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길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 영산재 이수자 동희 스님

2007-09-28     관리자

1975년 영산재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로 지정되고, 박송암(2000년 2월 1일 입적) 스님께서 보유자가 되면서 그 문하에서 영산재의 의식절차를 전수받은 동희 스님이 그 이수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때 비구니는 계보에 없다는 이유 하나로 이수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20년이나 지난 1995년 비로소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 이수자가 됨으로써 동희 스님은 우리나라 첫 비구니 범패승으로서 계보를 세우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후학지도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계신 스님은 1970년 초부터 스님들을 비롯하여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범패를 가르쳐 왔으며, 현재는 영산재보존회 부설 범음대학교수로,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 그리고 예술종합대학과 운문 승가대학에서 범패와 작법을 지도하고 있다.
범패란 오랜 연마를 통한 과정 속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 받는 가르침이다. 스님은 수행에 목적이 없는 것처럼 범패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결과이고 목적이요, 수행이었기에 그저 묵묵히 그 길을 따라 걸어왔다고 하신다. 스님의 범패를 담은 <한국의 범패시리즈> 1집 2집이 CD와 카세트테입으로 발간되었으며, 어느 이름 모르는 불자가 스님의 예술세계를 화보집으로 만들어 올린 <한동희 스님의 영산대작법>이 있다. 스님은 그 동안 세계 곳곳에서 공연을 통해 범패를 세계화했으며, 지난 해 가을에는 보름 정도 뉴욕 심포니 스페이스와 케네디 센터 등에서 미국순회공연을 가졌다. 공연은 대성황이었다. 우리의 범패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무한한 에너지와 평화를 준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자연의 소리인가
하늘의 소리인가
이것은 설령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경전마다 부처님 설법하실 적
천상의 미묘한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데
범패의 소리가 바로 그 소리인가

