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의 운수납자

함께사는 세상 이렇게 일굽시다

2007-09-28     관리자


얼마 전에 지인의 부탁으로 어느 교회에서 주관하는 작은 모임에 다녀왔다. 대북선교에 관한 자문을 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모임이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불교는 사찰단위의 남북교류를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교회의 북한선교에 대한 집념은 남다른 바 있다.
일찍이 숭실대학을 비롯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북쪽에서 월남해온 내력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불교는 어떠한가. 개신교에 비하면 턱도 없이 신경을 덜 쓰고 있지나 않는지.
얼마 있으면 남북정상회담 1주년이다. 곰곰이 남북불교교류의 오늘을 생각해본다. 오랜 역사 속에서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북쪽 지역의 사찰들은 더 할 나위 없는 인연의 끈들이 아닐까. 금강산 표훈사는 말할 것도 없고 묘향산 보현사 등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남쪽 가람과 만날 수 있는 대상들이 즐비하다.
북한의 문화유산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가령 보현사의 경우,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4각9층탑, 만세루, 8각13층탑, 대웅전 등이 차례로 세워져 있으며 심검당, 수월당, 영산전, 관음전 등 수십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보현사 경내에는 장경고가 있어 8만대장경을 비롯한 옛 목각본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다. 황해북도 연탄군의 고려 사찰 심원사, 평안남도 평성시 서쪽 봉린산 중턱에 자리잡은 고구려 사찰 안국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 양산동대의 조선시대 사찰 천주사 같은 뛰어난 절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한 사찰 복원에도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을 비롯한 북한의 언론들은 개성 영통사 복원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바 있다. 영통사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절이다. 그러나 영통사는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의 비가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일찍이 사라져간 이 뜻깊은 절이 복원되고 있다.
북한의 사찰건축기술을 구현하여 수십 채가 복원되고 있다고 보도는 전한다. 영통사 진입도로를 건설함과 동시에 그 도로를 개성시의 고려박물관과 있게 함으로써 순환도로를 완비하였다. 이로써 앞으로 개성을 방문하게 될 사람들은 순환도로를 통하여 영통사와 고려박물관 등을 단번에 볼 수 있게끔 되었다.

영통사의 사례는 북한의 문화유산에 대한 보존대책을 잘 설명해준다. 「문화유물 보호법」을 채택하여 매년 4월과 11월을 ‘문화유적 애호월간’으로 설정하여 보존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2000년에도 평양시 을밀대를 비롯한 각지의 유물 유적 정비작업을 진행시켰다. 평양시 문화유적관리소에서 영화사, 청류정, 을밀대 등을 보수하였고 지방에서도 보수가 이루어졌다.
1993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6차 회의에서 북한은 ‘민족문화유산을 옳게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을 더욱 개선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의제를 상정한 후 토의를 거쳐 9개 항의 최고인민회의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민족문화유산에 대한 발굴 수집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물론 그 목적하는 바는 ‘주민들에 대한 교양사업을 강화하고 민족전통을 사회주의 생활양식에 맞게 계승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영통사 복원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의 문화재 복원기술은 만만하지가 않다. 차제에 남북문화교류에서 북한과의 문화재 복원기술 교류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손쉬운대로 단청, 대목장을 비롯한 문화재 복원기술을 교류할 수 있다.
북한은 전쟁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를 겪었으며, 이를 복원하고 관리하는 50년 이상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이미 일찍이 고구려 사찰인 정릉사 말고도 1990년 이후에도 복원이 계속되어 평양의 광법사와 평안남도의 안국사 등이 재건 된 바 있다.
차제에 범불교계의 입장에서 불교문화유산의 교류와 협력을 통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무언가의 튼튼한 틀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유수의 고구려 사찰을 복원하였듯이 노회한 기술력을 지니고 있음을 새삼 강조하고 싶다. 서로의 불사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통일시대 불교문화중흥의 합의점을 모색할 수 있다고 본다.
다가올 여름, 시원한 순환도로로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영통사를 찾아가 보고, 마지막 코스로 박연폭포에 가서 더위를 식히는 것으로 통일시대 불교중흥의 꿈을 꾸어본다.
남북관계에서도 불교계는 올바른 자비행이 무엇인지를 솔선하여 가르칠 필요가 있다. 자비란 ‘무조건적’ 베풂이어야 하리라. 갈등 상대와 화합하는 데 이러저러한 ‘조건’을 붙이기 시작하면, 화합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생의 철학이 중요하다. 남북의 상이한 조건에서 빚어진 해묵은 갈등 안에는 역사적인 분노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도 서려 있다. 그 분노와 갈등이 그대로 노출되는 통일이라면 아닌 말로 통일 아니함만도 못하다.
남북이 살고 있는 상극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통일을 바라는 수많은 법회, 심지어 엄청난 불사를 통한 거대불상 세우기에 이르기까지 통일을 염두에 둔 다양한 일들이 불교계에서 이어져왔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불교계가 해야 할 일은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에 나타날 갈등과 반목의 뿌리를 상생의 철학으로 전환시키고, 자비의 근본적인 원리를 대중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 아닐까.
범종단적으로 남북의 화해를 위한 실천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고,이를 과감하게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싸우기는 쉬워도 베풀고 비우기는 어려운 법. 반백년 넘게 싸워온 관성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을 마련하여 실천불교로서 남북 대중들에 뿌리내리는 불교로 나아가야 한다.
불교계는 지금까지의 통일교류행보에서 훌쩍 뛰어넘는 행보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통일운동의 운수납자가 되어 자비행을 짊어지고 북한 산하를 누빌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고난의 행군을 거듭하고 있는 북녘의 산하에 수많은 통일불교의 운수납자들이 출현하여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 민족의 화해라는 중요한 시대적 화두를 풀어나감에 있어 불교계는 지나치게 은둔자적인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랜 분단에도 불구하고 북한 곳곳의 산과 들에 다소곳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남한 불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가람들의 ‘눈망울’을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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