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한 살의 수행자

보현행자의 목소리

2007-09-28     관리자

이남덕 선생님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김성칠 씨의 책 『역사 앞에서』였다. 피난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서 6·25전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자료를 찾고 있던 중, 이 책을 한 번 읽으라고 노광욱 선생님이 빌려주신 책이 바로 『역사 앞에서』였고, 그 책의 끝부분에 김성칠 씨의 아내인 이남덕 선생님의 글이 실려 있었다. 남편이요, 스승이요, 조국수난의 동반자인 김성칠 씨에 대한 연모의 정이 전쟁 중의 고난, 아픔과 함께 잔잔하고도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1951년 김성칠 씨가 세상을 떠나신 뒤 혼자서 네 자녀를 키우시고 국어학을 계속하여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수십년을 가르친 뒤에 이제는 은퇴하셨다는 개인적인 여건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미주현대불교’에서 취급하는 도서 목록 중에 이남덕 선생님의 저서 『여든 살의 연꽃 한 송이』가 있는 것을 보고 책을 사서 읽었다.
오십 편에 가까운 수필에 나타난 이남덕 선생님은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며 스스로 경험하기 위해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용기있는 분이었다. 남의 좋은 것을 칭찬하면서도 자기 것에 대한 애정과 자부로 탄탄하게 다듬어진 분이었다. 물질뿐 아니라 자아를 버리는 불자의 수행을 감사한 마음으로 걷는 아리따운 분이었다.
나는 마음으로 그 분을 깊이 흠모하게 되었고, 언제고 한번 찾아뵈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11월 초에 시작하여 삼 주일 동안 한국을 여행하는 일정에 갑사를 끼워 넣은 까닭은 그 곳에 이남덕 선생님이 계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전 이모님 댁에 도착한 것이 오후 한 시 경, 여기서 갑사를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니, 지금 이 시간에 갑사에 가는 것은 무리이니 다음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이모님이 말리셨다. 그러나 다음날은 또 다음날 대로 일정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남편과 나)는 잠깐 다녀오겠노라고 우겨서 집을 나섰다.
유성 온천 경찰서 앞에까지 오니 마침 갑사 가는 버스가 있었다. 갑사까지 약 40분, 유성을 빠져나오며 이어지는 시골길을 따라 갑사 입구에 도착한 것이 3시 40분. 대전으로 나가는 막차가 6시 40분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절에 이르는 길로 들어섰다. 길의 양 편으로 초겨울의 나무들이 검은 둥치와 마른 가지들을 펴고 흐리고 어둑한 하늘을 받치고 서 있었다.
갑사 입구에 있는 게시판을 훑어보니 이곳에 『월인석보』 제21권의 원본 판목이 보물로 지정, 보호되어 있고, 그 판본의 간행이 있었음을 알리는 기사가 붙어있다. 백제불교사상연구회라는 간판이 붙은 방 앞으로 가서 인기척을 내고, 책을 한 권 구입할 수 있는가 물으니 할 수 있다고 하여 한 권 산 뒤에, 혹시 이남덕 선생님이 계신지 물었다. 대자암에 계시다는 대답을 듣고 만나볼 수 있는 지 여부를 물으니 계시기만 하면 가능하리라는 대답이다. 대자암은 큰길을 따라 한 20분 계속 올라가면 된다고 한다.
초겨울이라고는 해도 네 시면 아직 밝을 때이나 날씨가 흐려서 주위는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내리고 산모퉁이를 돌면서 땀이 흘렀다. 산의 꼭대기, 첩첩으로 둘러선 계룡산 자락에 대자암이 있었다.
마침 선방인 듯한 곳에서 나오는 분이 있어서 이남덕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어 왔노라고 하니 누구라고 전할는지 묻는 것이다. 우리 이름을 대도 소용없는 일이라, 워싱턴에 사는 독자가 왔노라고만 했다. 그 분은 선생님을 뵙고 저녁 공양을 하고 가라고 하신다. 괜찮다고 했더니, 그래도 공양을 하고 가라고 재차 권하신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이모님이 대전에서 기다리시기 때문에 안 되겠노라고 사양하고 방 안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이남덕 선생님은 색깔이 곱고 넉넉한 회색 옷을 입고 계셨다. 우리는 선생님께 절하고 미리 연락도 없이 오게 된 경위를 말씀드렸다. 우리의 얘기를 듣고 난 다음부터 선생님은 아무 스스럼없이 마치 우리가 선생님의 오랜 제자이기라도 한 듯이, 가부좌를 하신 앉음새와 정정한 목소리로 여러 가지 얘기를 하셨다.
