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

초대설법/아짠 마하 부와

2007-09-28     관리자

이 글은 1974년 6월 아짠 마하 부와 스님의 런던 방문시, 영국인 불자들과의 대담 중 일부이다. 1970년대에 이미 남방의 스님을 초청하여 진지한 대화를 모색하는 영국인들의 모습을 통해 서구인들의 불교에 관한 높은 관심과 이해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좋은 사람들은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간에 상관없이 진리 안에서 하나되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출처:『The Dhamma Teaching of Acariya Maha Boowa in London』, Chuan Printing Press Ltd. Part, Bangkok. 1980.
위기 를 당했을 때 마음의 힘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의지처로 찾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고열로 인해 온몸이 불덩이같이 되거나, 감정적으로 심히 괴로울 때 또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사고를 혼자서 당했을 때, 즉 총체적인 난국을 당했을 때, 진실을 알아왔고, 진실을 보아왔던 마음은(진정한 ‘용사’는) 외부의 어떠한 도움도 바라는 바 없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습니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이러한 난국을 마음의 힘으로 해결해 본 사람은 삶과 죽음에 대해 근심걱정이 없어집니다.
괴로운 감정을 예를 들어봅시다. 이것은 언제 어느 때나 가리지 않고 발생합니다. 죽은 다음에 어디에 태어날까 하는 염려, 이 상황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저 상황에서 싸워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의 괴로운 감정이 발생했을 때 알아차림이 없다면 마음은 온통 이것들에 의해 점령당하여 속수 무책일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터 이런 것들에 대항해서 맞서왔고 또 승리를 거두어왔던 마음은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 즉시 알아차림과 지혜가 서로 힘을 합하여 ‘전쟁터의 최전방’으로 달려갑니다. 죽을 때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반면에 전쟁이 일어난 현장에 즉각 출동하여 맞싸웁니다. 이런 경우에 살거나 죽거나 간에, 우리는 담마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번뇌에 끌려다니는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것들에 대한 진실을 알고자 원합니다. 경전에서 설해지는 담마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확인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할 방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어떤 불상사들을 대면하자마자 알아차림과 지혜가 즉각 달려와서 명백하고 뚜렷하게 진실을 알고 그리고 보게 해 줍니다. 즉 경전 속의 담마가 그대로 우리의 마음 속에서 확인됩니다.
그 어떠한 성인도 위기시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번잡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다 한적한 곳에서 수행했었고 또 그로 인해 좋은 결과를 얻었던 그 방법 그대로 위기시에도 지내고자 원합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병이 나자마자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 자식들이 다 어디에 있지? 손자 녀석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이 아들은 나를 전혀 돌보지 않는구나. 그리고 저 손자 녀석은 내게 관심조차 두지 않는구나.”
- 마음은 급속도로 침해를 받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고통을 줄이고 사라지게 할 방도를 찾아내지 못합니다.
“남편이 예전에 우리가 젊었을 때는 그래도 다정하더니, 이제 내가 다 죽어가니까 얼굴도 대면하기가 어렵구나. 남편도 나쁘고 자식들도 나쁘고 손자들도 나쁘다. 모두 다 나쁘다.”
- 사실은 나쁜 것은 그녀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즉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더러운 오물이 바깥으로 던져져서 모든 것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오물’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오물을 던지는 것, 이른바 불만을 터트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 속에 근본적인 원칙을 지니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때 “Attahi attano natho”은 온데 간데 없고 사람들의 의지처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우리들의 의지처는 어머니, 아버지, 유모이며 커서는 교사, 교수 등과 같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거의 하는 바 없이 타인을 의지처로 삼습니다. 그런 고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마음 속에 어떠한 기본적인 원칙도 수립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ttahi attano natho” 이것은 불자들이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리들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선생님, 교수님들로부터 그리고 불, 법, 승 삼보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가르침들로부터 얻은 해박한 지식과 이해를 근간으로 하여 스스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에게 다른 일들은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일들은 놓아버립니다. 그것이 수행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친척이나, 친구 또는 다른 어떤 이들도 부르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마음으로 되돌아 갈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상에 있는 그 무엇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 물, 공기, 불 - 그들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땅, 물, 공기, 불의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충분히 조사해왔고, 또 명백하게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들을 몸, 자기 자신, 나의 것들, 이것 또는 저것 등으로 끊임없이 이름지어 부릅니다.
