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9.왕사성과 죽림정사가 있었던 라즈기르

신 왕오천축국전 별곡 9

2007-09-29     김규현

인도대륙 최대의 불적지군(佛蹟地群)

보드가야를 떠난 혜초 사문의 발길은 자연스레 라즈기르에 도착했다. 흔히들 불교의 ‘4대 성지’를 말할 때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성도지 보드가야,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입멸지 쿠시나가르를 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혜초 사문은 룸비니 대신에 라즈기르의 왕사성을 들고 있다. 이는 그만큼 혜초가 라즈기르를 중요시하여 이 곳에 오래 머물며 보고 듣고 했음을 의미한다.

혜초가 왔을 당시의 이름이 라자가하(Rajagaha)였던 왕사성 주변에는 불적이 즐비했다고 한다. 현재, 찬란했던 불적들이 철저히 파괴된 인도대륙에서, 그래도 초기불교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을 들라면 우선 라즈기르를 먼저 꼽을 만큼 이 곳에는 아직도 초기불교의 기념비적인 흔적들이 즐비하다.
라자가하는 붓다의 생존시에 존재했던 마가다(摩揭陀)왕국의 수도였다. 이 마가다국은 ‘고대 16국’의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이런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신흥대국의 국왕 빔비사라(Bimbisara)는 붓다의 45년간에 걸친 전법 일생에서의 첫 강력한 후원자였다.

왕은 붓다와 그 제자들을 위해 수행처, 즉 죽림정사를 마련해주고 우안거 동안의 수행지인 영취산으로 가는 전용도로도 닦아주었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부친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 아자타사투루왕도 마찬가지여서 이 때 불교는 교단, 즉 ‘상가람(Sangharam, 僧伽)’의 기틀을 갖출 수 있었다.

불교는 처음부터 종교로 시작되지는 않았다. 단지 사회 개혁 성향의 신진사상이었을 뿐이었다. 수행자 고타마의 주장은 인간평등에 있었다. 특히 인도의 뿌리 깊은 카스트(Cast) 제도의 타파에 있었다.
그는 민중에 편에 서서 “사람은 누구나 출생에 따라서 신분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브라만은 출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행위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라는, 당시에는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선언을 했고 이를 평생 실천했다.

물론 고타마 자신도 브라만이 아니었기도 했었지만 당시는 브라만이 주도해온 사회가 사제들의 부패로 많은 병폐가 드러나고 있었을 때였기에 도처에서 반(反) 브라만 사상이 성숙되던 시기였다. 이런 결과로 고타마 사문은 브라만 사회에서는 기피인물로 배척을 받았지만, 반면 사제의 전횡을 못마땅해하던 신흥국가 왕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국왕들의 통치와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 원인도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국왕은 브라만의 견제세력으로 불교라는 신흥사상을 이용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의 권력과 금력은 종교라는 집단이 거대해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기에 불교는 붓다 재세시(在世時) 이미 ‘종교’의 골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붓다는 전법륜의 첫 해라는 중요한 시기를 든든한 후원자 아래서 보내며 수천 년 이어갈 승가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이것이 라즈기르의 불교사적 첫 번째 의미라 할 수 있고, 다음으로는 불경의 첫 결집(結集)이 이루어졌던 곳이요, 그 모든 역사의 현장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는 후에 마가다에 이어 마우리아왕조를 세워 인도를 처음으로 통일하고 역시 이 일대에 수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지은 아쇼카왕의 원력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하겠다.

죽림정사(竹林精舍)와 칠엽굴(七葉窟) 그리고 영취산(靈鷲山)

자, 지금부터 부지런히, 붓다와 그의 직계 제자들의 체취가 배어 있는 유서 깊은 흔적들을 돌아보도록 하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즐비하게 널려 있기에 이를 다 돌아보려면 하루 이틀의 일정으로는 턱없이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먼저 불교 최초의 수행처인 ‘벨루바나 비하르(Veluvana Vihar)’ 즉 죽림정사(竹林精舍)로 가 보기로 하자. 이 곳은 라즈기르 순례의 기점이 되는 온천광장 앞에 있어서 라즈기르에 머무는 내내 수시로 울타리 너머로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름처럼 울창하지는 않지만, 현재도 죽림정사는 죽림 속에, 연못 가에 있었다.

