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

불광이 만난 사람/한국외국어대학교 아랍어과 오명근 교수

2007-09-30     관리자

오늘날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인지라 무슨 일이든 우선 순위를 정해놓고 시간을 쪼개쓰고,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 역시 한계가 있는지라 가장 소중한 것을 곁에 두기 마련이다. 어쩌면 인터뷰를 극구 만류하는 오명근 교수(49세,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 교수, 한국외국어교육학회 부회장, 한국아랍어문학회 차기회장)를 애써 만난 것도 불연(佛緣)이 그의 인생에서 첫손에 꼽힌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는 이즈음 제 7차교과과정에 따라 시행된 중고등학생 아랍어교과서 책임집필자로서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이즈음 고조된 아랍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위한 원고 청탁과 강연 요청이 쇄도하여 전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바쁘다. 그야말로 일이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 형국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그는 매일 저녁마다 가족과 함께 기도를 하고, 매주 수요일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에 간다. 얼마 전에는 해인사까지 내려가 혜암 종정스님의 다비식에 참석하는 등 불교 모임에 그 귀한 시간을 쓰고 있다. 20여 년 동안 한국외국어대 불교동아리 지도교수로 활동한 것도 보통 인연은 아닌 듯싶다.
요새는 지난 99년 말부터 시작해서 4년째 연구집필책임자로 임해온 고등학교 아랍어 교과서 마무리 작업 중인지라 시간을 낼 수 없다는데, ‘내일이면 늦으리’라는 광덕 큰스님 말씀이 생각나 부랴부랴 그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의 연구실에는 ‘불(佛)자’ 액자가 빛을 발하고, 탁자 위에는 ‘걸림없이 살 줄 알라’는 부처님 말씀이 보기 좋게 놓여져 있었다.

어릴 적 종교적 체험이 일생을 좌우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폐품수집을 하기 위해 철공장에 가서 쇠부스러기를 줍다가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처음 수술한 것이 덧나서 재수술을 했는데, 다들 절름발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지요.”
그 때 이웃 아주머니들이 그의 머리맡에서 천수경을 독경해 주었고, ‘이 경전을 독송하면서 기도하라’며 천수경을 건네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독경을 했던 것 같습니다. 뜻도 모르고 무조건 천수경을 외우면서 ‘부처님, 제발 병신만 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지요.”
기도하는 마음은 정진하는 마음이요, 영원과 하나되는 마음이요, 무한한 힘을 이끌어 내는 원천이 된다고 했던가. 그는 기적적으로 다시 걷게 되었다. 그 뒤부터 천수경 독송과 기도는 그의 일상이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부친의 죽음을 맞이해서도 의연히 공부에 열중하였고, 고등학교 3년은 너무 길다는 이유와 경제적인 사정으로 대입검정고시를 치루어 최연소 합격, 대학 때는 달동네 단칸 월세방에 살면서도 국비장학생으로 유학, 약관 26세에 모교의 전임강사가 된 것은 부처님의 가피력과 두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 학문의 길로 이끌어준 스승님들의 은혜 덕분일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그 때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도 문제가 생겼는데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수지독송했던 천수경 독경을 권했지요. 그 때까지만 해도 불심이 없었던 아내는 제 말대로 열심히 천수경을 독경하고 건강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아들이 커서 은근히 출가하기를 바랐다는 그는 아들의 훈육 또한 철저히 불교적이다. 혹여 아들을 나무랄 일이 있을 때마다 “아비가 너를 잘못 키웠으니 같이 참회하자”며 아들과 함께 108배를 하는 것이다.
언어는 혼이라는 말이 있던가(아랍인들은 아랍어 자체가 신의 계시라고 믿는다). 수십 년 동안 꾸란(이슬람교의 성전)의 언어인 아랍어로 그 나라의 종교와 사회, 문화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도 불경을 손에서 놓지 않고 수지독송하는 그의 믿음은 어쩌면 전생부터 익어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본분을 다하는 것도 수행이요, 중생제도다
“1972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입학 당시 우연히 법정 스님의 강연을 듣고, 무소유를 읽으면서 불자의 자세를 새롭게 다졌지요.”
그는 1980년 전임강사가 되자마자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찍이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불교야말로 가장 중요한 삶의 주춧돌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두말없이 수락했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고 지도교수가 없으면 동아리가 폐쇄될 위기에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 또한 큰 인연의 소치인 듯싶다.
“회원들에게 ‘전공서적도 독파하지 못한 놈이 불경의 오묘한 뜻을 어찌 알겠느냐, 적어도 대학 4년 동안의 불경은 전공서적이다. 장학생 아닌 놈은 다 나가라.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지 말라. 죽으면 영원히 잘 수 있는데 살아서 죽는 연습을 너무 오래 하지 말라’며 야단을 쳤지요.”
그의 불교관은 조금 독특하다. 스스로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는 생활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채찍질 덕분인지 그 당시 불교학생회원들은 대부분 장학생이었고 고시에 합격한 이며, 출가 수행자도 여럿이다.
“솔선수범이야말로 가장 좋은 교육이지요.”
제등행렬 때 목탁을 잡고 앞장서고, 수련대회 때는 학생들과 똑같이 용맹정진했다.
“82년도였던가. 해인사 수련대회 에서 삼천 배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군요. 1,500배 정도 했을 때는 누워서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2,000배가 넘어가면서부터는 무아지경에 이르더니 언제 3,000배가 끝났는지 몰라 300배를 더했습니다.”
3,300배를 했는데도 다리가 아프기는커녕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다음날 아침 환희심으로 단숨에 백련암에 올랐지만 성철 스님(와병 중)은 뵙지 못하고, 성철 스님의 쾌차를 위해 학생들과 함께 백련암 경내 앞마당에서 108배를 드렸다. 그날 성철 스님께서 필답으로 내리신 화두만 챙겨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산하면서 3,000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겼다.
“법주사 수련대회 때 두 번째 계를 받으면서 혜정 스님으로부터 벽담(碧潭)이라는 호를 받았는데 한없이 그냥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당시 법주사가 내 집처럼 느껴지고 출가해야겠다는 생각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날 학생들과 그 문제로 토론을 벌이기도 했는데, 자신의 본분, 즉 열심히 연구하고 학생들에게 진솔하게 지도하는 것도 수행의 일환이요, 중생제도의 일부분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요즘 그는 초등학교 시절의 때묻지 않은 신심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초발심자경문을 읽고 있다. 이십여 년 전 불교학생회 지도교수가 되어 열정적으로 임했던 그 첫마음으로 불교학생회 회원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 싶고, 1988년 2월 한국교수불자연합회 창립멤버로서 지금까지 기획부장을 역임하고 있으면서도 소홀히 했던 교수불자연합회의 일에도 적극 동참하여 이 땅을 맑고 밝은 불국토로 일구는 주춧돌이 되고자 원력을 곧추세운다.

