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티베트’, 환상의 라다크(Ladakh)

수미산순례기/ 후기

2007-09-28     관리자

조지라(Zoji-La, 해발 3,529) 넘어 비경의 왕국으로

히말라야 동북지방의 룸텍 사원을 떠난 ‘해동의 순례자’의 발길은 이번에는 정 반대 방향인 인도 서북쪽의 카슈미르 지방으로 향했다. 우선 다람살라에 임시로 머물고 있는 칼마파 린포체와 달라이 라마 성화를 만나야 할 목적도 있었지만 그 외에도 이번 기회에 티베트 족의 유랑의 삶도 조명해보고 싶은 욕심도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며칠씩 걸리는 인도 대륙의 동서횡단 열차여행의 즐거운(?) 고행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하여간 뉴델리를 경유하여 다람사라에의 기차 길목인 파탄코트까지는 파김치가 되어 도착하였지만 막상 터미널에서 스리나가르행 버스를 본 순간 마음은 이미 비경의 티베트 왕국, 레(Leh)로 달려가고 있었기에 목적지였던 다람살라 행을 일단 귀로로 미뤄 놓고 무작정 올라 타고 보았다. 높은 산과 계곡과 터널을 지나 도착한 카슈미르의 중심지 스리나가르(Srinagar)는 ‘동양의 베니스’라는 호칭답게 아름다운 물의 도시였다.
그리고 그 곳은 불교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대승경전의 완성지, 이른바 ‘제4차 결집(結集)’이 이루어진 곳이다. 비록 오래 전에 완전히 이슬람화되면서 불교 유적들은 모두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도처에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쌍벽을 이룬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과 쿠샨 왕조의 카니쉬카 왕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그것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며칠을 머물러야 하였다. 하지만, 마음이 벌써 환상의 왕국으로 달려가고 있었기에 서둘러 조지라를 넘어 가는 차편에 몸을 실었다.
스리나가르와 레 사이에는 히말라야와 카라고람이라는 거대한 양대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두 곳은 인접한 지방이지만 인종, 문화, 종교가 완전히 대조적이다. 전자가 아리안적 혈통의 이슬람권인 반면에 후자는 몽고로이드적 불교권이다. 인도가 독립되면서 두 지역은 쟘무&카슈미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주(州)로 편성되었지만 두 지역은 아직도 여전히 기름과 물과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울리지 않는 조건을 가진 두 지역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조지라이다. 이 지방은 원래 지형적으로 험난하기에 외부 인적이 드문 데다가 중국, 파키스탄, 인도의 접경지역이어서 국경분쟁이 그칠 날이 없다. 그렇기에 현재도 가끔 관광객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다. 그 때문에 이 곳은 ‘비경의 왕국 상그릴라’의 이미지로 바깥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과연 소문대로 고개는 높고 험해서 옆자리의 코쟁이 친구들은 이미 고산병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반나절 만에 가슴 졸이며 힘들게 고개를 넘으니 길은 계곡을 끼고 인더스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바로 인더스의 본류였다. 그러니까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서부 티베트고원에 솟아 있는 카이라스 산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수미산에서 발원하는 4대강 중에서 북쪽으로 흐른 사천하(獅泉河)가 바로 이 곳으로 흘러 내려오는 인더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길은 대승불교와 탄트리즘이 전파된 유서 깊은 고도(古道)이다. 또한 서기 720년대에는 우리의 혜초 사문도 지나간 길이다. 오천축(五天竺)의 순례를 마친 혜초는 스리나가르를 출발하여 토번(吐蕃)의 점령하에 있었던 대발률(현 파기스탄의 Scardu)를 경유하여 인더스를 따라 소발률(小勃律, 현 Gilgit)로 가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길깃트와 레 왕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카슈미르에서 동북쪽으로 15일을 가면 사파자국(娑播慈國, 현 Leh) 등에 이른다. 이들 세 나라는 모두 토번의 관할하에 있다. 땅이 협소하고 산천이 매우 험준하다.”라고 하였다.
정말 혜초의 말대로 도로는 험난하였지만 길 가에는 유서 깊은 길에 어울리게 도처에 드라스, 뮬백, 라마유르, 피양, 알치 등과 더불어 간다라풍과는 다른, 토번 시대에 조성된 몽고리안풍이 완연한 8세기대의 마애불(磨崖佛)과 티베트 불교 곰파가 즐비하여 볼거리가 많았다.


