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우리 스님/ 갑사 장곡 스님

2007-09-30     관리자

갑사는 가을에 오면 제 격이라지만 새하얗게 눈덮인 산사를 어디에다 비하랴. 산새들은 또 왜 그리도 야단스럽게 지저귀는지.
겨울이면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산새들을 위해, 그리고 갑사를 찾는 이들의 안복을 위해 주지스님의 특별배려(?)로 감나무 가지마다 남겨진 홍시들이 새하얀 눈과 함께 갑사의 겨울정취를 물씬 더해준다.
최근 불교계소식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갑사 안팎으로 불고 있는 소식을 전해들었으리라. 1999년 3월 장곡 스님이 이곳 갑사에 주지로 오시면서 안으로는 철저한 수행가풍을 세우고, 밖으로는 ‘벽이 없는 사찰, 담이 없는 사찰’을 표방하며 갑사를 일신해가고 계시다.

갑사의 새로운 청규
1년 365일 결제와 해제없는 상시선방에는 현재 열 분의 구참수좌스님들이 수행정진 중이다. 선방스님들을 비롯해 스무 명의 대중스님들은 물론이려니와 하룻밤 이상을 갑사에서 묵는 전 대중의 새벽예불 동참, 그리고 1시간 참선과 바루공양과 울력을 해야 한다. 하루 4시간씩 수행하고 울력하는 것을 갑사의 청규로 삼고, 매달 보름과 그믐에는 주지스님의 집전 하에 갑사 내 대중은 물론이려니와 매표소 직원까지 한 자리에 모여 포살법회에 동참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밖으로 떠돌면 사상누각이 되는 법입니다. 기본이 없으면 무너져버리는 법이지요. 부처님 일을 받들어 하는 이들이 수행자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었을 때 안팎이 어우러지면서 모두가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늘 깨어있어야 해요. 대중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습니다.”
스님이 처음 갑사에 올 때만 하더라도 초하루 법회에 30~40명의 신도가 나왔고, 쌀 한 가마에 수억 원의 빚이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절 주위에 왜 그렇게 박수며 무당이 많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수행정진력이 주는 맑은 기운 때문인가. 아니면 제대로 수행하는 수행자들에 대한 호법신장님들의 보살핌인가. 탁한 기운들은 차츰 정화되고 요즈음은 초하루 법회에 200~300명의 신도들이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백중이며 부처님 오신 날에는 천여 명의 신도들이 갑사를 찾는다.

벽이 없는 절 담이 없는 절
“현대 사회에 있어서 절은 전 사부대중에게 열려진 공간으로 수행의 장이며, 문화의 장이며, 포교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지역주민들이 찾고 싶어하는 정신적 문화적 쉼터로 기능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가고 있습니다.
사찰과 불교가 이 시대 대중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거듭나야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스님은 그 옛날 백제의 도읍지였던 이곳 공주 갑사에서 그 꿈의 날개를 활짝 펼쳐가고 계시다.
각 불교단체는 물론이려니와 시민 환경 문화단체의 워크샵과 강연회 세미나를 위한 공간으로 개방하고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사찰의 전형을 보이고 있는 갑사에서는 올 연초 100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새해맞이 기원법회가 열렸다.
갑사 부임 첫 해 11월 6일과 7일 갑사 창건 의미와 정신을 돌아보는 개산대제에는 갑사 창건 이래 최대의 인파가 운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지난 해 11월 3일과 4일 역시 제 2회 갑사 개산대제와 영규 대사 순국 409주년 추모재가 열려 야단법석이 펼쳐졌다.
특히 영규 대사와 800여 의승군을 기리는 추모재는 그 의미가 자못 깊다. 갑사에서 출가하고 갑사를 근거지로 일신을 초개같이 버리고 나라를 구하셨음에도 그 동안 역사 속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왔던 영규 대사와 800여 의승군들을 위한 재를 올리고 호국의 발자취를 연구하고 홍보함으로써 그 업적을 오늘에 승화시키는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올 11월 초면 또 어김없이 펼쳐질 갑사 개산대제와 영규 대사 추모재가 벌써부터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한편 지난 해부터는 정월 초사흗날 마을주민들과 함께 괴목대신제(갑사동 용천교 입구의 수령 1600년의 괴목 당산신에게 올리는 제사로 그 동안 명맥만 유지해 왔으나 지난 해부터 대동한마당으로 부활)를 봉행하고 있으며, 갑사의 대대적인 복원불사가 도와 군의 지원 하에 착수될 예정이다.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철저한 고증과 자문을 통해서 올 봄부터 이루어질 대작불사는 사천왕문 건립과 국보급 유물들을 관리 보존하기 위한 성보박물관 건립, 승병장 영규 대사의 추모기념관 건립 등이 그것이다.

