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6.재가불교의 고향, 바이샬리

신 왕오천축국전 별곡

2007-09-29     김규현

바이샬리로부터『왕오천축국전』은 시작되고…

앞 부분이 없어진, 현존본 『왕오천축국전』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

“삼보(三寶)를 … 맨발에 … 외도(外道)라 옷을 입지 않는다. <약 19자 缺> 음식을 보자마자 곧 먹는다. 재계(齋戒)도 하지 않는다. 땅은 모두 평평하고 … 노비가 없다. 사람을 팔면 살인하는 죄와 다르지 않다. <약18자 缺>』”

구체적인 지명은 보이지 않지만 위 구절은 바이샬리에 해당된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비정하고 있다. 그 근거로는 혜초의 다음 행선지가 열반지 쿠시나가라인 것과 또한 본문에 ‘나체 외도’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혜초가 인도 도착지 탐룩에서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먼저 가까운 보드가야로 가지 않고 갠지스 북쪽 행로를 택한 것을 말함이다. 뒤에 혜초는 바이샬리를 ‘비야리성(扉倻離城)’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 중천축국 안에 4개의 대탑이 있는데 항하의 북쪽에 3개가 있다. 첫째 탑은 사위국의 급고독원에 있으니 거기에는 절도 있고 승려도 있음을 보았다. 둘째 탑은 비야리성의 암라원(菴羅園) 안에 있으니, 지금 탑은 볼 수 있으나 절은 허물어지고 승려도 없다.”

여기서 ‘암라원’은 물론 기녀(妓女) 암바팔리가 붓다에게 기증한 망고 숲을 말함이다.

비하르주의 수도 파트나(Patna)에서 갠지스를 건너 바이샬리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크고 작은 차를 몇 번씩이나 바꿔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을 달려도 산을 볼 수 없는 드넓은 황토색의 대륙에는 끝없이 푸른 논밭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간간이 궁핍함이 배어 나오는 조그만 촌락과 늪지가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직선으로 뻗어나간 그 길에는 오늘도 신의 대접을 받는 성우(聖牛)들이 차를 가끔 가로막기도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수천 년 전부터 그래왔을 인도의 전형적인 농촌의 정경이었다.

오늘날 불교성지들의 과반수는 현 행정구역상으로 비하르주에 속해 있다. 이 이름은 원래 사찰을 의미하는 ‘비하라(Vihara)’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것이 말해주듯이 불교나 자이나교가 융성했던 당시는 이곳이 그처럼 가람이 즐비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지금은 인도에서도 가장 가난한 주로 전락했지만 옛날의 비하르는 인도의 심장이었다. 강력했던 역대 마가다·마우리야·굽타 같은 왕국들의 연이은 도읍지가 있었던 곳이었기에 이 지방은 자연스럽게 전 인도대륙의 정치·경제·문화·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일 북쪽에 위치한 바이샬리도 한때는 번성하던 곳이었다. 자이나교의 고향으로 또한 고타마 붓다의 활동무대였던 바이샬리는 그 이전에는 바지안(Vajian)연합이라는 인류 최초의 공화국의 하나가 있었던 곳이다.

B.C 6세기경 릿차비 족의 8개 지역연합으로 구성되어 의회제도에 의한 공화정치를 폈던 번영기의 바이샬리의 모습은 “경비를 위한 성벽이 3겹으로 처져 있는 성안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여러 층으로 올라간 건물들이 줄을 이은 시가지 곳곳에는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찬 공원들이 자리하고 있어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 으로 묘사되고 있다.

마하비라(Mahavira)의 고향

바이샬리는 자이나교의 교주가 태어나고 소년시절을 보낸 자이나교의 중요한 성지이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바이샬리의 교조 탄생지에 대학과 사원을 세워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불교가 인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종교는 철저한 불살생(不殺生)의 계율로 인하여 생산직보다는 상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중산층에 뿌리를 내려서 지금도 힌두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그것은 중세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지 혜초·법현·현장의 기록에서 “맨발의 나체 외도(外道)”라는 구절로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이라는 간디의 종교로 알려진, 이 무소유를 지향하는 나체교는 불교와 거의 동시대에 출현하였다.

