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보덕사에 가거들랑 단종대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해주오

설화가 깃든 산사 기행/영월 태백산 보덕사(報德寺)

2007-09-28     관리자

달 밝은 밤 자규새 울면
시름 못 잊어 누대에 기대었네
네 울음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 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보내
권하노니(寄語世上苦勞人)
춘삼월 자규루에는 삼가 부디
오르지 마소.(愼莫登春三月子規樓)

5월의 이른 아침, 절마당까지 들어와 동그는 산새소리에 눈을 떠보니 보덕사(報德寺)의 아침이 참 청량하다. 지난 밤 늦도록 잠 못들어 뒤척인 까닭이 비운의 소년 국왕 단종을 그토록 애닯게 했던 소쩍새 때문인지 머리 속에 담아둔 세상사 때문인지, 이 아침은 그 가늠마저 절 구석구석을 매만지는 햇살에 기대어 내려놓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 보덕사는 어제 둘러본 보덕사가 아니다. 불두화 가득 핀 도량은 어제보다 훨씬 넓고 우람하게 솟은 극락보전은 그 위세가 당당하다. 이렇다 할 복원불사 없이도 이만한 터전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어디 있는가 싶다.
보덕사는 신라 문무왕 8년(668) 우리 나라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시는 발봉산(鉢峰山) 지덕사(旨德寺)라고 불리었다는데 의상 대사가 지엄(智儼, 602~668)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하고 당나라에서 돌아온 때가 문무왕 11년(671)이므로 창건 연대는 다소 차이가 난다.
고려 시대 들어 설허(雪虛) 선사와 원경(元敬) 국사의 손길로 중창과 중건을 거듭한 지덕사는 조선 세조 3년(1457)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영월로 유배되어 왔다가 이곳에서 죽음을 맞자 점차 노릉사(魯陵寺)라고 불리어진 모양이다.
이후 단종이 복위되면서 숙종 31년(1705) 단종 장릉(莊陵)의 원찰로 지정되어 보덕사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충절의 고장’ 영월이 그러하듯 보덕사는 단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지난해 12월 현 주지 선혜(善慧) 스님이 극락보전(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3호) 보수 공사를 하면서 발견한 「보덕사 극락보전 중수기」와 「태백산 보덕사 극락전 중수 상량문」은 다시 한번 이를 확인해 준다.
정조 19년(1795) 쓰여진 이 중수기에 따르면 극락보전은 선조 9년(1576)에 지어진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보덕사의 당시 역할에 관해서 단종 대왕의 능침 수호와 ‘조포조과(造泡造果, 능이나 원에 달려서 제향에 쓸 두부와 과일을 만드는 일)’ 등을 언급하고 있다.
보덕사에서 가까운 금몽암(禁夢庵)에도 단종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데 이 금몽암의 옛 이름 역시 지덕암, 노릉암이었으니 보덕사의 옛 이름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옛 이야기에 따르면 단종 대왕이 금중(禁中; 궁중)에 있던 어느 날 산 속 암자에서 노니는 꿈을 꾸었다. 꿈인 줄로만 알고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단종은 비운의 나날을 맞아 한양으로부터 천리 길 영월 청령포로 유폐(幽閉)되어 온다. 당시만 해도 영월땅은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곳에서도 청령포는 배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할 발길 끊긴 곳.
이곳에서 2개월 만에 홍수로 인해 거처를 관풍헌으로 옮긴 단종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근교를 소요하던 중 가까운 암자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암자의 모양새와 주위 지세가 지난 날 궁중에 있을 때 꿈속에서 보았던 그 암자와 똑같았다. 이후 이 암자는 궁중 꿈속에서 보았다 하여 금몽암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단종과 금몽암, 그리고 보덕사의 연관성을 짐작케 하는 이 이야기는 지금도 금몽암에 걸려 있는 「노능지덕암 중수기」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단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보덕사 산신각에는 현재 태백산 자락의 다른 산신각들처럼 단종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그림에는 백마를 탄 단종과 그 앞에 머루 바구니를 들고 있는 추충신(秋忠臣)이 함께 그려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추충신의 이름은 익한(益漢)으로 단종이 영월 관풍헌에 외로이 있을 때 산머루를 따다가 진상하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산머루를 따가지고 단종에게 진상하려고 영월로 오는 길, 연하리(蓮下里) 계사폭포에 이르렀을 때, 곤룡포에 익선관(翼蟬冠)을 하고 백마를 탄 채로 유유히 태백산 쪽으로 향하여 가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 추익한이 단종에게 “대왕마마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하니 단종은 “내가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오.”라고 말한 뒤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급히 단종의 처소에 가보니 이미 변을 당한 뒤였다. 추익한은 다시 단종을 만났던 계사동까지 와서 목숨을 끊어 단종과 함께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강원도 태백산의 대표적인 미타신앙 성지로 각광받고 있는 보덕사에는 현재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사성전(四聖殿), 산신각, 목우실, 칠성각, 요사채 등이 거리를 두고 널찍이 자리잡고 있다.
그 너른 마당을 이리저리 걷노라니 임진란과 6·25의 전화를 겪기 전의 보덕사 모습이며 단종 사사 이후 불교에 귀의한 세조의 생애, 정업원(淨業院)에서 단종을 위해 기도했다는 동갑내기 단종비 정순왕후의 아련한 마음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극락보전의 문을 열고 다시 한번 단종의 극락왕생을 위해 일배일배 간절한 마음을 담아본다.
새롭게 그 창건연대가 확인된 극락보전 안에는 삼존불(아미타불, 관음보살, 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지난해 중수기, 상량문과 함께 발견된 극락보전 삼존불 봉안 문서에 따르면 숙종 13년(1687) 목조불로 조성된 것으로 밝혀져 그 문화재적 가치가 상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 연화좌대에 새겨진 조각 역시 세심한 손길이 닿은 듯 천인과 사자, 용들이 노니는 가운데 극락조인지 관음조인지 단정한 모습은 예사 솜씨가 아니다.
미동도 없이 새초롬히 뜬 눈으로 출세간 세상사 굽어보시는 부처님을 참배하고 나와보니 극락보전 오른편에는 옮겨온 것으로 보이는 부도 1기와 부도로 보기에는 낯선 석물이 눈에 띈다. 이 석물에는 ‘화엄대강백 설허 대선사’의 글씨가 선명해 무심코 지나는 이들에게 이곳이 그 옛날 의상의 화엄도량으로 태어난 곳임을 짐작케 해준다.
보덕사와 금몽암 참배를 마치고 걸음을 재촉해 장릉으로 나있는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걷는다. 여기서 보자니 보덕사가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이다. 아! 보덕사가 이리도 가까웠구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보덕사의 은은한 종소리(報德暮鐘)가 영월팔경의 하나라더니 단종은 여기서 세세생생 극락왕생의 기원 담긴 보덕사의 염불소리며 종소리를 듣고 있었으리라.
쉬 내딛지 못하는 귀경길, 능을 내려서며 바라본 보덕사의 청량한 기운에 보태었던 기원을 나지막이 되뇌어 본다. ‘단종 대왕이시여, 극락왕생하소서.’
보덕사 : 033 - 374 - 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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