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밝히는 작은 등불

특집/서원

2007-09-29     관리자
 
하늘이 높아지면서 지중해의 석양이 더욱 찬란해지는 계절이다.
보름 전 우란분절 날 둥근 보름달과 함께 일곱 달 동안의 그 바빴던 고국 방문길을 끝내고 김해 들녘을 가득 메운 코스모스꽃들의 전송을 받으며 알프스와 지중해 휴양지가 있는 이 곳 이탈리아로 2단계의 작품구상을 위해 떠나오니 옛 정들이 많아 좋았다.
밤이면 촘촘이 떠있는 별들과 달을 만나고 낮이면 쪽빛 가을 하늘에 눈이 부시도록 하얀 구름들을 만나니 마음이 절로 맑아지는 것 같아 좋다. 하얀 손구름들을 만나니 지난 여름날 부산 범어사 관음회장님이셨던 오 보살님의 49재 막재가 끝날 시각에 푸른 하늘이 설법전 위로 펼쳐지면서 흰 구름들이 둥실둥실 한 판의 잔치를 펼쳤던 것이 내 눈 앞에 스친다.
이번 고국 방문길은 내게 뜻깊었다. 차근차근 한계단씩을 오르며 앞만 보고 내달렸던 지난 날들, 비록 늦게 끼우기 시작한 단추지만 마지막 단추를 잘 끼우려고 노력했던 무수한 날들이었다.
30여 년 전 여름 어느 날 셋째 언니의 꾸중을 듣고 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비내리는 경전선 기차를 타고 부산 영도에 사시는 큰언니 댁에서 내 도시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 소녀가 오늘의 나였다.
그 소녀 적의 좌우명은 실천에 과감하게, 포부를 가지는 것이었다. 어렵고 고통스러울 땐 탈무드와 명심보감으로 인내와 끈기를 배웠다. 중학교 때 추운 겨울날 친구들과 어울려 장래의 희망을 서로 나눌 때 무심히 던졌던 말, “난 은행원이 될래.” 그리고 우연히 나는 본적지도 이름도 같은 사촌언니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친척 아저씨의 소개로 은행원이 되었다.
은행원이 되어 첫 봉급으로 배운 꽃꽂이가 직업이 되어 20여 년 동안 꽃연구가의 길도 걸어보았다. 꽃길을 가면서 꺾여진 가지의 여백을 관조하면서, 사람이 가꾸는 대로 성실하게 자라는 꽃에서 진실을 배우면서 사회를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연합회의 독립회장이 되면서 사범증이 자신의 이름으로 수여되고 학원이 번창하던 시절, 꽃을 더 잘 꽂기 위해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뎃생을 하면서 틈틈이 어렵고 힘들었던 전시회를 치르면서 어느 날 작품 구상이 쉽게 되고 꽃이 하나의 점처럼 보였다.
나는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얻기 위해 입시학원에서 4년 동안의 입시과정을 치르고 서른여섯 나이에 미술대학 조소과 생도가 된 것이었다. 참으로 절실했던 학문의 길이었기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4년 과정의 대학공부를 놓치지 않고 잘 치러냈다.
학창시절 유럽을 오가면서 겨울방학 땐 이탈리아 까라라 대리석 산지가 있는 곳에서 작업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학 4년 때 유학준비를 서두르고 시험을 치러 그 때부터 세계의 거장들이 다녀갔던 곳, 아직도 무수한 예술가들이 찾아드는 이 곳 중부 토스카나에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더불어 오늘까지 살고 있다.
10년, 그 10년 동안의 작업과정을 거치며 회향의 목표가 경제적인 사정으로 사실 불가피했는데 마침 부산 비엔날레 조직위원회에서 나를 초대해 주었다. 전시 경비를 위해 은행으로 달려가 뒷생각도 접은 채 무리한 대출을 받아 초연히 10년 동안의 작품 조각 70여 점과 그림 30점으로 화집을 발간했다. 그 때의 뿌듯함, 농부가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추수 농사를 거둘 때 구리빛 얼굴로 풍요로운 가을 들판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다행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내 주변의 많은 분들이 나의 작품들을 구입해 주었다. 94년 한국에서 첫 전시 때 처음으로 팔린 작품이 불교미술대전에서 금상을 받은 작품이었는데, 그 신심 있는 불자께서 청도 운문사에 기증을 했다.
나는 그 무렵 전시를 치르면서 94년 운문사에서 7불 부처님 봉불식 때 3천배의 원을 우담바라 작가 남지심 씨와 세우고 밤을 지새웠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이후로 난 운문사를 오가며 명성 학장스님의 재가상좌가 되어, 매사에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마음을 둥글게 해서 정성드리며 사시는 스님께 불법을 배우고 있다. 부산 전시가 끝나고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를 치를 때 스님께서 보내주신 많은 분들이 축하와 함께 작품도 구입해 주셔서 그 고마움 또한 늘 잊지 못할 것이다. 덕분에 숨막힐 것 같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리고 그 어려움이 해결되는 순간 내 머리를 크게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 해냈구나.
마음 먹었던 1단계의 회향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난 1월 이 곳 시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치르고 한국으로 떠날 때 가방을 챙기면서 ‘이제는 고생 끝’ 하며 혼자서 입으로 내뱉었던 그 말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최근 내게 관세음보살님 같으신 분이 나타나셨다. 1.5톤이나 되는 작품을 선뜻 구입하셔서 어느 사찰에 기증을 하신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보살님의 “받으시는 분이 기뻐하시면 좋겠다.”는 그 말씀을 듣고, 기쁨보다는 숙연해졌다.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면서 순간 ‘내게 큰 스승이 나타나셨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깜빡 잊고 지냈던 지난 날들을 기억에서 떠올려 봤다.
이제껏 모든 일들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졌고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과연 내 전생에 나는 무엇이었길래 이 땅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본래의 서원은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다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렸던 지난 날들이었다.
2단계의 작업을 시작하면서 사흘 후면 열릴 ‘한기늠 꽃설치전’이 이 곳 시립미술관에서 펼쳐진다. 내 2단계의 작업과정을 축하 향연으로 보고 싶다. 이 곳 시민들이 원하는 행사이다. 나 역시 의미가 깊다. 동양문화를 그들에게 알리는 것 또한 사회를 밝히는 것이라 본다. 이렇게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니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필연적으로 내게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고 부처님께서 이 땅에 이렇게 태어나 살게 한 것 같다.
고국 땅에서 만행을 하듯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다시 알프스 산기슭이 있는 지중해로 돌아와 안거에 들듯 고요함 속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 새벽예불을 마칠 때 보살행을 원만히 실천하시는 한 보살님께 공덕과 복덕이 가득하길 빈다.
예불을 마치고 현관 밖 대나무 숲 아래 녹색의 도시 너머 저 멀리 지중해의 아침 바다 위 하늘색을 바라본다.
아,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