하듯 반겨주셨으며, 많은 법담(法談)을 들려 주셨다. 그래도 마침 식사를 제대로 하고 나섰던 우리 거사는 스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으나, 나의 절박함은 해결할 길이 없었다. 오직 배고픈 삼매에 빠져 온갖 먹거리가 머리 속을 어지럽힐 뿐 스님의 귀한 법담은 멀리서 울리는 듯 귓전을 스쳐갔다. 바로 그 때 공양주보살님이 오셨는지 솔가지 나무를 뚝뚝 꺾어 불때는 소리와 함께 보리밥이 끓어 넘어 구수한 밥 냄새가 나를 더욱 자극해 왔다. 옳다, 산사의 저녁 공양은 본시 일찍 하는 법, 저녁공양을 얻어 먹게 되었으니 이런 다행이 또 있으랴. 안도의 한숨마저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 절실함도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그 당시 그 곳 교통 사정 역시 하루에 몇 번 지나는 기차가 있을 뿐 버스 편이 전혀 없었다. 다섯 시가 막차였으니 막차를 놓치면 자가용 11호 두 다리가 있을 뿐이었다. 시간을 보니 4시가 울렸다. 이렇게 되면 급한 것은 저녁 공양이 아니라 기차시간이었다. 큰스님께 하직인사를 올리고 아쉽게 돌아나오는 나의 힘없는 걸음마다 보리밥 한 그릇이 주마등처럼 따라왔다. 그러나 아침부터 빗나간 시간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차표를 사려는 나에게 매표원이 “40분 연착이라예.” 화석처럼 굳은 얼굴로 인정머리 하나 없이 내뱉는 말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큰소리를 지를 뻔했다. 충분히 공양을 할 수 있었던 40분 너무나 아까워 발을 동동 굴렀지만 누구를 탓하리까.
당시 월내역은 보잘것 없는 간이역이었으니 무엇이 있을까마는 혹시나 해서 마을 안쪽으로 주춤주춤 걸었다. 뜻밖에 초가집에 국수 두 글자 깃발이 나부낀다. 한걸음에 달려가 보니 우마차 먼지가 뽀얗게 앉은 유리 창 너머 국수 채반이 놓여 있을 뿐 기척도 없다.
나는 오늘 일에 분풀이라도 하는 듯 소리쳐 주인을 찾았다. 손님이 와서 주문을 해야 삶아 주는 국수였으니 빨리 될 리 만무하다. 차라리 한 시간 연착이면 좋으련만 어쩌랴 거듭 재촉을 했지만 국수를 가져다 줄 때는 이미 5분도 채 안 남았다.
국물을 좀 마셨을 뿐 돈을 던져 놓은 채 역을 향해 뛰었다. 헐레벌떡 뛰어드는 우리를 보신 어느 경상도 아저씨 점잖게 하시는 말씀 “천천히 오이소. 30분 더 연착이라카내요.”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치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것이 이름하여 인생이려나.
아침나절 화창했던 날씨가 어느새 구름이 모여들었는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기차는 비에 젖어 힘겹게 달려왔으나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이었다. 기차는 가다가 고장나고 또 가다가 한없이 서 있고, 이날 내가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도 훨씬 지나서였다.
나는 어릴 적부터 신심이 매우 돈독하시던 외할머니를 따라 많은 절을 드나들었고 아무 거리낌없이 절에서 공양을 마음대로 했고 절 마당을 나의 놀이터처럼 지내고 보니, 얼마나 어렵고 지중한 것이 절 공양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었는데 그 날이야말로 산 교훈을 얻었다.
그 때가 20대 후반 젊은 나이라고는 하나 그만한 근기도 없어 큰스님 친견하는 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했던 생각을 하면 너무나 송구스럽고 부끄러운 자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 날 내가 뵙던 향곡 스님은 건장한 장년이시었는데 세수(世壽)도 그리 높지 않으신 터에 입적하신 지 이미 오래 전이니 우리는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이제 세월도 가고 시대도 변천해 산간벽지 오지 마을의 높은 산사에도 통신시설이 개설되어 있고 교통사정 역시 개선되어 있고, 불교대학 강좌, 알아듣기 쉬운 교리 해설, 구구절절이 법문인 찬불가, 그 많은 사람이 모여 다 먹고 가는 공양,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오직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한 그릇 밥에도 부처님의 크신 은혜와 우주일체중연(宇宙一切衆緣)의 깊은 은혜가 들어 있음을 깨닫고, 이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후(後) 세상(世上) 어디에서나 지중한 은혜에 감사함을 잊지 않는 마음 가득히 발원하오며, 오늘도 법회를 마치고, 편히 앉아 점심 국수 공양을 하다 보니, 문득 아득히 흘러 간 묘관음사 추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각나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