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왕오천축국전] 3.천축국의 첫 도착지, 탐나립티국

2007-09-28     김규현

동인도의 옛 관문이었던 탐룩(Tamluk)

혜초는 한동안 머물며 천축행 준비를 했던,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을 떠나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의 말라카 해협을 빠져 나와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붓다의 나라에 도착한다. 그 곳은 바로 벵갈 만의 탐나립티 국이라는 나라였다.

해로를 이용하였던 구법승들의 순례기에는 탐나립티국은 빠짐없이 나타난다. 먼저 법현(法顯)은 이 곳에서 2년이나 머물다 사자국(獅子國), 즉 스리랑카를 경유하여 귀국했으며 혜초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의정(義淨)도 역시 이곳에 도착하여, “바다의 입구로서 불법이 성하였는데 이 나라에는 24개의 사원이 있어 승려들이 많이 살고 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왕복 모두 육로로만 다녀서 항로를 이용하지 않았던 현장(玄裝)도 혜초보다 한 세기 먼저 이 나라에 들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당시의 탐나립티국(耽羅立底國)은 벵갈 만에서 가장 번성했던 해양 강국이었으며 불교 또한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탐라립티국은 주위가 1,400리이며 도성은 주위가 10여 리이다. 해안에 가까워 토지는 습하고 (중략)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사교와 정법을 모두 믿는다. 가람은 10여 곳으로 승려는 1,000여 명이다. 수륙이 맞닿아 진귀한 보물들이 집산되어 사람들은 대개 부유하다. 성 안에 있는 탑은 아쇼카 왕이 세운 것이다.”

비록 전반부가 누락된 현존본 『왕오천축국전』에는 기록이 없지만 혜초가 탐룩으로 입항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많은 기록과 당시의 항로가 이를 뒷받침한다.

혜초의 항로(航路)

서기 대략 723년 한겨울, 기다리던 계절풍이 동남으로 불기 시작하자 국제무역항 광주(廣州)는 술렁이기 시작하여 출항 준비를 하면서 때를 기다리던 무역선들은 일제히 돛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만을 벗어나 큰 바다로 나온 선단들은 마카오 반도를 돌아, 낮에는 오른쪽으로 해남도(海南島)의 해안선을 표지 삼고 밤에는 남십자성(南十字星)의 별빛을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갔다. 그러다가 식수와 식량을 보급받기 위해 잠시 인도차이나 반도, 곧 현 베트남의 하노이 부근에 기착한다. 당서(唐書)에서 빈번히 언급되고 있는 임읍국(林邑國)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혜초는 이 나라를 원본 「왕오천축국전」 첫 부분에 ‘각멸(閣蔑)’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캄보디아였던 ‘크메르(Khmer)’를 중국어 발음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러 자료를 비교해 보면 임읍국과 각멸국은 다른 나라인데 혜초는 두 나라를 혼동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혜초를 태운 무역선은 다시 항해를 계속하여 약 한 달 만에 수마트라섬의 팔렘방(Palembang)에 도착한다. 당시 이 섬에는 슈리비자야 국(室利佛逝國)이라는 강력한 해상 왕국이 해상 항로의 경유지로 번영하였기에 중국과 인도 그리고 아라비아를 오가는 무역선들은 이 곳을 경유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혜초의 기록은 없지만 몇 가지 면에서 혜초가 수마트라에서 한동안 기착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우선 혜초의 항로의 모델이 되었던 의정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688년 역시 광주에서 뱃길로 천축행에 오른 그는 왕복 3차례에 걸쳐 수마트라에서 도합 10년간을 머물며 범어(梵語) 및 현지 토착어 그리고 불교의식과 생활습관을 익히며 기후적응훈련도 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입축구법승(入竺求法僧)의 예를 들면, 총 65명 중에서 40명이 해로를 이용하였는데 대개는 수마트라에서 인도의 입국준비를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통상적인 경우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혜초가 의정의 예를 본 받아 역시 수마트라에서 한동안 머문 것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혜초가 팔렘방에서 얼마를 머물렀는지는 정확하게 비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일 년 이상을, 다음 해의 바람을 기다리기 위해, 머문 것으로 보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많은 기록에 남아 있는 당시 유학승들의 관습이었으며 실제로도 당의 혜림(慧琳)이 지은, 일종의 불교용어자전에 해당되는 『일체경음의』 속의 3권으로 표시된 원본 『왕오천축국전』에서 보이는 총 85개 단어 중에 상권에는 39개 단어들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보면, 대모(玳瑁), 구별(龜鼈), 야자장(椰子漿)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 남해 해안지방의 특산품이거나 주거 상황 등 바다와 연관된 것들이어서 혜초가 해양문화의 지식에 해박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한 번 더 정리하면 상권 전반부와 중권 시작부가 현존본에는 없지만 그 내용은 혜초가 광주를 출발하여 인도에 도착해서 중인도에 관한 기술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록으로 그것들이 모두 바다와 연관된 것들이란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혜초의 수마트라의 체류기간은 적어도 일년 이상이다.”라는 가설은 무리한 것이 아니다.

