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가출, 종지부를 찍다

불광이 만난 사람/소설가 김성동 씨

2007-09-30     관리자

오대산 중턱의 낡은 토굴에서 만난 김성동 씨는 매우 슬퍼보였다. 보살의 비원(悲願)이 서렸다고 해야 할까. 끝없는 가출, 종지부를 찍다 문득 한 시인의 말이 떠올랐다.
“김성동은 머리를 길러서도 언제나 스님. 미귀(未歸)의 나그네 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길바닥도 역시 무문관(無門關)이다.”- 김지하” 그럭저럭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 중생들의 살림살이일진대, 문학과 삶 속에서 인생의 실상을 추구해가던 작가가 이제 세속 나이 오십 중반에 재출가를 꿈꾸며 산에 든 것은 무엇 때문일까? 책장 옆에 써붙인 ‘비사난야〔非寺蘭若: 절은 아니로되 난야(삼림을 뜻하는 범어, 비구가 숲 속에 살았기 때문에 후에 변하여 寺院의 뜻으로 쓰임)〕 미륵사상연구소’라는 글씨와 옆방에 촛대, 향로 등속과 함께 정성스레 모셔 놓은 미륵불…그것만으로도 지난 해 5월 출간된 그의 본격구도소설 『꿈』과 얼마 전 주인공 법운이 재입산하는 것으로 결말 부분을 초판과는 정반대로 개작해 화제가 되고 있는 개정판 『만다라』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보다는 수좌로 살고 싶었다 .
“늘 임시정거장에 있는 것같이 살았지요. 불교, 부처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불교를 비방하겠어요. 마음은 늘 수좌이고 싶었어요.” ‘다시 태어나도 인생의 근본문제를 뚫어내기 위해 온몸을 밀고 들어가는 수좌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는 김성동 씨, 산문에서 추방된 일이 얼마나 큰 상처였을지 상상이 간다.
짧게나마 그의 약력을 되짚어보면, “서라벌 고교 3학년 때 19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10여 년간 불문(佛門)에 들었다가 1976년 하산하였다.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모집에 단편소설 「목탁조(木鐸鳥)」가 당선되었지만 불교계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등록하지도 않았던 승적에서 제적당하기도 했다. 1978년 중편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였고, 이듬해 장편으로 개작한 만다라를 출간하여 문단과 독서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5년 제4회 신동엽창작기금, 1998년 제7회 행원문학상을 받았다. …”
하산한 지 삼십여 년, 가정을 꾸리고 글을 쓰고 유명 작가가 되었어도 여전히 운수납자이길 원하는 그가 슬프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화두는 순일한가?
10대 후반,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산문에 들게 한 것일까?
“삶도 막막했고, 내 인생에 가장 큰 문제였던 아버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었지요.”
그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엔 좌익활동을 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사상범은 모두 처형하라’는 지시로 대전형무소에서 학살당했다.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아버지의 이력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아들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번민했다. 그리고 ‘답답하고 힘겹기만한 오탁악세의 이치와 삼라만상의 참된 이치를 막힘없이 두루 깨우친 부처가 되어 이 세상의 온갖 악을 멸하고 선을 받들어 행하기’ 위해 산문에 들었다.
“은사스님이 그립군요.”
그의 눈망울엔 벌써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다.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이 있던가? 번뇌가 큰 만큼 치열하게 수행하였기에 불칼 같은 성미의 당대 대선지식이었던 지효 큰스님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머리 기르고 첫 월급을 받아 내의를 사가지고 찾아뵈었는데 ‘화두는 성성한가?’ ‘화두가 순일해야 하느니라’라는 말씀밖에 없으셨지요. ‘세상살이가 힘들지?’라는 인간적인 풍모를 기대했는데, ‘어떻게 저토록 냉정할 수 있는가’하고 원망섞인 마음으로 일주문을 나서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나를 여전히 수좌로 보시는구나.’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환속한 제자를 여전히 눈 맑은 납자로 대하시면서 수행을 독려하는 은사스님의 사랑을 깨닫고 통곡했다.
“당신은 이미 내가 문자속으로 갈 것을 아셨는지 일본 유학을 주선해주셨는데 신원조회에 걸려서 뜻을 이룰 수 없었지요.”
하산하고 나서도 지효 스님께서는 또 유학길을 주선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그는 끝내 유학을 갈 수 없었지만 스승의 사랑은 인생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
“저는 인간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왜 외로운 존재인가? 어떻게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가 제 화두였지요.”
그는 화두야말로 문제의식, 목표를 뚫어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를 수좌의 길로, 소설가의 길로 인도한 것도 어찌 보면 외로움이라는 화두 때문인지 모른다. 난생 처음 써본 소설이 당선된 것도 소년시절 외로워서 읽어댔던 수많은 독서 덕분일 듯. 어쨌든 그는 하산 후 ‘인간 존재의 외로움’에 대한 화두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숱한 문학작품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세간에서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외로이 떠돌았다.
“사는 것이 순탄치도 않고 한동안 문학을 놔버렸지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절 근방으로 다니고 있는 겁니다”.
김해 백룡암, 충북 영동 영국사, 내설악 백담사, 양주 봉선사 등에서 한 철씩 살고, 또 떠돌아다니다 무당집에서 한 철 살기도 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본래 자리에 들기 전에는 떠돌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외로우면 계(界)를 바꿨는데도 떠돌겠습니까?”

