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의 길이 끊어져야

선가귀감 강설 6

2006-11-12     관리자

제9장

然 諸佛說經 先分別諸法,
後說畢竟空. 祖師示句 迹絶於意地,
理顯於心源

그러나 여러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은, 먼저 온갖 법을 분별해 보이신 뒤에 마지막 공을 설하셨느니라. 조사가 보인 (일구) 화두는 자취가 (학자의) 생각에서 끊어져서 이치가 마음 근원에서 나타났느니라.

제불은 (근기가 다른 중생들의) 만대 사표라, 이치를 세밀하게 돌려서 보이셨고, 조사는 현존 즉시 해탈케 하려는 까닭에 생각이 현통(玄通)하였느니라. 자취라 함은 조사 말의 자취이고, 생각이라 함은 학자의 분별심이니라. 송하여,

胡亂指注 臂不外曲

어지러이 바둥대어도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느니라.

강설

인도의 불교(佛敎)에서 중국의 불도(佛道)로 바뀐 원인은 조사도에 있다. 곧 부처님의 경전 말씀이 달마 조사 이후 여러 조사의 촌철살인 같은 문답, 특히 화두로 바뀐 것을 말한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이다. 스승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치고 제자인 조사의 가르침이 윗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혁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종은 반항아이고 패륜아나, 교종의 아들이나 율종의 아들보다 오히려 아버지를 잘 살린 효자 아들의 몫을 톡톡히 하였다. 만일 선종의 아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불교는 오늘날처럼 세계 종교로서 크게 꽃 피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는 불안한 세계를 안심의 세계로 바꾸는 해결 대안으로 크게 떠오르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제 10장
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碍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之迹, 方顯祖師所示一心, 故云 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有底

여러 부처님이 (둥글게 굽은) 활대처럼 설하셨다면 조사는 (팽팽한) 활시위처럼 설하신 것이니, 부처님이 무애의 법을 설하시어 바야흐로 일미로 돌아가게 하셨으나, 이 일미의 자취마저도 (깨끗이) 털어버려야만, 바야흐로 조사가 보이신 일심이 나타나느니라. 이런 까닭에, 정전백수자 같은 화두는 (화엄경이 나온) 용장에도 들어있지 않다고 하셨느니라.

활대처럼 설하셨다 함은 자상하게 굽은 것을 말하고, 활시위처럼 설하셨다 함은 일직선 곧은 것을 말하며, 용장(부처님의 법문을 보관해 두었다고 하는)은 용궁의 대장경이니라.

한 스님이 조주 스님께 여쭈었다.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 祖師西來意, 달마 조사가 서쪽으로 오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셨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니라)!”

이 말씀은 소위 격외도리의 선지(禪旨)니라. 송하여,

魚行水濁 鳥飛毛落

물고기가 지나감에 물이 흐려지고 새가 날아감에 깃이 떨어지니라.

강설

옷 색깔부터가 다르다.

고봉(高峰) 스님의 행장에 따르면, 천태교학을 익히다가 20세 때 정자사 선원에 들어가 3년 사한(死限)을 세우면서 참선자의 옷으로 바꿔 입었다고 한다. 선사는 회색 옷이고 강사와 율사는 흑색 옷과 청색 옷이다.

비평한다면, 지금 선방스님이 강사나 율사와 같이 똑같은 옷을 입은 것처럼, 조사어록을 강의하는 법이 일반 법사와 같고, 생활하는 법도도 율사와 같고, 경전을 강의하는 스타일도 강사와 같다.

언뜻 보기에, 선사가 부처님의 경전을 설함에 강사와 같이 설함은 당연한 듯해보이나, 크게 굽어있는 것이다. 이 까닭은 선사의 법문에서 팽팽한 활시위의 에너지가 사라졌고, 불꽃처럼 훨훨 타오르는 정진 힘이 미약한 탓이니, 달마 후예의 충천하는 기상이 아쉬운 때이다.

