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天惠)의 비경 속 문수도량

설화가 깃든 산사기행/ 백화산(白華山) 반야사(般若寺)

2007-09-29     관리자

속리산천황봉에서 내려서기 시작한 백두대간이 형제봉(803m)과 봉황산(741m)을 지나면서 몸을 더욱 낮추어 화령(火嶺, 320m)과 추풍령(秋風嶺, 220m)에 길을 내주고는 숨을 고른다. 저 앞 황악(1111m)과 덕유산(1614m)이 멀지 않다.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가로지르는 고갯길이라지만 화령과 추풍령은 이제 옛날과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보은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25번 국도를 타고 가자면 그저 훌쩍 넘게 되는 낮은 고개, 화령이 그렇고,‘구름도 자고 가고, 바람도 쉬어 가는’4번 국도 위의 추풍령 또한 고속도로로 대간을 넘는 또 다른 추풍령에 제자리를 내주고는 고즈넉이 옛 명성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지리·문화적으로 그만한 역할을 맡아왔던 고개에만 허락했던 그 출중한 이름 ‘령(嶺)’. 그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화령과 추풍령이 문경의 새재(鳥嶺)처럼 오늘날 교통의 발달로 그저 잠시 쉬어 가는 고개로 저만큼 먼발치에 서있다. 그러나 아직도 엄연한 백두대간은 화령과 추풍령을 넘어야만 비로소 진짜 영남 땅에 발을 딛게 됨을 묵묵히 일러주고 있다.
백화산(白華山) 반야사(般若寺, 043-742-7722)는 이 화령과 추풍령 사이, 백두대간의 봉황산과 국수봉에서 서쪽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각각 석천(石川, 松川)에 이마를 맞대고 있는 협곡, 천혜의 비경 속에 자리잡고 있는 도량이다.
국립지리원이 제작한 지도에 백화산맥(933m, 捕城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일제가 금돌성을 포획한다는 뜻에서 민족말살을 목적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표기할 정도로 그 산세가 웅장하고 부드러우며 아름다운데 백두대간의 본령보다 한참 높으니 저 멀리서 몸을 낮추고 날개를 펴 올린 봉황의 기상이라고나 해야 할 성싶다. 더군다나 반야사는 태극문양으로 감아도는 물줄기가 자연스레 연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고 있는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니 풍수엔 까막눈임에도 길지란 생각이 절로 든다.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 의상(義湘) 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분인 상원(相源)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는데, 영동군에서 펴낸 책 『내고장 전통 가꾸기』 등에 의하면 세조 10년(1464) 큰 중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복천암에서 법회를 마친 세조가 신미 스님 등의 청으로 중창된 반야사에 들러 두루 살피고는 대웅전을 참배했다고 한다. 충청·경상감사는 물론 인근 고을 수령들이 모두 모여드는 야단법석이었다.
그런데 대웅전 참배를 마친 세조가 법회를 열도록 명을 내리자 어디선가 사자 등에 올라탄 문수동자가 나타난다. 절 뒤 망경대(望景臺)의 영천(靈泉)에 이른 문수동자는 세조에게 기도와 목욕을 권하고는 “상감마마의 불심이 갸륵하시기에 그 공덕으로 말미암은 부처님의 은총이나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망경대 넘어 사라졌다.
영천에서 목욕 후 오랫동안 앓아오던 병이 나은 세조는 절로 돌아와 글씨를 써서 반야사에 하사하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반야사에 전해 내려오는 세조 어필이다. 사자를 탄 문수동자상도 조각되어 최근까지 전해져 왔으나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지난 달 참배했던 복천암의 이야기와 닮았는데 복천암은 물론 망경대와 영천, 세조 어필 등의 관계가 제법 짜임새 있게 얽혀 있어 있음직한 이야기로 솔깃하다.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전해지는 반야사이기에 이 이야기는 영험한 문수도량으로 앞자리에 손꼽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만하다.
이맘 때의 백화산 반야사 참배길은 국도를 따라 다가설 일이다. 앞서 말한 화령을 넘어 상주 들녘의 황금빛을 일궈주신 인연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도 좋다. 길을 잘못 들어 옛 황금면(추풍령면) 신안리 어르신들이 지금도 한양과 부산의 절반이라고 믿는 반고개를 넘어 한적한 추풍령을 돌아오는 길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점점 다가오는 백화산의 빛고운 자태가 봄의 화사함을 뛰어 넘고도 남기 때문이다.