환희심에 절로 나는 춤사위는
꽃을 드니 미소를 지었던
가섭 존자의 바로 그 춤사위가 아니런가

콧등이 시큰하며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법의 흥취
어떤 법문에 비할까

동희(57세,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 영산재 이수자) 스님의 범패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끝모를 부처님의 세계로 빠져들면서 어두운 미망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 소리는 설령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천상의 소리랄까 우주의 소리랄까. 저 깊은 심연에서 들려오는 범패소리를 들으면 산란했던 마음이 쉬어지고 저절로 법의 흥취에 흠뻑 젖어들게 된다.
1945년 8월 5일 해방둥이로 태어난 스님은 여섯 살 되던 해에 서울 청량사로 동진 출가했다. 세세생생 타고난 범패승이었던가. 어린 사미니는 어른 스님들의 염불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어깨너머로 염불을 배우고 큰 재가 있는 날이면 법당에 들어가 염불을 하고 싶어서 안절부절 도대체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6·25전쟁이 막 끝나고 모든 물자가 귀하던 시절 어린 사미니는 공양간에서 양은냄비 뚜껑 두 개를 몰래 훔쳐 뒷산에 올라가 바라춤을 추고, 양재기에 구멍을 뚫어 솔방울을 꿰어 징이라고 치며 혼자 염불을 했다. 절로 돌아올 때는 혹시 없어질 새라 땅에 파묻어 두곤 했다.
“중이 법당에서 기도만 하면 됐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극성이냐.”는 은사스님의 불호령에 눈물을 쏟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은사스님은 당신의 은사스님(경성에 염불 잘 하는 연인도 갑인도 두 스님 중 한 분으로 두 스님이 염불하는 날엔 스님의 염불을 들으러 장안의 여인들이 다 모여들었다고 함)이 범패승으로 잠시도 절에 머물지 않고 전국을 선객처럼 떠도시는 것이 못마땅했기에 당신의 상좌에게는 그 일을 시키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어린 사미니는 심한 혼찌검을 당해도 울음 대신 법당에 들어가 염불로 풀곤 했다.
열세 살 되던 해인가. 당대의 어장이신 송암 스님이 석 달 동안 청량사 스님네들께 염불을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동희 스님은 신촌 봉원사에 계신 송암 스님을 틈만 나면 찾아 뵙고 “공부하러 왔습니다.”하면 스님께서는 “앞에 것이나 잘 하지 무엇을 배우러 왔느냐”며 내쳤다.
열 번 가면 한두 번 가르쳐주셨을까. 제대로 못하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져 눈물을 쏙 빼곤 했다. 요즈음이야 녹음기가 있지만 악보도 없는 상태에서 구전으로 범패를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를 들으면 두세 개를 아는 영민한 제자들도 여럿 되었지만 스님은 도대체가 그런 면이 없었다. 스승으로부터 칭찬 한 번 제대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 박송암 스님은 공부하는 이에게는 매우 엄한 분이셨다. 그러나 여느 사람들에게는 아주 자비로운 분이셨다. 그렇게 10년쯤이 지났을까. 법당 앞에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있노라면 마음의 소리길이 훤히 보였다. 이생에 태어나 내가 할 일은 바로 이 일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스님께서는 ‘범패는 깊은 계곡에서 들려오는 범종소리와 같고, 천파만파의 파도를 그리되 속되지 않고, 장인굴곡(長引屈曲)하고, 일자다음(一子多音)하여 유장하고 심오한 맛이 있어야 한다. 또한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움직임 없는 움직임을 볼 줄 알아야 참다운 범패승’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말이나 글로도 전할 수 없는 표현을 스님을 통해 전해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는 크나큰 복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님의 저런 것을 나도 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많았어요. 일생을 해도 스님만큼은 도저히 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40여 년을 배웠지만 늘 새롭고 늘 어렵고 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지난 1995년 12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렸던 ‘한동희 스님의 영산대작법’은 그야말로 눈물바다를 이룬 감동의 무대였다.
스승이신 박송암 스님의 팔순을 기념하여 제자로서 그 동안 배운 것을 정리해서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범패와 작법들이 자꾸 간소화되다 보니 없어질 염려도 있고 하니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정리해서 무대에 올려보겠습니다.” 하자 스님께서는 “나 죽거든 하라”.시며 단호히 불허하셨다.
“스님이 안 계신데 누구를 위해 하란 말씀입니까….” 스님은 그저 묵묵히 공연준비를 해갔다.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었다. 광복 50주년이 되던 1995년 12월 3일 비로소 ‘한동희 스님의 영산대작법’이 무대에 올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인 송암 스님과 준보유자 구해 스님, 이수자 법현 스님, 그리고 서울대 이애주 교수, 서울시립관현악단 김영동 상임지휘자가 함께 출연해주었다. 불교의식을 개인이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준비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리고 도대체 몇 사람이나 영산대작법을 보러오게 될 지도 미지수였다.
그런데 공연장소로 국립극장 소극장을 예약하고 공연소식을 알리자마자 순식간에 예매가 끝나버렸다. 1회 공연을 기획했지만 바로 2회 공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수백 명이 공연장 밖에서 들어오지 못한 채 아우성이었다. 극장측의 양해를 구해 계단 사이사이까지 가득 메운 관객들은 2시간 30분 공연 동안 꼼짝하지 않은 채 자리를 지켰다.
공연이 시작되자 관중석 여기 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연하는 스님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승이신 박송암 스님은 제자의 손을 꼭 잡고 무대에 올라 함께 범패를 했다. 그리고 공연이 다 끝난 후 비로소 한 말씀 하셨다.
“칭찬을 해주면 혹여 자만해질까봐 그 동안 칭찬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정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는 벽심(碧心, 송암 스님께서 지어주신 법호)이가 가지고 있다. 시작한 날이 오늘이고 매일 처음 시작하는 그 마음으로 오늘까지 공부한 이가 바로 벽심이다.”
공연 한 달 전부터 거의 매일 나오시어 지도를 아끼지 않으셨던 송암 스님은 몹시 기뻐하셨다. 동희 스님은 당신의 생전에 가장 좋았던 일이 바로 스님과 함께 무대에 서고 스님께 기쁨을 드렸다는 것이었다.
스님께서 열반하시기 며칠 전까지도 마치 친딸처럼 스님의 시봉을 했지만 그 날도 역시 꾸지람을 들었다. “스님, 저 몇 살쯤 되어야 혼 안 나요?”
“너처럼 잘하는 이 없지. 어떻게 더 잘하겠니?”
스님은 참으로 깊은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팔만사천 가지 법문을 하신 부처님께서는 마지막에 오히려 한 말씀도 한 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불가에 몸을 담은 지도 50년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불보살님의 가피로 외로이 범패의 계승발전에 평생을 바쳐오신 송암 스님의 문하에서 전통적인 불교의식을 전수받게 된 것을 늘 고맙게 여깁니다.
스님의 그 큰 뜻을 이어 앞으로도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미약하지만 영취산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만물이 환희심을 일으킨 참된 그 뜻이 우리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더 나아가 세계인류에게 전해지도록 해야지요.”
동희 스님은 50년 전부터 송암 스님께서 늘 입으셨던 그 옷을 입고 계시다. 비록 나일론 천으로 만든 옷이지만 가벼워서 좋으시다며 평생을 입으셨던 옷이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자꾸 헤어져 군데군데 꿰매 입다보니 이제는 말 그대로 누더기 옷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품이며 화장이며 어찌 그리 송암 스님과 똑같은지….

영산재는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하신 법화경을 듣고 그 곳에 모인 수많은 보살들을 비롯하여 천룡팔부중 그리고 사바세계의 사부대중이 환희심을 일으켜 하늘에서는 만다라꽃이 내리고 천동천녀가 내려와 꽃과 향과 기악과 가무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재의 규모가 매우 커서 장엄하고도 성대하여 1일 권공(勸供) 3일 영산(靈山)이라고 하듯이 불교의례의 의식 중에 가장 규모가 큰 법요의식이다. 예전에는 나라의 기쁜 일이나 어려운 재난을 극복해야 할 때 봉행했던 국가적인 행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억불정책과 1911년 일본총독의 사찰령이 공포되면서 의식작법의 금지와 규제로 원래 모습이 많이 사라졌으나 박송암 스님을 비롯하여 구해 스님, 동희 스님, 법현 스님 등 몇 몇 스님들로 인해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영산재의 범패(부처님을 찬탄하는 소리)와 착복(着服, 作法이라고도 하며 범패에는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타주춤 등 반드시 춤이 따른다)은 다른 불교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전통소리, 전통무용의 원형으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50호로 지정되어 한국불교 태고종 영산보존회 주최로 매년 단오날 봉원사에서 시연회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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