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 뜻은

특집/부처님 오신날

2007-09-28     관리자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면 부처님께서 이 사바에 오신 참뜻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마침 계절도 꽃피고 새싹 트는 봄날의 생동감과 더불어 뭔가 새로이 시작하는 기분이 드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부처님의 탄생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지도 모른다.
흔히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은 우리 중생들에게 삶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불자들이면 누구나 부처님께서 알려주신 길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이고 또 많은 이들이 그 길을 따라서 정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걸어가신 그 길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따라가기에는 너무도 어렵고 험난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중생과 부처님과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이 부처가 아닌 중생과 다른 점은 어떠한 경우에도 화를 내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심지어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에게도 화를 내는 경우가 없으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선지식으로 삼고 따르는 모든 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남보다도 내가 더 많이’라는 생각으로 소유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며 살고 있다. 물질적인 현상세계에만 집착하여 삼독심에 빠져서 살아간다.
남의 것을 탐내고 갖지 못하면 화를 내고 그 업보 때문에 육도를 윤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과 중생들의 차이점이다.
삼독심,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얼핏 3가지로 생각되지만 같은 것이다. 어리석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고 성을 내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는 원인도 바로 이 어리석음이고, 태어났기에 죽어야 하는 것도 그 근원이 바로 이 어리석음 때문이다.
태어난다는 것을 잘 생각해 보면 ‘육신을 취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서 스스로 택하여 육신을 취하고서는 육신을 자기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 중생들이 갖는 어리석음이다. 하지만 육신은 물질이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썩어 문드러질 물건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이 무상하고 허망한 육신에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며 육신이 주는 여섯 가지 감각의 세계에 빠져서 허송세월을 보내는 어리석음 속에서 산다.
부처님께서도 육신을 가지고 이 사바세계에 계시는 동안에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으셨다.
하루는 맨발로 걸으시다가 돌부리에 채이셔서 몹시 부어 괴로움을 겪으시며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하셨다. 이 말씀이 평범한 말씀 같아도 그렇지 않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늙고 병들어 가면서도 모르는 사실이 이 점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내가 지니고 있는 물건일 뿐이지 내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중생들은 육신을 나로 여기기 때문에 육신이 소멸할 때 자신이 죽는다고 여겨서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울부짖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고, 무섭고, 괴로운 것이다. 감각의 세계는 달콤한 즐거움도 있고 쓴 괴로움도 있지만 근원은 괴로움이다.
부처는 이 괴로움을 보고, 육신을 가진 것을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기회로 활용한 분이고, 중생들은 육체를 가진 것을 다섯 가지 욕망을 즐기라는 기회로 보고 즐거움에 빠져서 괴로움을 잊으려고 몸부림치는 가련한 존재이다.
바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아야만 진정 부처님을 마음속에 모실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오셨다고 하고 이 날을 맞이하면 해마다 부처님 오신 뜻을 새삼스레 되돌아보지만 부처는 오고 가지 않는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여의고 외면하고 어리석음에서 잊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면 그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진정한 나는 오고 가는 것이 아님을 보아서 오고감에 울고불고 하지 않고 웃을 수 있어야만 바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예부터 불자들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연등을 밝혀 왔다. 이처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등을 밝히는 행위도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밝혀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의 마음에 어둠이 있으면 이 사회가 어두워지고, 우리 각자의 마음에 밝음이 있으면 이 사회가 밝아지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어둠이란 자기 자신만 위하는 어리석음이고, 밖의 어둠이란 서로 단절되어 있어서 서로 믿고 의지하지 못함이다. 이 두 어둠은 본래가 같은 어둠이다.
주위에 있는 이웃들이 어려움과 곤경에 처해 있는데도 못본 체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더욱 메마르게 한다. 그것으로 인하여 각자는 더욱 더 자신만을 위하게 되고 껍질 속으로 들어가 어리석음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회가 되어야 쓸데없는 사회문제가 적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부처님이 연꽃을 들자 가섭이 미소를 지었듯이 서로서로 마음으로 통하면 불국토가 따로 있지 않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을 얻듯이 우리가 서로서로 마음을 주고받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회가 어려운 때일수록 종교가, 특히 불교가 해야 할 일은 더 많아 질 수밖에 없다.
근기 약한 중생들이 점점 많아지는 이 시대에는 부처님의 가피력을 빌어서라도 난관을 극복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해마다 삼천리 골골 절절마다 오색등 찬란하고, 확성기 소리 요란하건만 있는 자들만의 축제, 형식적인 잔치에 그친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불교는 내가 행복하고, 이웃이 행복하고 나아가 사회가 행복해지기 위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종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오신 참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중생들을 돌아보며 더불어 사는 것이 자신의 복덕을 다 취한 후에 여유가 남아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추구해야 당연한 수행의 단계임을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올해의 부처님 오신 날 행사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되는 현실 속에서 치루어야 하는 행사이니 만큼 우리 불자들의 참모습이 현실 속에서 어떤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그저 일년에 한 번 불자들만을 대상으로 형식적으로, 의례적으로 치루는 행사려니 하는 마음보다는 경제적, 정신적, 신체적 어려움으로 절을 찾지 못하는 어려운 이웃들을 먼저 생각하는 불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마음에 쌓여 있는 탐진치를 조금이라도 비워서 진정으로 부처님께 다가가는 것이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고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는 것이 부처님께 진정으로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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