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을 경책하는 여덟 조목

연지대사 경중 팔조

2007-09-28     관리자

저는 출가할 때, 어질지 못하고(不仁) 의롭지 못하고(不義) 버릇없고(無禮) 지혜롭지 못한(無智) 일에 대해서는, 설사 남들이 저더러 하라고 끌어들여도, 저는 스스로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여기면서 터럭끝만치도 절대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제가 전생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을 친하게 가까이하여, 제8식(八識:아뢰야식·무의식)의 밭 가운데 착하고 좋은 말들만 받아들여 저장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생에 자연스럽게 죄악을 보면 부끄러워하며 한사코 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착하고 좋은 사람들을 착실히 가까이하며, 아침 저녁 발원할 적에 앞으로도 세세생생 선지식(善知識)을 친하게 가까이하길 간절히 발원하십시오.
저는 출가한 뒤, 사방 곳곳에 두루 참방(參訪)하였습니다. 당시 편융(偏融) 법사님 문중이 크게 명망을 떨치고 있었는데, 저도 서울(京師)까지 일부러 찾아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다시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나아가 경외(敬畏)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편융 법사님께서 이렇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대는 본분(本分:자기 본래 분수)이나 잘 지키고, 명예를 탐하거나 이익을 좇아 나다니지 말며, 또한 바깥 사물의 인연에 끄달려 한눈 팔지도 말게나. 오직 인과 법칙을 분명히 알고 한마음으로 염불하게나〔因果分明, 一心念佛〕.”
제가 그 가르침을 받잡고 나오자,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이 크게 비웃었습니다. 그들 생각으로는 ‘이런 몇 마디 말이야 어떤 사람인들 못지껄인담?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 왔으니, 그래도 몹시 고상하고 미묘한 법문이라도 설해 줄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고작 반 푼어치도 안 되는 시시한 말이잖아?’라는 핀잔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법문이 바로 그 분의 좋은(훌륭한) 점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애타게 우러르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먼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 분께서는 무슨 현묘한 설법으로 우리를 압도하시지 않고, 오직 당신께서 스스로 체험하고 몸소 깨우치신, 절실하면서도 쉽고 가까운 정확한 공부(수행) 방법을 성실하고 착실하게 간곡히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문은 그분의 훌륭하심을 보여줍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 가르침을 착실하게 준수해 오고 있으며, 일찍이 내팽개치거나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시방의 승가대중(十方僧衆)은 성현들이 출몰(出沒)하기 때문에, 저는 일찍이 공경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무릎을 꿇기 전에 제가 먼저 무릎을 꿇었고, 상대방이 절을 하기 전에 제가 먼저 절을 하곤 했습니다. 전에 방상(方上)에 한 스님이 계셨는데, 사람들은 모두 그가 못생기고 지저분하며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업신여기고 깔보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저를 보더니만, 이내 능엄경(楞嚴經)의 현묘한 이치를 아주 깊이 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절대로 남을 업신여기거나 깔보지 마십시오. 절대 명심하고 또 명심하십시오.
〔우리 속담에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도 있지만,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는 “성인은 허름한 누더기를 걸치고 소중한 보옥〔道德〕을 품고 있다〔聖人被褐懷玉〕”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를 닦고 부처님 공부를 하는 분들은 절대로 겉모습 가지고 남을 평가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될 줄로 압니다.: 옮긴이〕 도(덕)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으로는 믿음〔信〕이 첫째 제일입니다. 나쁜 일〔惡事〕도 믿음이 없으면 오히려 이룰 수 없거늘, 하물며 착한 일〔善事〕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비유하자면, 세간의 도적들도 때로 탄로나서 관청(국가)에 붙잡혀 극형에 처해지는데, 다행히 나중에 풀려나게 되면 뉘우칠 줄 모르고 여전히 나쁜 짓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길(도덕)이 본전 한 푼 없이도 헤아릴 수 없는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고통과 위험을 무릅쓰고서 결코 뉘우치거나 물러서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염불(念佛)에 더이상 진실하고 간절하게 공들이려 하지 않는 까닭은, 단지 일찍이 (염불이 어떤 법문인지) 깊이 생각하거나 굳게 믿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극락정토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것도 없이, 단지 사람 목숨이 숨 들이쉬고 내쉬는(呼吸) 사이에 있다는 세존의 설법만 믿어 보십시오. 이 한 구절 말씀이야 의미상 이해하기 어려운 건 없지만, 여러분이 눈으로 친히 보고 귀로 들으면서 얼마나 수많은 모범(실례)들을 거쳐왔으면서도, 지금까지 여러분이 이 한 구절 말씀 믿도록 할 수가 없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만약 이 한 구절 말씀만 진실로 믿을 수 있다면, 염불 법문은 제가 이렇게 혼신의 기력을 다해 천만 번 간곡하게 당부할 필요도 없이, 여러분 스스로 냇물이 골짜기를 쏟아져 내리듯 세차게 쫓아갈 것이니, 만 마리의 소〔牛〕라도 붙들어 말릴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 입적하신 스님을 떠나 보낼 때, 여러분은 이 모범(실례)을 보고 마땅히 수심에 차 찌푸린 모습으로 서로 절실하게 경책했어야 옳습니다.