선생님을 따라 대자암에 와서 참선하시는 87세 된 보살님의 얘기, 미국에 사는 큰며느리가 손자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한글로 할머니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것을 칭찬해 주었다는 얘기, 하루 여덟 시간을 꼬박 앉아서 수행하시는 얘기, 여든 한 살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쓰려고 계획하고 있는 글은 ‘나의 유언’이 될 것이라는 얘기 등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이 잔잔하고 재미있게 주변 얘기를 들려주셨다.
선생님의 얘기를 듣는 동안 산길을 바삐 오느라고 화끈거리던 우리의 얼굴은 서서히 식고 등줄기를 흐르던 땀도 멎었다. 그대신 그와는 다른 열기가 선생님의 말씀에 실려 우리에게 전해졌다.
“며칠 전 나라에서 훈장을 준다기에 서울에 갔었어요. 서울에서 뜻밖에 친한 친구 장례식을 치뤘어요.” 하고 선생님은 또 다른 애기를 꺼내신다. “나이도 있고 해서 요새는 내 주변의 친구들을 하나둘씩 잃는데 이번에도 친한 친구 한 명이 세상을 떴어요. 어느 병원 영안실에 있다고 해서 갔었지요. 요새는 사람 숨이 끊어지자마자 냉동실에 넣는데 그건 잘못하는 일이에요. 숨이 끊어진다고 해서 곧 죽는 것은 아니거든요. 난 그 앞에서 『티벳사자의 서』에 나오는 경전을 세 번 읽어줬어요. 그 친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것뿐이었어요.
사람의 혼은 3일 동안은 자기가 떠나온 육체 근처에서 떠돌고 있대요. 그 혼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도와줘야 해요. 울고 애통하고 떠들며 소란을 피우면 이 중요한 시기를 망쳐버리는 거예요. 난 그래서 자식들에게 당부해 두었어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내 손으로 몸 깨끗이 하고 옷 깨끗이 입고 할테니까 내가 숨이 넘어가거든 내 몸에 손 하나 대지 말라고요. 냉동실에는 물론 넣지 말고, 그렇다고 소리 내서 곡을 하거나 너무 슬퍼하지도 말라고요.
내가 극락에 갈 수 있는 최후의 기회가 바로 이때이니까. 이 중요한 시간에 나는 지성을 다해서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부처님께 빌 터인데 주위에서 너무 애통해하면 방해가 되거든요. ‘나의 유언’에 쓰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지요. 내 두 분을 위해서도 꼭 쓰지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면서 겁냄도 회한도 아쉬움도 다 접어두고 마지막으로 남은 기회, 사람의 혼백이 육체를 아주 떠나기 전의 사흘을 불자로서의 수행과 정진으로 이어가고자 열망하는 저 분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가. 어찌 저리 자유스럽고 부드러우며 넉넉하며 담담할 수 있는 것일까.
여섯 시가 되었다. 일어나서 부지런히 걸어야 막차 시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선생님께 절하고 일어났다. 바깥은 이미 바로 눈 앞이 보이지 않은 어둠이고 골짜기를 타고 치닫는 바람에 실려 비까지 뿌렸다. 차가운 바람과 빗줄기는 그러나 우리의 열띤 얼굴과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지척이 보이지 않는 험한 산길을 그냥 발이 놓이는 자리를 디디며 내려왔다. 보이지 않아도 디뎌서 안전한 곳을 발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몸은 발에 맡기고 마음은 계속 선생님께 두고 있었다. 미처 인지(認知)하지 못했던 인연의 줄에 끌려 우리는 선생님을 찾아 뵙고 한 시간 남짓 그 분과 마주앉아 있었고, 이 만남은 또 하나의 소중한 인연의 줄이 되어 선생님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고 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 인해 온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 풀, 나무, 짐승, 벌레, 남과 나,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고로 그 모두를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보호해야 된다는 것. 지금 살아있음을 감사하며 지성을 다해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 나눠가짐으로 인해서 더욱 풍성해지는 삶의 신비. 자유로움과 지혜와 수행의 자리는 제각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곳이라는 것.
이남덕 선생님은 그분을 에워싸고 있는 경험과 지혜와 수양의 바다에서 한 웅큼의 물을 퍼올려서 우리가 마시도록 나눠주셨고, 선생님의 보시로 인해 우리의 마음밭은 새로 보습을 댄 듯이 풍요롭고 활기차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때문에 저녁 공양 시간을 놓친 선생님이 오늘은 저녁을 거르시겠구나. 시장하실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