붓다 당시에는 성의 북문 밖 교외에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거의 시가지의 중심지였다. 수행처로서의 조건으로 붓다가 내세웠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한적한 곳’이고 연못 가에는 공작이 노니는 아름다운 곳이었기에,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3년 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410년, 이 곳을 찾은 법현(法顯)은 “두 개의 가람이 있고 몇몇 승려들이 죽림정사를 청소하고 있었다.”라고 하였고 640년에는 현장도, “산성 북문에서 약 1리 남짓 가면 칼란다카 죽원(竹園)에 이른다. 지금도 정사가 있는데 동쪽으로 문이 나 있다. 붓다는 이 곳에 오래 계시면서 중생들을 교화제도하셨다. 지금도 여래의 몸과 같은 상이 서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정사에서 시내 쪽 길의 좌우로 눈을 돌려보면 붓다의 유해를 안장했던 아쇼카와 아자타왕과 아난존자의 사리탑이 지척에 있고 뒤로는 유명한 바이바라온천도 들려볼 만한 곳이다. 붓다가 빔비사라왕과 함께 자주 애용하였다는 곳이다. 지금도 힌두교와 자이나 교도에게 인기가 많아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로 하여 온종일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온천을 끼고 바이바라(Vaibhara) 산을 오르면 가섭존자가 수행했던 피팔라 동굴이 보이고 다시 산을 오르면 정상 근처에 불경의 제1차 결집처(結集處)인 삽타파르니(Saptaparni) 동굴에 이르게 된다. 약 7개의 동굴로 이루어졌기에 ‘칠엽굴’이라 한역된 곳인데 5백 명의 대중이 모여 큰 일을 하기에는 턱없이 협소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곳이지만 이름이야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B.C 483년 붓다의 입멸 3개월 만에 이곳에서 큰 제자 가섭의 주도하에 붓다의 육성을 되살려서 기록하기 위해 5백 명의 아라한과 이상을 증득한 비구들이 모여 불경을 만들었다. 현장은 그 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아난은 물러나와 조용한 곳으로 가 용맹정진을 했으나 최후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다만 ‘아라한과’만을 얻어 결집회장으로 달려갔다.

이에 가섭존자는 ‘그대가 번뇌를 벗었다면 문을 통과하지 말고 들어오라.’ 이에 아난은 신통력으로 열쇠구멍을 통해 들어가 겨우 말석에 앉게 되었다. 이때가 안거(安居)의 초15일이었다. (중략)

가섭은 소리 높여, ‘잘 생각하고 분명히 듣기 바랍니다. 아난이 여래의 말씀을 잘 듣고 있었음은 여래도 칭찬했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장(經藏, 修多羅)을 결집하고, 우바리는 율(律)을 극명하게 연구하고 있음을 중인이 아는 일이므로 그가 율장(毗奈耶)을 결집하고 나는 논장(論藏, 阿毗達摩)을 결집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장마철 3개월 동안에 삼장을 결집시켰다. 대가섭은 모든 승도 중의 상좌이었기 때문에 이 결집을 ‘상좌부 결집(上座部結集)’이라고 한다.”

아무도 없는 동굴 앞마당에 앉아 회상삼매에 빠져 있다 깨어나니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는데 눈 아래로는 라즈기르 시가지 위로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멀리 건너다 보이는 영취산에도 저녁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아, 아니차(Aniccha, 無常)! 아, 기자쿠타(Gijhakuta, 靈鷲山)여, 문득 현실 같은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야에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35세의 청년 고타마 사문이 사르나트에서 얻은 첫 제자인 다섯 비구와 재가제자 야사의 무리와 신통력으로 항복 받아 개종시킨 배화교도였던 유명한 카샤파 3형제의 무리와 함께, 총 1천2백50인을 거느리고 지금 막 성의 남문을 통해 라티숲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곳에는 이미 소문을 듣고 마중 나온 국왕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설레임 가득 안고 이 소문자자한 사문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불교의 시작을 만천하에 알리는 ‘라자가하의 역사적인 대행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