인도대륙의 원주민이었던 드라비다족을 몰아내고 새 주인이 된 인도-아리안족은 인더스문명을 이어 받아 브라흐만교 사제들의 주도하에 찬란한 베다문화를 이룩하였지만 교단이 비대해짐에 따라 생기는 부패와 피비린내 나는 과도한 ‘희생제(犧牲祭)’에 대한 반발로 B·C 5~6세기경에는 많은 신진 사상가, 속칭 육사외도’가 출현하여 반(反) 브라흐만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 상황은 마치 중국의 춘추시대와 방불한 것이었는데 그 중에 불교와 자이니즘도 끼어 있었다.

고타마 붓다와 동시대의 인물로 전해지는 니간타 나타푸타(Niganta Nataputa)는 12년간의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어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 그 후 그의 가르침은 자이나교로 발전하여 지금껏 인도사회에 한 갈래를 이루고 있다. 자이니즘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인을 디르탄카라라고 하는데 교조 니간타는 제24대에 해당된다. 초대 디르탄카라인 리샤바나트는 우주의 중심인 아스타파타(Astapata)에서 수행을 한 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불교의 만다라에 해당되는 자이니즘의 우주도(宇宙圖), 얀트라(Yantra)에 의하면 아스타파타는 수메르와 같은 우주적 산으로 인식되어서 그 곳에서 초대 교주를 비롯한 역대 성인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아스타파타라고 여겨지는, 티베트 고원에 실제 솟아 있는 카이라스 산은 불교의 수미산처럼 영혼의 귀의처로서, 우주의 중심으로서, 영원한 세계로의 ‘스카이 코드’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재가불교의 효시, 유마 거사(維摩居士)의 고향

불교에 있어서도 바이샬리는 역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여래가 우기시에 제자들과 머물던 암라원과 불경의 제2차 결집지(結集地)와 ‘원숭이의 공양전설’ 그리고 아쇼카 석주가 아직 완전하게 서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붓다의 마지막 하안거의 장소로도 그리고 『유마경(維摩經)』이 설해진 무대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현장 법사는 유마 거사의 집터와 탑을 돌아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유마가 실존인물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비말라키르티(Virmalakirti)라는 이름의 이 거사는 바이샬리에 살았던 부유한 장자로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면서 신통력까지 갖춘 대단한 인물로 전해져 붓다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도 감히 상대할 수 없어 기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유마가 병이 들었다는 소문이 나자 붓다가 병문안 가기를 꺼리는 제자 중에서 문수사리를 대표로 보내 문병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유마경』은 그 서술이 희곡 형태로 구성되었고 또한 다른 경전과 달리 재가불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채로운 경전이다.

이 점은 교단이 출가자 중심이 아닌 사부대중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한 모델로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보살행이라는 실천적 덕목을 강조하는 대승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다시 말하자면 특수한 종교인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의 추구가 아니라 누구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가능한 ‘불교적 이상향의 실천’을 지향하는 것이다. 조금 전문용어를 쓴다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유희삼매(遊戱三昧)에 들어 불이문(不二門) 화두를 돌파하여 공(空)의 세계, 즉 ‘우나 사루스’에 들어가는 실천적 방법을 제시한 경전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여래께서 바이샬리의 암라원에 계실 때 많은 비구와 보살이 함께하였다.”라고 시작되는 이 『유마경』 진수는 몇 마디 구절로 요약되고 있다.

우선 ‘불이법문(不二法門)’이 유명하고 다음 구절도 의미심장하다. “나의 병은 중생이 아프기에 생긴 병입니다. 내 병은 중생이 고뇌에서 벗어나는 날 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아야 할 말이라 하겠다. 타인을 위해 대신 아플 수 있는 경계는 정말 가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