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화

주제별로 가려뽑은 경전말씀

2007-09-29     관리자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파괴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의 뇌리에는 2001년 9월 11일 고강도 테러로 일어난 미국 뉴욕의 대참사와 지난 3월 파괴된 바미얀 대불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떠오른다.
고대불교의 신성함을 상징하고 있는 바미얀대불과 수많은 인명이 죽고 파괴되어버린 뉴욕의 무역센타는 현대의 경제적 성취를 대표한다. 공교롭게도 정신과 경제의 극적인 대비의 정점을 보여주는 두 상징을 파괴한 세력은 다름아닌 종교의 이름을 앞세운 이슬람 과격원리주의자들이다.
종교마저도 욕망에 기초한 인간관,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현대사회는 극도로 위험한 사회이다. 아무리 막대한 경비를 쏟아부어 방지책을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한 순간에 지금까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처참한 파괴와 고통이 다가온다.
현대인은 뉴욕의 테러 대참사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사회 속에서 인간성을 잃은 채 그냥 먹고 즐기며 번식하는 생물의 한 종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종교의 깊은 차원을 잃어버리고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가다국의 수도로 향하는 길이었다. 들판에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불길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저 들녘을 보라.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있다. 치열하게 활활 타오르고 있다. 불타는 것이 저 들녘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이 불타고 있다. 사람들의 혀와 몸, 마음도 불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에 의해 불타고 있는가. 그것은 탐욕의 불길에 의해 타오르고 있으며, 분노의 불길에 의해 타오르고 있으며, 어리석음의 불길에 의해 타오르고 있다.”
남전 『상응부경전』, 연소(燃燒)

나는 지금부터 한 승려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언제였던가. 1991년 11월 셋째 주에 나는 ‘불교와 국제평화’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그는 베트남 호치민 시에서 온 티치 민 챠우(Thich Minh Chau)였다. 기나긴 전쟁의 세월과 비탈진 삶의 굴곡을 걸어나온 그의 얼굴은 일흔이 훨씬 넘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순박한 미소와 투박한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느린 영어에 귀를 기울였으며 전쟁의 참화와 공산화 이후 그 가혹한 사상개조캠프에서도 살아남은 이 생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불교윤리와 평화’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한 그는 많은 사람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가 준비한 논문의 용지는 그 당시 베트남의 사정을 말해주듯 아주 거친 종이에 수동식타자로 작성되어 있었다. 미국, 일본의 학자들이 준비해온 말쑥한 논문용지와 긴 논문과는 확실히 대조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수공업적인 용지에 담긴 짧은 논문은 어느 저명한 학자의 논문도 흉내낼 수 없는 체험자의 진실과 희망이 담겨 있어서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그의 답변은 언제나 간명하고 깊은 인간관과 평화의 통찰에 바탕을 둔 사상의 깊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의 참화를 겪은 베트남의 불교승려가 현대사회에 나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평화의 법문이었다.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거리에서 탁발하고 계시던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떤 난폭한 사람이 부처님께 욕설을 하며 다가와 흙을 집어 던졌다. 그 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흙먼지가 던진 사람의 얼굴을 뒤덮었다. 부처님께서 흙먼지를 터는 그에게 다가가 말씀하셨다.

만약 이유도 없이 나쁜 말을 하고
욕설을 퍼부어 다른 이를 더럽히고자 한다면
그 악은 오히려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흙을 집어 그 사람에게 던지지만
바람이 거꾸로 불어 오히려 자신을 더럽히듯이
남전 『상응부경전』, 비란기가