절에 와서 묵은 지 오랜데
집 생각이 전연 안 나는구나
산 빛은 자리에 비춰 푸르고
대나무 그림자는 발에 들어와 성글다
맑은 시냇물은
깊은 골짜기에 소리내며 흐르고
흰 구름 파란 하늘 위에 떠간다
스님은 하던 공부를 이미 끝냈는데
책상 위에 읽던 책이 그대로 남았구나

반야사에 들어서니 국당(菊堂) 박흥생(1374~1446)의 시가 서두르던 마음을 멈춰 세운다. 산사에서 시를 읽는 것도 운치있는데 시를 통해 옛 절의 모습을 더듬어 볼 수 있으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우리 글의 자부심을 드높였던 서거정 또한 국당의 시를 ‘티끌 먼지를 벗어나 참으로 도가 있고 덕이 있는 시’라 하였다니 다시 새겨보는 싯구에 절로 머리를 끄덕인다.
넓고 깨끗한 마당을 지나 대웅전 부처님을 뵙는다. 보현보살, 문수보살님이 함께 정좌해 계신데 모두 경주 옥석(慶州玉石)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몸에 비해 큰 얼굴, 두드러져 보이는 큰 귀가 얼른 눈에 들어오는데 무슨 말씀이든지 다 들어주실 부처님이시다. 극락전 앞 배롱나무(백일홍)에는 아직도 꽃 몇 송이가 피어 있다. 수령 500년이 넘었으니 조선 5백년 반야사 옛일일랑 모두 지켜온 나무인 셈이다.
새벽 4시 시작된 예불이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된다. 지난 밤 이슥하도록 천일기도의 목탁소리가 그치지 않더니 새벽예불의 정성이 더욱 오롯하다. 3년 결사 중이신 주지 성제 스님께서 내주시는 차맛이 또한 향긋한데 포행 삼아 망경대며 비로봉 오르는 길을 앞서 재촉해주시는 넉넉한 마음이 훈훈하다.
내를 건너 비로봉 오르는 길, 백화산을 휘돌아 절 앞을 흐르는 석천과 반야사 전경이 그림 같다. 그 뒤로 문수봉과 주작봉 능선이 백화산맥 관음봉 비로봉 능선마냥 눈에 밟혀 한동안 자리를 뜰 줄 모른다.
절마당에서 바라보니 고려시대의 3층 석탑 너머, 새로 지은 요사채의 검푸른 기와 너머에 흥미로운 형상이 드러나 있다. 비로봉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산봉에서 천년을 흘러내렸을 돌무더기가 쌓이고 쌓여 ‘백화산 호랑이’ 모습으로 반야사를 외호하고 있는 것이다.
성제 스님을 웃음 짓게 하는 또 하나의 든든한 빽(?)을 비로소 눈치챌 수 있었다.
반야사에 주석했던 벽계 정심 선사는 조선시대 불교가 모진 탄압을 받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처럼 보이기 위해 과부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부인은 1년을 살아도 과부요, 3년을 살아도 남남인 것이 못마땅해 떠나겠다고 한다.
선사는 고생했다며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어 떠나보냈고, 그것을 받아든 부인은 동구 밖 샘에서 물 한 모금에 신세타령을 늘어놓다 그만 표주박을 잃는다. 그후 부인은 다른 영감을 얻으려고 3년 동안 헤매다 ‘어차피 과부 신세, 정심 선사를 찾아가면 이름이라도 영감이니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생각하고는 그 길로 선사를 찾아뵙는다.
부인이 올 줄을 알고 있던 선사는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찌 했소?” 하고 묻는다. 부인이 놀라 그간의 일을 다 털어놓자 선사는 “표주박은 아직도 그대로 있을 것이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중이 되기를 5백 번이나 하였소. 처음 중이 되어 지금까지 남의 것은 주지 않는 것을 가져온 일이 없었소. 그래서 무엇이든 내 것이라 이름만 지어 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오.”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부인이 가 보았더니 과연 3년 전 그 자리에 잃어버린 표주박이 그대로 있었다. 이것을 본 부인은 인과의 법칙은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음을 깨닫고 죽을 때까지 선사를 잘 모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함양 벽송사에 전하는 일화나 선사가 황악산 물한리에 처자를 데리고 은거했다는 서술과 유사하다. 정심 선사의 정확한 행적을 확인할 수 없기에 선사의 높은 법력에 견주어 인과의 법칙을 잘 드러내고 있는 반야사의 이야기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조선조 억불의 시대, 세조에 의해 중창된 반야사에 서산 대사에게로 선맥을 이어준 정심 선사의 이야기가 뚜렷하니 오늘날 한국 선불교의 주춧돌 하나쯤 반야사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헤아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