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들에게

징검다리

2007-09-29     관리자

얼마 전에 레스토랑에서 은행으로 일자리를 옮겨간 보살님 한 분이 전화를 했다. 내용인즉 은행 매니저가 본부로부터 내려온 당일 장사에 필요한 돈을 세다가 돈에 흰 가루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혼비백산해서 911에 신고했는데 소방서 경찰차들이 줄을 잇고 우주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일대 조사를 벌리고 은행직원들도 손과 얼굴을 씻고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TV에서나 보았던 우주복을 입고 퇴근을 했는데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커피를 한 잔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았는데 그 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하는데 감당이 안돼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사는 게 무엇인지부터 시작해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수도물도 마음놓고 못 마시겠다는 것이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테러에 대한 불안들은 더욱더 심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시내중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자신 같은 평범한 소시민과는 거리가 먼 얘기인줄 알았는데 오늘 그 일을 겪고 나니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님을 실감한 모양이다.
이 곳 미국에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아직 맨하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최근에는 앤스렉스(anthrax:탄저병)를 유발하는 흰 가루가 우편물로 배달되는 사건으로 인해서 나라안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이곳 뉴잉글랜드 지방은 각지에서 몰려오는 가을 단풍객들로 가득한데 올해는 그렇지가 못한 모양이다. 객실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던 호텔들은 저마다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공짜 지하철 티켓을 제공하는가 하면 레스토랑에서는 영화티켓을 선물하고 시당국에서도 시내 한복판에 무료주차시간을 늘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쌍둥이 빌딩을 무너뜨린 비행기가 보스톤 공항에서 발생하는 바람에 테러공포에 불안해하는 단풍객들의 발걸음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지금 이 곳 우리 서운사가 위치한 마을은 가을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리도 호수도 형형색색으로 화려하면서도 들뜨지 않은 차분함으로 아름답다. 문밖을 나서서 어디를 보아도 그냥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보여지는 장면마다 마음으로 틀을 만들어 끼워서 액자를 만들어 본다.
틈나면 호수가 바위에 앉아 두 손바닥으로 양 시야를 가리고 멀리 호수의 저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으면 바람결에 이는 물결을 따라 나를 태운 바위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속도도 빨라진다.
한참을 가다보면 문득 현기증이 나고 금방이라도 물 속에 빠질 것 같은 불안에 두 손을 떼고 옆을 보면 호수 한가운데를 가고 있던 나는 없어지고 다시 바위에 걸터앉은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8년 전 처음 이 곳 미국에 왔을 때도 가을이었는데 굳이 따로 어디를 운전해 갈 필요도 없이 보이는 곳마다 집집마다 골목골목이 단풍으로 가득했는데 참으로 아름다웠었다. 그때 처음으로 서럽도록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죽음의 불안 때문에 이 아름다움을 즐길 여유가 없다.
죽음에 대한 인간의 불안은 인간의 존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삶이 있는 한 죽음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살만큼 살고 남들보다 몇 십 년 더 살았다고 해도 죽음은 여전히 두렵고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만들어내고 영생을 약속 받았지만 여전히 죽음에 대한 불안은 해결되지 않았다.
아무리 신을 믿고 천국을 보장받았어도 아예 미쳐버린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아름다운 천국에 갈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무의식은 분명 신은 토끼의 뿔이나 아이 못 낳는 여인의 아이처럼 오직 이름과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죽음의 불안이 낳은 부산물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그 자체를 맛보고 체험하는 그 순간 순간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하는 순간을 버려둔 채 과거와 미래를 염려하고 집착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정으로 삶의 소중함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존재하는 그 순간을 살아갈 줄 아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그 순간에 머무를 줄 아는 사람들은 그 순간 순간을 전 존재로 살기 때문에 이전의 순간이나 이후의 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간 순간 삶과 죽음을 반복하기 때문에 죽음을 삶과 따로 분리시켜 인식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러한 사람들의 삶을 두고 선(禪)이 바로 평상심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 그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하는 체험에 머무를 줄을 알기 때문에 상대방이 떠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사랑 그 자체에 존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은 존재하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머무를 줄을 알기 때문에 죽음이 오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살아있는 그 사실을 최대로 기뻐하고 감사할 뿐이다. 그들은 너무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나머지 더 오래 살고 싶거나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어쩌면 삶의 순간을 충분히 즐기고 사랑할 줄 모르는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집착 또한 삶 그 자체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체험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질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알고 즐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물질을 모으는 일에만 집착한 나머지 도둑을 두려워하듯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일수록 더 오래 사는 일에 집착하여 죽음을 두려워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삶을 사랑하고 매순간 순간에 머무르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또한 선의 상태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전화한 보살님이나 현재 이 곳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어야된다는 그런 실존적 불안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다 생생한 환경적 불안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순간에 머무르기 위한 본질적 해결 방법이나 가르침이 당장은 비효과적으로 느껴진다. 그것보다는 극락과 천국을 약속하는 편이 훨씬 위안이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테러에 불안해하는 미국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본질을 알고 직면하기보다는 죽음의 진리를 부정하고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는 교회에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일시적 현상이 일어난 모양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일단 불교의 윤회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그들은 영생이나 부활보다 훨씬 더 매료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단 불안에 휩싸여 전화한 보살님의 명이 그렇게 짧거나 테러의 희생자가 될 만큼 운이 나쁘지 않음을 알려주고 다가오는 법회날에는 좀 더 일찍 와서 기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