호기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베트남 불교도들이 겪었던 전쟁과 세계를 경악시켰던 승려들의 소신공양에 대해서 물었다. 티치 민 챠우는 말했다.
“참혹했던 베트남전쟁에 대한 불교도들의 인식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것은 인류에게 끝없는 해악을 끼치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고대에서부터 중국에 항거했으며 최근에는 프랑스와 미국의 폭력에 항거했습니다. 모든 식민제국주의자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베트남의 국가기초와 인민을 무참히 살육하고 이데올로기와 평화라는 정치적 명분으로 침략의 의도를 위장했습니다. 평화는 정치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탐욕이 있는 한 마음의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마침내는 전쟁을 불러 일으킵니다. 여러분은 평화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반드시 전쟁의 참화에 대한 각성을 전제로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어떤 참혹한 결과에 대한 후회로 말미암아 필요해진 평화는 참다운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가 깨어진 것에 대한 후회 때문에 지속되는 평화는 그 곳에 또 다른 후회를 불러일으킬 업의 씨앗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큰 정신적 상흔으로 인해 인위적이며 위장된 평화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큰 목소리로
악담과 잡담을 늘어놓고 승리했다고 우쭐댄다
그러나 참된 승리는 훌륭하게 인내할 줄 아는 자의 것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로써 갚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로써 갚지 않으면
두 가지 승리를 함께 얻나니
바른 마음으로 자신을 다스려
자신에게도 승리하고
동시에 남에게도 승리하리라
남전 『상응부경전』, 아수라왕

그는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평화란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의 사소한 욕망이 집단이기주의를 낳고 마침내는 큰 전쟁으로 확대되는 탐욕과 폭력의 관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는 평화란 힘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위장된 평화라는 것이다. 티치 민 챠우의 발언은 그 자신이 체험과 평화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어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질문의 기회를 얻은 나는 이 노선배에게 물었다.
“지금 베트남은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와 불교의 성향이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체험을 갖고 계신 스님의 관점을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때만 해도 나의 머리는 얼토당토 않은 뒤죽박죽 문제로 달구어져서 뜨거웠던 것이다. 유난히 하얗고 긴 눈썹을 가진 티치 민 챠우는 한참의 침묵 뒤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은 매우 깊은 지혜를 필요로 하는 질문입니다.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랬었다. 티치 민 챠우의 침묵처럼 인간성의 깊은 영역에서는 ‘예, 아니오’, ‘이것, 저것’이라고 답변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나는 휴식시간에 그의 곁에 가서 말했다. “아까 매우 어리석은 질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는 마디 굵은 손을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많은 고통과 번민의 터널을 지나온 자의 평화로운 미소를 내게 보냈다.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안녕을 누리기를
그들의 마음이 지혜로워지기를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이든
멀리 사는 생명이거나 가까이 사는 생명이거나
이미 태어나 있는 생명이거나
앞으로 태어나게 될 생명이거나
이 모든 생명들이 다 행복하기를
남전, 『자비의 기도(Mett -Sutta)』

대승불교의 정신적 전통에 비추어 본다면 이 세상에 번뇌와 고통에 싸여있는 생명체가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그 누구도 완전한 깨달음과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는 저 아득한 숙업의 세계에서부터, 저 머나먼 겁의 저 편에서부터 상호연결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리적 기준으로서 자비의 실천이 그토록 강조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자선이나 박애, 신의 이름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불교가 지닌 해탈의 가르침 때문이다. 즉 모든 생명체는 그 자신의 생태적인, 영성적인 발전을 위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가 해탈을 향한 공동의 수행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는 가끔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이다.”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언급은 인간에 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불교의 철학적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대자로서의 신(神)을 상정(想定)하지 않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기독교, 카톨릭과 같은 서구종교 중심주의에 은연 중 젖어들어 불교에 관한 ‘장님 코끼리 만지기[群盲撫象]’식의 피상적 관찰일 뿐 불교에 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유일신 없는 종교’라고도 말해진다. 인간을 창조한 절대자로서 신이 없는 종교가 있을 수 있을까? 불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불교는 신(神)의 존재를 상정(想定)하거나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을 철학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無神論)이라고 말해지지만 이와 같은 규정은 어디까지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有神論)을 상대적으로 대비하는 입장에서 생겨난 입장일 뿐이다. 물론 불교도 신앙을 중시하며 부처님과 교법과 승가에 귀의하는 삼귀의(三歸依)를 기초적인 신앙의례로 삼고 있을 만큼 신앙을 중시한다. 그러나 불교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이며 절대자인 신(神)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불교에 있어 신앙은 “신(信)은 마음의 징정(澄淨)이며 사제(四諦)와 삼보(三寶)와 업과(業果)에 대한 확인이다. - 『俱舍論』”라고도 지적되며 신(信)은 지혜와 자비의 실천에 있어서 불가결한 제일의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