하늘나라에의 정거장, 레(Leh)

스리나가르에서 434Km 거리에 달하는 1박 2일의 험로행 끝에 도착한 ‘레’는 기원의 오색 깃발, 타루초(經幡)’의 펄럭임 속에 들어 있었다. 해발 3,500m의 고산지대여서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태양은 야성이 살아 있듯 내리꽂히고 있어서 한 눈에도 ‘리틀 티베트’ 혹은 ‘하늘나라에의 정거장’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곳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스스로를 ‘라닥키’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몽고로이드 티벳계 혈통이었고 아리안계의 몬족과 다르드족도 섞여 있었다. 첫 만남의 인사말은 ‘쥴레 쥴레’였는데 라사어로 ‘타시딜레’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숙소를 정하고 배낭을 던져 놓고 달려간 곳은 티벳식 식당이었다. 그 동안 토끼처럼 채식 위주의 식단과 인도의 특이한 향신료인 마샬라에 질린 나그네의 위장은 티벳식의 국수‘뚝파’와 만두 ‘모모’, 그리고 양고기‘라샤’요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김치나 된장찌개 같은 것이 절실했겠지만 그런 것들은 여기서는 꿈도 못 꿀 것들인지라 꿩 대신 닭 셈으로 오랫만에 포식을 하고 해거름에 시내 중심에 솟아 있는 궁전으로 올라갔다.
라사의 포탈라를 모델로 한 전형적인 이 티벳식 궁전은 남걀 왕조에 의해 16세기에 지어졌지만 지난 세기에 카슈미르와의 전쟁으로 일부가 부숴져버려 일부만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반은 폐허 상태로 남아 있었다. 궁전의 테라스로 올라가니 레 시가지와 멀리 설산의 능선이 한눈에 시원스레 들어온다.
티벳불교의 후홍기(後弘期)를 열었던 서부 티벳의 구게 왕조와 라닥 왕조는 원래 한 형제에서 파생된 같은 혈통의 왕국들이었다. 그렇지만 후일 두 나라는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된다. 구게와 라닥의 『왕통기(王統記)』를 정리하면 그 비극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소급해서 전개된다.
당나라와 어깨를 마주하며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토번 왕조가 9세기에 랑다르마 왕이 암살되면서 벌어진 후계문제로 인하여 왕국이 분열되어 긴 암흑기에 들어가자 그 손자인 니마콘은 수하를 데리고 서부 티벳으로 달아나 지방호족과 연합하여 왕국을 다시 세웠다.
그는 말년에 세 아들에게 나라를 공평하게 나누어, 큰 아들에게는 라닥 지방을, 둘째에게는 왕국의 근거지인 포랑 지방을, 셋째에게는 싸파랑 지방을 주었다. 그 중 막내 데죽콘의 후예들은 싸파랑을 중심으로 구게 왕국을 세워 인도에서 고승 아티샤를 초청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하여 암흑기에 들어 있었던 설역고원에 다시 법륜이 돌아가게 하였다. 이른바 티벳 불교사의 ‘후홍기(後弘期)’의 시작이었다.
한편 큰아들 페지콘은 히말라야를 넘어가 인더스 중류의 ‘레’에 도읍을 정하고 원주민과 연합하여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한 라닥 왕조를 세운다, 이렇게 토번의 후예인 니마콘을 시조로 한 구게 왕조와 라닥 왕조는 불교를 공통분모로 한 형제지국 관계를 이어 내려 왔지만 17세기에 이르러 두 나라는 원수지간으로 변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당시 구게 왕조는 왕족과 승단간의 알력으로 국력이 분열되어 있었는데 사파데 왕에 이르러 왕비가 소생이 없자 라닥의 공주를 재취로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주가 오는 도중 내부사정이 생겨 파혼이 되어 공주는 도로 라닥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라닥과 구게는 오랜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 때 라닥 왕조는 유명한 셍게 남걀(僧格朗杰, Sengge namgyal, 1590~1620) 왕 때였다. 사자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 왕은 쟘양 남걀과 레를 점령한 뒤 이슬람화된 발률국의 공주 카툰과의 사이에서, 극적인 로맨스에 이은 사자꿈의 태몽으로 태어나서 후에 불세출의 영웅으로 전설화된 인물이다.
그는 등극하자마자 국력을 길러 마침 구게의 내란상태를 이용하여 18년 전의 한을 풀기 위한 설욕전을 벌여 구게 왕국을 함락시키고 레의 초원을 덮을 만큼 많은 야크, 양, 염소, 말 등을 데리고 라닥으로 개선하였다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그 뒤 라닥은 남걀 왕조라는 이름으로 게룩파의 티벳불교를 받아들여 크게 번성하면서 근대까지 몽고, 이슬람, 중앙티벳과 전쟁을 벌이며 독립을 유지하다가 신생 인도에 편입되었다. 현재 남걀 왕조의 후예는 비록 통치권은 현 인도정부에 이양하였지마는 여전히 주민들에게는 상징적인 국왕으로 대접받으며 레 인근의 스톡(Stock) 궁전에 거주하고 있다.
대개 고대 왕조의 폐허는 나그네를 언제나 감상에 젖게 만든다. 오늘도 이런 인간들의 체바퀴 역사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석양은 설산 뒤로 넘어 가고 이윽고 핏빛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 라닥 왕국이여! 셍게 남걀이여!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