참, 이 항로에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밝혀두어야 할 사실은 혜초 이전에도 우리의 구법승들이 여러 명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과 기타 자료에 의하면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혜업(慧業), 현태(玄太), 현락(玄烙) 등의 천축행을 기록하였는데, 특히 이름 모를 신라 승려 두 명은 배를 타고 슈리비아 국 서쪽 파로사 국(坡魯師國, 현 수마트라 Balus)에 도착해서는 병을 얻어 입적했다고 적고 있다.

야자수 우거진 옛 항구

혜초의 인도 도착지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고 자료상으로도 건질 것이 많았기에 캘커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달려간 곳은 캘커타를 관통하는 후글리 강과 갠지스와 바다가 만나는 삼각주, 속칭 다이아몬드 하버(D. Harbour)의 작은 항구도시 탐룩이라는 곳이었다.

지도상으로는 약 100km 밖에 되지 않는 길이지만 교외선 기차와 버스, 택시를 번갈아 갈아타고 어렵게 찾아간 탐룩은, 내심으로 기대했던 오래된 국제적 항구의 체취도, 거대하였다는 아쇼카탑도, 10여 곳이나 되었다는 가람은 흔적도 없었다. 도무지 역사의 이끼 냄새는 맡을 수 없는 그저 평범한 강 하구의 전형적인 소읍일 뿐이었다.

더구나 불교적인 체취는 더욱 그랬다. 불교사원을 의미하는 ‘비하르(Bihar)’나 ‘템플’이란 단어를 아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였다. 도대체 어디서 혜초의 체취를 맡을 것이며 어디서 법현, 현장, 의정의 발길을 찾을 것인지 막막했다. 우선 조그만 박물관과 「고고학 발굴 조사서」를 뒤져보았다. 그러나 출토된 유물들은 대개는 힌두교의 것들뿐이었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의 KBS의 취재팀을 기억하고 있는 유식한 귀인을 만나게 되었다. 시민광장 운운하기에 달려가 본즉 그 곳이 바로 옛 항구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벵갈 보리수가 줄을 지어 늘어선 아래 옛 항구의 제방이 발굴되었다는 것이었다.

홍수로 인해 물길이 점차로 변하면서 점점 포구가 멀어져 갔기에 본 줄기와 인공수로로 연결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는데, 설명을 듣고 보니 이론적으로는 납득은 할 수 있었지만 허망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휴식차 나무등걸에 기대어 물 몇 모금 마시고 앉아 있으려니 어느덧 야자수 사이로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그 때 문득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불교란 종교는 이미 천여 년 전에 인도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불현듯 생각난 것이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진리라고 믿었던 고타마 붓다의 말씀이 그의 고향 인도에서는 이미 지나가 버린 먼 과거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것은 천여 년 전에 그를 그리워하여 단신으로 바다를 건너왔던 혜초 사문이나, 다시 천여 년 후에 그 두 사람을 모두 그리워하여 이렇게 먼 곳까지 쫓아온 나에겐 그것은 ‘허무삼매’에 빠지게 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어찌 보면 ‘절대적인 영원한 진리란 없다’라는 화두에 매달리기 위해 이번 이 ‘해동의 나그네’는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