“대중들이여! 여러분과 저는 오늘 아무개 스님을 떠나 보냈지만, 내일 어느 스님을 떠나 보내고, 자신도 모르게 언제 내 차례가 돌아올 줄 알겠습니까? 그 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을테니, 우리 한시바삐 서둘러 염불합시다. 이 소중한 시간 어영부영 보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 하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한테도 참 안 됐다고 말하고, 남한테도 참 안 됐다고 말하면서, 입적하신 스님의 유물을 대중이 모인 가운데 값을 매겨 경매에 부친 뒤, 예나 다름없이 태연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사람 목숨이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呼吸〕 사이에 있다는 법문도 안 믿는 것입니다.
제가 이제 새로 공부하는 후학 스님들을 보니, 이제 막 ‘나무아미타불’ 명호 한 구절을 마음 속에 들여 놓자 한가한 생각과 잡념망상이 갈수록 더 들끓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 가지고, ‘염불 공부는 마음을 추스려 모을 수 없다’고들 투덜댑니다. 여러분이 한량없는 겁(劫) 동안 심어온 생사(生死)의 뿌리가 어떻게 그렇게 금방 딱 끊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천만 갈래 잡념망상이 어지러히 일어날 때가 바로 공부하기 좋은 시절인 줄 알아야 합니다. 금방 추스리면 다시 금세 흩어지고, 그렇게 금세 흩어지면 다시 금방 추스리는 겁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되풀이하면서 염불공부가 순수하게 무르익으면, 자연히 잡념망상이 더 이상 일지 않게 됩니다. 또 여러분이 잡념망상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고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원리를 보아도, 참선과 염불은 공부의 본래 바탕 자리가 서로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옮긴이〕 칭명(稱名) 염불하는 방법에는, 묵송(默持)이 있고 고성염송(高聲持)이 있고 금강염송(金剛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성염송은 힘이 너무 많이 드는 것 같고, 묵송은 쉽게 혼침(昏沈)에 빠집니다. 오직 남한테 들릴락 말락 나지막한 소리로 은밀하고 면면히 이어지도록 입술과 이〔齒〕 사이에 소리를 내는 염불을 금강염송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염불하는 방법은 일정하게 집착할 수 없습니다. 더러 너무 힘든다 싶으면 묵송해도 괜찮고 또 더러 꾸벅꾸벅 졸음이 온다 싶으면 큰 소리로 염불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요즘 염불하는 사람들을 보면, 단지 손으로 목탁을 치고 입으로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실제 이익을 별로 못 얻습니다. 반드시 ‘나무아미타불’명호가 한 구절 한 구절씩 또렷이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가면서, 소리소리마다 절절히 자기 마음을 불러 일깨워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한 사람이 깊이 잠들었는데, 다른 한 사람이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그 사람이 곧장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염불이 마음을 가장 잘 일깨우고 추스려 모을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염불하려 들지 않는 것은, 단지 서방정토를 얕잡아 보기 때문입니다.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은, 바로 가장 큰 덕과 복과 지혜를 두루 갖춘 위대한 성현만이 가능한 일이며, 사바세계를 정토로 바꾸는 길로서, 조그마한 복덕의 인연과 결코 같지 않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이 성(城:예컨대 서울시) 안에서 하루 밤낮 사이에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보기나 하십시오. 극락왕생은 말할 필요로 없고, 천상에 올라가는 사람도 백천만 명 가운데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스스로 수행을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고작해야 사람 몸〔人身〕 잃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 석가모니 세존께서 대자대비로 이 염불법문을 가르쳐 주셨으니, 그 공덕은 천지(天地)보다 훨씬 크고, 그 은혜는 부모님보다 더 막중하여, 이 몸을 다 박살내고 뼈를 죄다 빻아도 보답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는 염불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웃집 한 할머니께서 매일 꼬박꼬박 수천 번씩 염불하시는 걸 보고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 이유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남편이 돌아가실 때 염불을 하셨는데, 아주 편안하게 잘 가셔서, 나도 이렇게 염불한다오. 남편이 돌아가실 때는 아무런 별다른 질병도 없었고, 단지 다른 사람을 한번 불러 보더니 작별하셨다오.”
그런데 출가 스님들이 어찌하여 염불하지 않는단 말입니까?