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善惡)의 의미 1

권말기획/ 교학강좌

2007-09-29     관리자

불교의 인과관계는 동력인에 의한 예측가능성을 바탕에 둔 것임을 앞 시간에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생과 중생끼리도 마치 중생과 자연물의 관계처럼 필연적인 원인과 반응의 관계가 성립하느냐? 칸트의 얘기대로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는 거예요. 결과가 예측이 되어야 된다고 했는데 A라는 중생과 B라는 중생이 있을 때 A라는 중생이 B라는 중생에게 가하는 작용〔업〕에 대해서 B라는 중생의 반응〔보〕이 예측이 가능하다면 인과라는 말을 써도 되는데, B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예측을 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할 수가 있어요.
왜 예측을 할 수 없을까요? 예측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상대방인 B도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랬지요. 의지가 무엇입니까? 의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한 번 해볼 수 있습니다. A의 작용에 대해서 B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첫째 A가 일으키는 작용의 성격을 다시 한 번 규정해 봅시다. A는 어떤 작용을 일으킵니까? 편하고자 하는 육근(六根)의 의지적 활동, 즉 업(業)을 일으키죠.
그러면 B가 보이는 반응에 대해서 한 번 얘기해 보죠. 반응을 예측하지 못해서 그렇지 뭔가 반응을 보이긴 보일 거예요. 일단 이 반응의 성격에 대해 첫 번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그런 반응을 보일 것으로 말해야 됩니다. 여기서 ‘정확치 않다’는 말은 중생과 물질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런 작용과 반응에 견주어서 한 말입니다. 나와 책상과의 관계, 나와 자동차와의 관계는 중생과 자연물의 관계입니다. 이 때 중생이 일으키는 의지적인 작용에 대해서 자연물이 보이는 반응은 필연적이죠. 이 때를 보고 우리가 정확하다고 표현한 것이죠.
그런데 똑같이 의지가 있는 A와 B의 작용 반응의 관계를 살펴보면 A의 의지적 작용에 대해서 B가 일으키는 반응이란 어떤 반응일지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합니다만,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도대체 이런 반응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이런 반응을 어떤 반응이라고 부처님은 표현하셨을지 생각해 보면서, 일단 ‘인과의 법칙’에 대한 논술은 어느 정도 정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종류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처럼 상호간에 의지가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도 인과가 성립하는가 하는 것에 주의를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또 인과에 있어서의 원인이라는 것은 뭔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에서 원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들을 쭉 전개했었습니다. 인간과 인간처럼 의지를 가진 존재가 의지를 가진 존재에게 행위를 했을 때, 그 의도적인 행위에 대하여 보인 반응에 대해서 우리가 예측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공감을 갖고 얘기들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각자 생각해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차가 한 대 있다고 합시다. 내가 차에게 의도적 행위를 가하면 그 차라는 것은 반드시 나의 의도에 맞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예측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 내가 타인에게 어떤 의도적인 행위를 가했을 때는 내가 차에게 어떤 의도적 행위를 가했을 때와는 사뭇 다를 것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타인도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와 같이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예측이 불가능한 그러한 관계에는 인과라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해야지 우리가 지금까지 전개한 논리에서는 일관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인의 행위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거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이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요. 우리는 그러므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혀 엉뚱하지도 않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다라는 것을 또한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런 반응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느냐? 한마디로 이렇게 말하면 좋겠습니다.
선한 업을 지었을 때는 선한 반응을 보일 것이요, 악한 업을 지었을 때는 악한 반응을 보인다. 그렇게 표현하면 어떻겠습니까?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하지만 선(善)에는 선, 악(惡)에는 악, 이 정도는 예측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거지요. 이것이 불교윤리의 표준이 되는 개념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무엇을 보고 선이라고 정의할 것이냐 하는 겁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요? 선이라는 개념이 윤리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선이란 신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선이라고 합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못 가지는 주장입니다. 기독교적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선의 개념을 어떻게 잡고 계시느냐 하면 일종의 공리주의적 개념에서 잡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절대 다수의 절대 행복을 꾀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곧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꾀하는 행위가 있다면 그 행위를 일러 선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의지를 가진 내가 의지를 가진 존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라는 말은 우리가 쉬운 말로 하자면, 사회 속에서 존재한다는 말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있다고 합시다.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 모두가 나와 마찬가지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어떤 행위를 일으킨다면, 그 행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목적으로 행위를 일으킵니까? 그것은 바로 육근의 편안함을 위해서입니다. 편안함을 다른 말로 이익(利益)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상하고 괴로워서 나라고 할 수 없는〔無我〕 이 존재에 대해 영원하고 즐거운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일으키는 업(業), 이것이 결국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결국 나의 행위는 그와 같은 식으로 편함을 추구하는 행위이거니와 이러한 나의 행위가 무엇을 향하여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 그 다음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나의 행위가 의지가 없는 대상을 향하여 일어난다면, 대상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반응을 보인다고 했죠. 그와 같은 행위가 나와 똑같이 의지를 가진 타인에게 행해진다면 타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문제의 초점이에요.