전법도량 백제불교회관
수행과 문화와 포교가 한 데 어우러진 열린 공간으로서 거듭난 갑사는 지난 해 대전 둔산동에 대한불교 조계종 대전 전법도량 백제불교회관을 개관함으로써 대전지역의 불교중심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제 채 1년도 안 되었지만 백제불교회관에는 현재 대전청사불자반야회, 중도불교문인협의회, 중앙불교문화연구소, 대불련 대전지부, 대불어 대전지부, 아미타상조회, 대전북부경찰서 불자회, 대전시 중구청 불자회, 대전 세무서 불자회, 언론인 불자회 등 30여 개 불교단체가 함께 활동하고 있어, 시중과 산중의 사찰이 함께 어우러져 수행과 포교와 문화가 자연스럽게 하나로 돌아가는 이상적인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아울러 이번 2002년도 백제불교문화대학(전화 문의 042-483-8214)을 개설, 교양과정(1년제), 전문과정(2년제), 연구과정(1년제)을 통해 우리나라 불교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 교수함으로써 전문 불교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누가 집주인이냐에 따라 그 집안의 가풍과 품격은 달라지는 법이다. 닫혀 있던 도량을 열린 공간으로, 정적인 도량을 살아 움직이는 수행처로 거듭나게 하는 데에는 참으로 오랫동안 찬란했던 백제불교의 중흥을 꿈꾸어왔던 장곡 스님의 큰 뜻이 그 초석이 되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선도해온 불교문화의 산실이기도 한 사찰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거듭날 것인가.
21세기를 흔히들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월드컵 개최를 위한 템플 스테이(temple stay)도 거론되고, 조만간 실시될 주 5일 근무제로 사찰의 역할이 부각되어오고 있는 이즈음 최근 달라지고 있는 갑사의 면면을 보며 그 열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바쁜 가운데 한가로움
그런데 비상하는 듯한 장곡 스님의 전법원력은 그냥 날개를 펼치게 된 것은 아니다.
일찍이 스님은 논산의 관촉사와 부여 고란사의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열악했던 지역 내 불교활성화를 꾀하는 한편 유치원을 세우고 어린이 청소년 청년 등 전법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막상 주지소임을 놓게 되자 몸도 마음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깊은 병이 들었다. 그 동안 알게 모르게 몸도 마음도 주지물이 들었던 모양이다.
고란사 주지를 그만 두었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40을 못 넘길 것이라고들 했다. 그만큼 몸도 마음도 병이 들어 있었다. 그 동안 있던 것 같았던 것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가깝게 느껴졌던 것들이 형체도 안 보였다. 다음생이나 기약해야 할 것 같았다. 옴싹달싹 못할 지경이니 이제는 공부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그래, 변화를 가져보자.’ 모든 것을 접고 선방에 든 스님은 산철이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딴 농가를 토굴삼아 바깥출입 일체를 끊은 채 생식하며 참선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을 보냈다.
그런데 인연사가 그러한가. 금생에는 주지를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지만 또 어찌할 수 없이 주지소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무슨 일을 해도 한 바가 없고, 굳이 빈 공간을 메우려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는다. 그저 잘하는 사람 잘하는 단체의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바쁘기로 치면 요즈음처럼 바쁜 적이 없지만 이렇게 한가로운 때는 일찍이 없었다. 누구를 일부러 찾아가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지만 그저 즐거움 중에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일과 중 도량을 한바퀴 돌고 혼자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이다.
“만년 빙벽 같은 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한여름 더위에 그 어름이 녹아봤자 얼마나 녹겠습니까. 이만했으면 됐겠지 싶어 돌아보면 또 그렇고 돌아보면 또 그런 것이지요. 이제는 ‘나에 대한 관찰’이 재미있습니다. 나를 관찰하고 되돌아보면 조금씩 변화되는 내가 느껴져요.”

고등학교 1학년의 출가
부여 천석군 황부자집 아들로 태어난 스님은 서울 유학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불현듯 장항선을 탔다. 그리고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갔던 무량사로 출가를 한 것이다. 멋진 선승이 되고 싶었다. 다행히 교장선생님의 특별한 배려로 출가 후에도 승복을 입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방학 때면 무량사에 내려와 있곤 했는데 지금도 깊은 화두로 남아있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그 날도 몹시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이었다. 무량사 뒷 산에는 탄광이 있었는데 어느 날 탄광이 무너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보상문제로 유족들의 합의과정이 지연되는 바람에 시신은 일주일이나 방치된 채 있었다. 탄가루에 범벅이 된 시체는 부패될 대로 부패된 채 악취를 풍기며 파리며 벌레가 들끓고 있었다. 유가족마저도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했다. 너무나 충격이 컸다.
‘아,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맨 정신에는 할 수 없었던지 술이 잔뜩 취해서 고무장갑을 낀 채 염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 스님을 붙들고 “불쌍한 사람이니 염불이나 잘해달라”며 흐느꼈다. 가사며 장삼이며 피고름이 범벅이 되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뜯어말렸지만 정말이지 그 순간 아무런 생각도 일지 않았다. 더럽다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마저도 끊어져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열정적인 것은 있었다. 어른들 말씀이 일 한 번 크게 벌일 놈이라고들 하셨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소신을 굽혀본 적이 없다.
무슨 일을 하든 끝을 보고 기도를 하더라도 몸이 부서지라고 해왔다. 그 동안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소진되고 새로 피어오르는 그 환희와 기쁨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 때 펼쳐든 경전 말씀은 왜 그렇게도 가슴 깊숙이 쏙쏙 스며드는지.
잡아야 할 때는 확실히 잡지만 놓아야 될 때는 확 놓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재미없는 스님, 10년을 가까이 있어도 늘 그 거리만큼 서있는 스님, 개인신도를 만들지 않는 스님,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일처리를 잘하는 스님,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스님, 항상 무슨 일인가를 소리없이 해내는 스님,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스님….
천하에 도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되돌아보니 공부도 다 때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은 해도 한다는 생각 없이 다만 주어진 소임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