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7.열반의 땅, 쿠쉬나가르

신 왕오천축국전 별곡

2007-09-29     김규현

길 위에서의 한 평생

붓다의 삶은 ‘길’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살다, 길에서 간 일생이었기 때문이다. 45년에 걸친 설법의 노정도 대개는 길에서 이루어졌고 특히 길 위에서의 마지막 회향은 우리 유교권의 정서에서는 매우 꺼리는 ‘객사(客死)’에 해당되는 것이어서 이채롭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한 평생을 일관되게 후인들을 위해 ‘이상적인 길’의 이정표를 세우시려고 힘쓰셨던 길 위의 스승이셨다. 이는 우리들의 인생 길 자체를 ‘나그네 길’에 비유하는 불교적 사유의 한 실례를 직접 온 몸으로 나타내신 것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의미 있는 부분이다.

세수 80을 넘긴 고타마 사문은, 비록 영적으로는 깨달음을 얻어 붓다의 반열에 들었다지만, 육체적으로는 이미 노쇠하였기에 ‘가죽끈에 끌려가는 수레’ 같은 몸은 열반에 들 준비를 해야만 했다. 비록 깨달음을 얻은 여래라 할지라도 이번 생에 육체를 타고난 중생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해야 했다.

그렇기에 마지막 하안거 장소였던 바이샬리에서 붓다는 그의 열반이 가까이 왔음을 측근 제자들에게 알리고 수구초심(首邱初心)이었던지, 바이샬리를 떠나 고향 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붓다는 성의 서북쪽 5리쯤의 한 언덕에서 배웅 나온 사람들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정들었던 바이샬리를 코끼리처럼 온 몸을 돌려 돌아보셨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붓다의 일대기를 다룰 때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물론 ‘위없는 깨달음’이지만 열반 또한 불교사적으로는 그 다음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이는 고타마 사문의 죽음을 단지 육체적 소멸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영원한 세계인 니르바나(Nirvana), 즉 ‘열반으로의 입문’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혜초도 붓다의 마지막 땅에 대하여는 비교적 상세하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 달만에 쿠시나가라(拘尸那國)에 이르렀다. 이 곳은 부처가 열반에 든 곳이다. 성(城)은 황폐하여 아무도 살지 않는다. 부처가 열반에 든 곳에 탑을 세웠는데, 한 선사(禪師)가 그 곳을 깨끗이 청소하고 있다. 해마다 8월 8일이 되면 많은 사부대중이 모여 크게 공양을 올린다. 그 때 공중에는 깃발이 휘날리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이를 보고 이 날에 불법을 믿으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 탑의 서쪽에 강이 있어 이라바티수라 한다. 남쪽으로 2천 리를 흘러 항하(恒河)에 들어간다. 탑이 서 있는 사방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매우 거친 숲이 있다. 그래서 그 곳에 예배하러 가는 자는 물소와 호랑이에게 해를 입는다….”

현장 법사 역시 성곽은 붕괴되고 촌락은 퇴락한 이 열반지를 묘사하면서 마지막 공양을 올린 춘다의 집 우물에 맑은 물이 흐르는 등등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이 사라나무를 그려내고 있다.

“성의 서북쪽으로 3리 정도 가서 강을 건너 서쪽으로 조금 가면 사라 숲에 이른다. 그 나무는 떡갈나무 비슷한데 거죽이 푸르죽죽하고 잎은 윤기가 있다. 이 곳에 특별히 4개의 나무가 있는데 바로 여래가 열반에 든 곳이다. 벽돌로 만든 큰 정사 안에 여래의 열반상(涅槃像)이 있다.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워 있는 형상이다.