미륵고루살이, 새 희망의 공동체
71년도 수좌시절, 지리산 칠불사에서 머무는데 여기저기 울부짖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간혹 환시도 보였다. 팔다리가 잘리고 목이 잘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드는 중음신들, 화두를 들어도 끊어지고 경전을 읽어도 물러가지 않았다. 미륵존불 염불을 하며 기도했다.
“내가 미륵을 부르는지 미륵이 나를 부르는지 모를 정도였지요.”
미륵존불 염불삼매에 들어 배가 고픈지 잠이 오는지도 몰랐다. 따져보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미륵존불과의 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저 방에 모셔놓은 미륵부처님은 지난 해 현몽으로 모신 것입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살 때 봉선사 아래 마을의 축사(畜舍)를 개조하여 우사암(牛舍庵)이라 이름짓고 살기도 했다. 지난 해 8월 물난리가 났을 때 그 또한 공업중생의 숙명을 짊어져야 했다.
“‘꿈’ 원고를 정신없이 쓰고 있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보니 벌써 물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원고를 찾기 위해 다시 들어갔는데 금세 물이 배꼽까지 밀려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천장 분량의 『마하신돈』 초고를 포기하고 말았지요.” 몇 년간 공들여 써놓은 원고와 자료가 모두 떠내려가고 나서 얼마나 망연자실했는지 모른다. 언제부터 작심해온 미륵삼부작(궁예, 묘청, 신돈)이었던가.
“비몽사몽간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나좀 꺼내 줘. 내가 도와줄께’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하도 이상해서 주위를 살펴보니 모래더미 속에 저 부처님이 반쯤 드러나 계셨습니다.”
그는 이즈음 미륵부처님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조석 예불을 드리고 108배도 하고, 경전을 읽기도 한다.
“사실 예전에는 부끄러워서 내 책을 사보라는 말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종잣돈이 필요해서 사보라는 말을 합니다.”
그가 이제라도 문학적인 복권(조계종 기관지인 불교신문에 꿈을 연재한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뿐만 아니라 승단에서 전면 복권되어 정각(正覺)이라는 법명과 수좌로서의 자리를 되찾고자 하는 것은 다른 데 있지 않다.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이는 세상에 희망이 없습니다. 신비한 게 사라지고 꿈과 희망이 사라진 세상 아닙니까? 인류가 목적 자체를 바꾸고, 성공 개념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미 서구의 학자들은 기독교의 종말을 고하고 불교에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는 미륵사상에서 그 희망을 찾았다. 미륵사상을 토대로 모두가 고루 화합하여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사람과 자연을 나눠보고 나와 남을 나눠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불교는 나와 남, 자연과 사람을 나눠보지 않았어요. 뜨거운 물을 마당에 버리면 난리가 났습니다. 땅 속의 미생물이 죽을까봐, 급하게 버리면 놀라니까 조금씩 버리게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생명사상입니까?”
그는 인생이 슬프고 세상살이가 막막한 사람들은 미륵고루살이에 모두 들어오라고 한다. 빗나가고 있는 오늘날 전체 문명에 대한 불교적 응전이라고 할 만한 미륵고루살이를 혼신을 다해 꾸려갈 것이란다.
“내가 자신있고 당당한 것은 나를 빼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아(無我)를 말하고 있었다. 아, 그가 다시 산으로 간 것은 시인의 예언 같은 말처럼 길바닥에서 화두를 타파하고 그 깨달음 중생과 나누기 위해 보임(保任)에 든 것이리라. 그 순간 미륵부처님께서 환하게 웃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