그런데 타인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입니까? 타인도 편함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나만 육근의 편함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도 역시 육근의 편함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도 타인도 의지가 있어서 전혀 엉뚱한 것 같지만, 나든 타인이든 중생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여러분, 나의 행위가 나와 타인의 편함까지 함께 추구했을 때, 어떤 일을 예측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인은 나의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순응하겠지요. 이 정도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타인의 편함까지 고려해서 내가 어떤 업을 일으켰을 때 타인이 거기에 대해서 반항하거나 거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게 되었을 때, 내가 처음 하고자 했던 일이 쉽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쉽게 이루어지지요. 이것도 역시 예측가능한 일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그 다음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 하면, 내 뜻대로 되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주재성(主宰性)이라고 했지요. 주재성이란 다른 말로 하면, 즐거움이라고 했지요. 우리가 왜 괴롭다고 했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괴롭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역으로 자기 뜻대로 돼버리면 그것은 즐거움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처음에 우리가 전제했던 선에 대한 정의를 한 번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꾀하는 행위가 있을 때, 그 행위에 대해서 선하다는 표현을 쓸 수가 있겠지요. 그럴 때 거기서 말하는 행위라는 것이 바로 업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까지 고려하였을 때, 우리가 선업(善業)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내가 선업을 짓게 되면 최종적으로 어떠한 상황에 도달하게 되느냐 하면 즐거운 과보(果報)가 나타난다고 요약해 볼 수가 있습니다. 선한 원인에는 즐거운 결과가 나타난다는 선인락과(善因樂果)라는 표현은 의지를 가진 존재들끼리의 관계에서 쓸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무엇을 보고 선업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면, 남과 나의 이익을 함께 추구하는 것을 선업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업을 지은 결과 나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뜻이 잘 이루어짐으로써 뜻대로 되어진 그 상태가 자신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즐거움의 갚음이 돌아온 것입니다.
애초에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라는 말이 성립될 때는 바로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처음에 성립되었다는 것을 명심해 두셔야 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도움이라는 개념입니다. 결국 선한 업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도움을 불러들일 수 있는 행위들이 선한 것입니다. 도움을 불러들일 수 없는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악한 것이다 하는 역추정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악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반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하여 어떤 행위를 하였을 때, 그 행위를 악업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타인의 행복을 무시하고 나의 쾌락만을 위한다고 하면, 나의 행위에 대해서 이번에는 거역하고 방해하겠지요. 부처님께서도 지혜뿐만 아니라 복덕(福德)을 갖추신 분이라고 합니다. 아나율(Aniruddha) 존자가 눈이 멀어서 바느질을 하고 있을 때, 바늘에 실을 꿸 수 없어서 “누군가 옆에 있다면 저를 도와서 무한한 복덕을 지으십시오.” 합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옆에 계시다가 조용히 바늘에 실을 꿰어줍니다.
아나율이 부처님인 것을 알고 “부처님께서도 복을 더 지으실 것이 있어서 이렇게 저의 바느질을 돕습니까?” 합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나라고 왜 복을 짓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내가 아직도 다 못한 것이 있다면 복을 짓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 복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재산은 상속될 수 있지만 복은 상속되지 않는다고 하지요. 도움을 불러들이는 인자(因子)를 복(福)이라고 합니다. 의지를 가진 다른 육근의 도움을 불러들이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복이 많다는 것은 보다 많은 도움을 불러들이는 인자를 갖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떨 때 타인들은 그를 돕게 되는가? 그가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행위를 할 때 그를 도와줍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언제든지 선업을 짓고자 하고 많이 짓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업이란 공동체의 이익을 꾀하는 행위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 선악의 개념이라는 것은 공동체의 이익을 꾀하느냐, 개인의 사리사욕에만 치우치느냐 하는 것에 선악의 기준이 있습니다. 따라서 선이라는 것은 늘 공동체라는 것이 전제됩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선이냐 악이냐가 결정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