수행에 의해 개발되어온 알아차림과 지혜는 이 요소(Dhatu)들과 무더기들(Khandas, 蘊)1)을 명료하게 분리해냅니다. 모든 종류의 모든 것들은 진실의 빛 아래서 완전하게 조사됩니다. 즉 마음도 요소들도 수, 상, 행, 식 또는 그 무엇이라도 진실을 드러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혼란도 아무런 문제점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만족스럽게 이 존재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Sugato(잘 지나 가셨습니다)” - 우리를 방해하거나 교란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나 남들에게 고통을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지고의 행복과 만족함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사망하여 장례식을 치를 때 염불을 하거나 숲 속에서 수행 중인 스님들을 굳이 오시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에 살아 있을 때 “당신의 마음을 챙기십시오.” 이것이 재가신도들이나 친척들에게 내가 그리고 ‘왓 빠반 타드’의 부와 존자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것입니다.
선한 마음 상태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스스로 그것을 개발해야 합니다. 누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수행하기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가 계신 스님들을 찾아가서 사자(死者)에게 공덕을 쌓아 주기를 간청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살아 있을 때 행복과 만족을 주는 길을 꾸준히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죽은 후에 스님들을 초빙하는 방법은 좋지 않습니다. 이것은 수행 중인 스님들을 방해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도록 가르치는 불교의 목적과도 어긋납니다.
불교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선을 추구하여 그것이 자신들의 삶의 일부분이 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죽을 때가 다 되었을 때도 근심으로부터 벗어난 이의 방식대로 “Sugato”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 적어도 내가 죽을 때만이라도, 제발 스님들을 초대하여 그분들의 수행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나는 수행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변치 않고 선한 마음의 상태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면 할 수 없지요.
그러니 혼자 죽게 내버려두십시오. 침몰하는 것은 단지 나 혼자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그 어리석음에 동참케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항상 말해오던 것이며 또 이것은 진실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몸을 버려야 할 때가 오면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이것을 버릴 것이며 따라서 쉽게 죽을 것이며 근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것입니다.
온 세상은 요소들과 무더기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을 버려야 할 때가 오면 온통 “오! 슬픔, 비통, 재난”이라고 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갈 때가 다가와도 가고 싶지 않아 합니다. 제발 이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런 고로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진실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가야 할 때가 되었으면 가고 그러나 아직 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으면 사십시오.” - 오렌지 쥬스가 아직 잔에 남아 있으면 나는 그것을 끝까지 마실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부터 방해꾼 노릇을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것들을 놓아 버려야 하니까요.
이것들은 너무도 무겁습니다. - 5온이 무거운 짐입니다.- 이것들을 버리며, 진실로 자연스런 방법대로 나아가며, 그리하여 만족스럽게 지나가서 수행의 궁극적인 완성에 도달합니다. 부처님께서 그러하셨고 그 분의 제자 분들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분들을 따릅니다. 아무런 의심없이 이렇게 해야 합니다. - 어떻게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 오늘은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군요. 내일은 타일랜드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서도 여기 계신 형제 자매님들을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마음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의도(동기)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동기가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 런던에 있는 형제 자매님들을 방문하러 온 것은 오로지 선의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또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둥급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들의 가슴은 끊임없는 태어남과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번뇌와 함께 하는 삼사라(Samsara)2)의 소용돌이 속을 돕니다. 그런 고로, 부디 여러분은 마음이 이 Samsara의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완전한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자 내일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야 하니, 오늘 여러분의 가슴 속에 있는 어떠한 의문일지라도 질문하도록 하십시오.

질문
‘담마(Dhamma)’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각각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에 세상사람들에게 펴신 가르침을 말합니다. 사실상 ‘진정한 담마’는 시초부터 항상 이 세상에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의 역부족으로 인해 이 진정한, 본래의 담마는 그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담마의 핵심(에센스)은 중도를 가리키는 팔정도에 있습니다. 중도를 음식에 비유한다면 짜지 않고 싱겁지도 않고 또 너무 양념이 많이 들어가 있지도 않아 알맞게 맛있는 음식이 될 것입니다. 옷에 비유한다면 대량 생산되는 값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알맞게 재단하여 잘 만든 옷입니다. 담마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원인과 결과 양자에 모두 합당한 중도입니다.
세상은 문제점들로 불타고 있어 실제적으로 살 만한 곳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옳고 바른 담마의 원칙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담마와 이혼했습니다. 그 결과로 세상은 끊임없는 걱정과 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담마에 등을 돌리고 산다면 계속해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책을 통한 담마에 대한 공부는 담마가 무엇인지 알게 해줄 뿐이며 직접적인 담마 수행을 통해서만이 그 수확3)을 맛볼 수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