병고로써 양약을 삼다
“보왕삼매론에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는 말씀이 요즘처럼 절실하게 들려온 적이 없습니다.”
그는 최근 연거푸 교통사고를 두 번 당했다. 물리치료를 받던 중 흉통이 가시지 않아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심장 대동맥 쪽에 종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한동안 담배만 더 피우며 방황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체유심조, 매사는 마음 먹기에 달렸음을 깨닫고 연구와 교과서 집필 작업, 기도에 더욱 더 정진했다.
“예전에는 대승적인 기도를 했는데, 막상 병이 드니 내 개인에 국한되는 소승적인 기도를 하게 되더군요.”라고 미소짓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인간적이다.
그는 현재 재진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미리 번뇌하고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부족한 중생이기에 조금은 두렵고, 기도로써 병고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있단다.
“탐욕과 어리석음에선 어느 정도 벗어났는데 성내는 마음은 아직 놓지 못했습니다. 올해의 목표가 ‘설혹 누가 나에게 험담이나 욕을 한다면 그를 스승으로 모시려고 노력할 것이다’ 입니다.”
초등학교부터 전교육과정을 통틀어 단 한번도 지각, 결석을 하지 않았던 그는 시쳇말로 완벽주의자다. 오죽하면 수요일을 절에 가서 기도하는 날로 정한 뒤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겠는가. 지방이나 해외의 학술세미나에 참석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심지어 이슬람교가 국교인 이집트에 연구교수로 가 있을 때도 매주 수요일이 되면 기도하면서 불경을 독송하였다.
그렇듯 매사 완벽하기에 흐릿하고 무지몽매한 사람에게 진심(嗔心)이 일어나는 것은 인지상정인 듯싶다. 이제 그 마음 놓으려고 노력한다니 곧 육체적인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자체가 구업을 짓는 것으로 생각한다. 당장 참회기도를 해야겠다(실제로 그는 인터뷰 후 구업을 닦기 위해 새벽에 참회 기도를 했다고 한다).”는 그에게 한말씀 더 부탁드리니, “공부가 익어진 연후에 반야심경 한 줄이라도 아랍어로 번역해서 아랍 사람들에게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지옥도 혼자 가면 외롭다는데 하물며 극락으로 가는 길에 동반자가 없으면 되겠습니까? 더 열심히 기도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부족하지만 전법 공덕을 짓도록 노력할 겁니다.”라고 담담히 말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한평생 건강도 돌보지 않으시고 전법에 임하신 광덕 큰스님 얼굴이 떠올랐다. 큰스님 가신 지 벌써 3주기, 그와의 만남 또한 큰스님께서 맺어주신 듯해 짐짓 가슴이 뭉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