옆에 아쇼카의 스투파가 있다. 기단은 허물어져 기울고 있으나 높이는 아직도 2백여 척이 된다. 앞에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여래가 열반한 사적이 적혀 있는데 글은 있으나 날짜는 적혀 있지 않다” 고타마 붓다의 입멸의 직접적인 원인은, 오늘날의 용어로 치자면, 일종의 ‘식중독’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랫동안 여래에게 공양할 기회를 기다려온 보석공 춘다는 돼지우리간에서 자생하는 일종의 버섯을 요리하여 정성스럽게 올렸는데 이 때 여래는 이를 감지하시고도 제자들은 먹지 못하게 하고 이를 혼자만 드셨다 한다.
그 결과 피를 토하는 설사병을 얻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예정된 여행은 계속하여 쿠쉬나가르 동산에 도착하자 사라나무 사이에 자리를 깔고 머리는 북쪽에 두고 얼굴은 서쪽으로 하여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모로 누워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하라”

고타마 붓다가 걸어갔을 그 길을 따라 천여 년 전에 혜초 사문이 걸어갔고 다시 천여 년 뒤에 이제 ‘해동의 나그네’도 뒤따라 바이샬리를 떠나 쿠쉬나가르로 향했다. 먼저 교통의 요지 고락뿌르(Gorakhpur)로 기차로 이동하여 다시 버스를 타고 열반의 땅에 힘겹게 도착했다. 비교적 잘 정리된 공원이 되어 있는 붓다의 열반처에는 관 모양의 희고 둥근 건물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5세기에 조성되었다는, 6미터나 되는, 모로 누운 형태의 거대한 열반상(涅槃像)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현장이 목격했던 역시 아쇼카 왕이 세웠다는 벽돌로 된 거대한 대탑의 기단부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바람결에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이번에는 붓다의 유해를 화장한 곳, 즉 다비처(茶毘處)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 세워졌다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람바르 스투파(Rambhar Stupa)와 뒤로 흐르는 강의 물결이 나그네를 맞는다. 바로 혜초가 기술한 이라바티수였다.

아, 아니차(Anicha, 無常)! 여기에서 고타마 붓다의 몸은 한 줄기 연기로 승화되여 오색 영롱했다던 세 말 사리(舍利)로 화했단 말인가?

현장은 그 최후의 날 정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 북쪽으로 강을 건너 3백여 보 되는 곳에 스투파가 있다. 여래의 유해를 화장한 곳이다. 땅은 황흑색이며 회탄(灰炭)이 섞여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찾으면 지금도 간혹 불사리(佛舍利)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여래가 열반하였을 때 하늘과 사람이 모두 슬퍼하는 가운데 칠보(七寶)로써 관을 만들고 천첩으로써 몸을 싼 다음 꽃으로 치장하고 깃발을 세웠다. 말라 족이 상여를 받들고 많은 대중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따랐다. 북으로 유금하(有金河)를 건넌 다음 향유를 가득 채우고 향나무를 많이 쌓아서 불을 놓아 태웠다. 다만 머리카락·손발톱은 그래도 남아 조금도 손상됨이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다비 끝에 수습된 사리, 즉 유회(遺灰)의 분배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고타마 붓다를 흠모하였던 여러 왕국들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날 정도가 되자 드로나 바라문의 중재로 8등분으로 분배되었다.

그러나 후에 달려온 세 나라가 있어 각기 유해를 담았던 병, 나머지 재, 수염과 모발까지 얻어가 인도 전역에 도합 11개의 진신사리탑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후에 바이샬리의 사리탑은 아쇼카 왕에 의해 10등분되어 다시 전국으로 분산되었다고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추론이 내려졌지만 나머지 사리탑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자신이 6년간 치열한 수행 끝에 깨달은 진리의 세계를 평생 남을 위해 설파했던 고타마 붓다의 마지막 설법은 수바드라라고 하는 노 수행자에게 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여래의 마지막 유언은 열반 백일 전에 마지막 하안거지인 바이샬리에서 제자 아난다 존자에게 이른 한 마디로 집약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래가 열반을 예언하자 그를 평생 분신처럼 따르던 측근 제자 아난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여래가 떠난 후의 교단(敎團)을 걱정하자 이에 여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다.

“내 평생에 내가 이야기하지 않고 따로 숨겨둔 법은 따로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아 정진하라.”

한역하면 바로 그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