제 11장
故 學者先以如實言敎, 委辨不變隨緣二義, 是自心之性相. 頓悟漸修兩門, 是自行之始終然後, 放下敎義. 但將自心 現前一念, 參詳禪旨則 必有所得, 所謂出身活路

이런 까닭에 학자는 먼저 실다운 가르침의 말씀으로써, 불변과 수연 두 뜻이 자심의 성품과 모양이며, 돈오와 점수 두 문이 실제로 수행할 시작과 끝임을 잘 판단한 이후에 교의를 놓아버려야 하느니라. 다만 자기 마음 안에서 바로 현전 일념으로 선지를 잘 참구한다면 반드시 소득이 있으리니 소위 이것이 (몸을 건져내서 살리는) 출신활로니라.

상근기의 큰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런 형식에 들지 않으나, 중·하근기는 여기서 건너뛰지 못하느니라. 교의라는 말은 불변이 곧 돈오이며, 수연이 곧 점수임에, 돈오-불변이 먼저 있고 점수-수연이 뒤에 있다는 뜻이다.

선법이란 말은 일념 중에 불변과 수연, 성상과 체용이 원래 한시한때라, 둘이 떨어졌어도 떨어진 것이 아니고, 또한 같으면서도 같은 것이 아닌 까닭에, 종사는 법만 의지할 뿐, 말을 잊어서 바로 일념에 견성 성불할 뿐이니 교의를 놓았다 함은 바로 이것이니라. 송하여,

明歷歷時 雲藏深谷
深密密處 日照晴空

명명백백한 (밝은) 시간, 깊은 골짜기에 구름이 끼었음이여!
심심밀밀한 (고요한) 곳, 맑은 하늘에 태양이 떠오름이여!

강설

明明百草頭 明明祖師意

명명백백한 수천 수백 가지 풀잎마다
명명백백한 조사의 뜻이 살아있음이여.
명명백백, 심심밀밀 등의 표현은 활구 참선 공부가 밝고 뚜렷하면서 지극히 고요한 선정삼매에 든 것을 말한다.

제12장

大抵學者 須參活句, 莫參死句.

대저 학자는 반드시 활구만을 참구할지언정 사구는 참구하지 말지니라.
활구로 얻어내면 불조와 같은 스승이 되나 사구로 얻어내면 자기 자신도 건지지 못하느니라.

이하는 특별히 활구를 말하여 스스로 깨달음에 들게 하였느니라. 송하여,

要見臨濟 須是鐵漢

임제 스님을 만나려면 바로 (쇠붙이같이 냉철한) 철인이어야 하느니라.
평하여, 화두에 구문(句門)과 의문(意門) 두 문이 있느니라. 참구라 함은 (지름길의) 경절문1) 활구(活句)이니, 마음길이 끊어지고 말의 길이 끊어져야 모색할 연고가 사라지는 것이며, 참의라 함은 (굽어 돌아가는) 원돈문2) 사구(死句)이니 이치의 길이 있고 말의 길이 있어서 요리조리 사량 분별함이 있는 까닭이니라.

1) 경절문(經截門): 모든 언어와 문자, 이론과 사유의 범주를 초월하여 화두를 잡아 단계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증과(證果)를 얻는 수행문(修行門).

2) 원돈문(圓頓門): 부처님의 가르침, 즉 교학을 통해 원만하게 단번에 깨달아 부처될 수 있는 수행문.


강설

최근 들어 활구 참선을 가장 많이 주창한 사람 가운데 한 분은 주안 용화사 전강(田岡) 큰스님이시며 대를 이어서는 송담(松譚) 원장스님이시다. 북송담(北松譚) 남진제(南眞際)란 말이 통한다면 이 선지식들은 가히 현시대의 생불(生佛)이라고 이름할 만한 분이시다.



지묵 스님|1948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 1976년 조계산 송광사로 출가하여 법흥 화상을 은사로 득도한 이후 각종 수련회를 이끌고 걸림 없는 다양한 글쓰기, 방송 매체를 통한 생활 불교를 전파하고 있다. 『초발심자경문(난자집)』, 『산승일기』, 『나마스테』, 『날마다 좋은 날』, 『봉주르, 길상입니다』, 『초발심자경문(영인본)』, 『죽비 깎는 아침』 등 20여 권의 책을 펴냈다. 현재 수원 아란야 원장으로 대중들과 더불어 수행정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